북문 공동구매단의 사무실은 오래전에 문을 닫았다. 창문에 박힌 못이 녹슬고, 간판 위에는 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우편함은 비어 있지 않았다. 최근 날짜가 찍힌 임대료 독촉장이 세 장 들어 있었다.
“건물이 폐쇄돼도 누군가는 돈을 내야 하니까요.” 에리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돈을 받으려는 사람은 정확히 주소를 알고 있네요.”
우리는 법원 허가를 받아 건물주를 찾았다. 그는 공동구매단이 종이 납품을 중단한 뒤에도 지하 창고만은 분기마다 임대를 갱신해 왔다고 했다. 임대료 납부인은 매번 달랐고, 영수증에는 단체의 옛 이름이 쓰였다. 오래된 단체 명의를 쓰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니었지만 누가 권한을 승계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열두 장 표지를 납품한 적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건물주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종이를 세는 사람이 아니오. 월세를 세는 사람이지.”
“그러면 월세 영수증부터 보여 주십시오.”
그는 나를 잠시 보다가 웃었다. “징수관은 정말로 세는 것부터 시작하는군.”
지하 창고를 열자 오래된 쌀자루와 목재 상자가 보였다. 여기서 문서를 찾겠다고 모든 상자를 뒤집는다면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던 무차별 수색과 다를 바 없었다. 티르센은 공인된 형판 보관함만 먼저 확인했고, 나는 영수증에 적힌 수납 구역을 대조했다. 열두 장의 표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납품 견본으로 쓰던 얇은 가죽 조각 몇 개가 나왔다.
“수첩과 비교해도 됩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원본을 직접 대면 안 돼. 섬유 성분과 압인 형태만 별도 채취해 확인해야지.”
티르센은 가죽 견본을 봉투에 넣었다. 흔적이 같은지 여부는 다음 감정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하 벽에는 색이 다른 벽돌이 한 줄 있었다. 브란트는 혹시 숨긴 방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건물주는 거기에 수도관을 묻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벽돌 사이로 작은 물기가 흘렀다. 나는 그 말을 기록했다. 새로운 지하 통로가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비밀 조직을 상상하지만, 대부분은 배수구였다.
그날 오후 오렐이 내게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수첩 첫 장이 공개되지 않았어도 국고 열일곱 닢이라는 숫자는 몇 주 전 왕궁 앞 공개 회계 보고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 수첩을 훔쳐보지 않아도 그 숫자를 영번 전사본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럼 비교할 게 없어진 것 아닙니까?” 루카스가 실망했다.
“아니. 비교할 대상이 명확해진 거야. 공개된 숫자를 베낀 건지, 공개되지 않은 흔적까지 닮은 건지 따로 보면 돼.”
에리카는 제이 인쇄실의 잉크 주문 기록에서 뜻밖의 항목을 발견했다. '개인 기억 보관 표지용 먹색.' 용도가 수상했지만 그 잉크는 원래 병원 환자의 회복 일지를 보관할 때도 쓰는 제품이었다. 우리는 성급하게 비밀 결사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납품처가 병원과 왕궁 사이에서 섞였을 가능성을 조사했다.
인쇄실 견습이 손을 들었다. 이름은 하엘이었다. 그는 스스로 서류를 제출하고 싶어 했다. 다만 상관이 불이익을 줄까 두려워했다.
“법원에 비공개 진술을 신청할 수 있어.” 내가 말했다. “당신이 본 것과 남에게 들은 것을 분리해 주면 됩니다.”
하엘은 밤에 누군가 첫 번째 인쇄판을 가져와 '다시 날짜를 먹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가 말했는지 어둠 속에서 얼굴은 못 봤다고 했다. 목소리도 인쇄실 직원인지 외부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도장도 보지 못했다.
“날짜를 먹인다는 건 뭡니까?”
“사본 위에 제작일을 새로 찍는 겁니다. 낡은 날짜를 고쳐 쓰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원본은 그대로 남나요?”
“원칙적으로는요. 그런데 그날은 첫 판이 아침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인쇄실의 야간 작업표를 확보했다. 판이 반출된 날과 북문 수리소가 같은 번호의 받침을 반납했다고 보고한 날은 가까웠다. 그러나 날짜를 확인할 독립 시계 기록은 없었다. 하엘은 일주일쯤 전이라고 했고, 서류에는 열흘 전이라고 적혔다. 하루 이틀 차이를 두고 누군가의 기억을 거짓이라고 몰고 싶지 않았다.
마이렌 보호기관에서는 또 다른 편지가 왔다. 마이렌은 자신이 삼 년 전 화재 당일 받았던 밥표를 직접 보지는 않겠지만, 표지 열두 장이라는 숫자 때문에 신원이 노출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화재의 열두 번째 자리가 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됐다.
“그 아이가 뭘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무언가를 기억하지 않아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걸 먼저 믿어 주면 좋겠어.”
우리는 구호소로 가던 길에 정상 세금 납부를 위해 줄 선 상인들을 만났다. 두 명이 영수증을 서로 보여 주며 웃고 있었다. 예전에는 돈을 냈다는 증명을 받으려 또 돈을 줘야 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줄에서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는 방안을 약속했다. 여기서도 문제는 같았다. 한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공적 기록이 명확하면, 가짜 증명서가 들어올 틈이 줄어든다.
케른에게 연락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을 찾는 이유는 종이의 납품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옛 이름 때문에 이미 한 번 생업을 잃었다고 했다. 누가 그의 새 이름을 공공 게시판에 적는 순간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 있었다.
“공식 조사 대상이 아니면 왜 그렇게 조심합니까?” 젊은 경비병이 물었다.
“조사 대상이 아니라서 더 조심해야죠. 국가의 일이 그 사람의 삶에 들어가려면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졌다.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비슷한 실수를 본 적이 있었다. 한 거래처의 주소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가족의 주소까지 같은 보고서에 넣었고, 나중에 공개 과정에서 관계없는 가족이 불필요한 전화를 받았다. 서류를 작성할 때는 편했지만 서류가 밖으로 나간 뒤에는 그 편함이 다른 사람의 고통이 됐다.
에리카는 그 얘기를 듣고 출석 신청서의 항목을 줄였다. 이름, 사건과의 관련 경력, 연락 가능한 중립 기관만 남기고 공개 필요성이 없는 과거 주소와 가족관계는 가렸다. 법정에서는 본인 확인을 별도로 하되 일반 열람 자료에는 새 이름만 보이도록 했다.
루카스가 말했다. “그럼 누가 도망친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잖아요.”
“그 구별은 기록관이 적법한 범위에서 하는 거야. 시민 누구나 그 사람의 사정을 전부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우리는 구호소 마당에서 그 절차를 설명하는 작은 모의 심리를 열었다. 오딜이 나서서 유족 역할을 맡고, 루카스는 접수인이 됐다. '누군가 나 대신 손도장을 찍었다'는 항의를 접수할 때 필요한 정보와 필요하지 않은 정보를 나눴다. 가족을 잃은 사정, 이름을 고친 이유, 이사한 지역을 묻지 않아도 서류 번호와 피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럼 접수인이 돈을 준다고 약속하면 안 되는 거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실제 돈이 보관돼 있고 권리가 확인됐을 때만 지급을 안내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희망을 먼저 팔게 돼.”
오딜이 손을 들었다. “저는 손도장을 찍었다고 이미 돈을 받은 것으로 적혀 있으면 어떻게 하나요?”
에리카가 답했다. “출금 기록과 수령 확인을 분리해 조사합니다. 영수증 모양의 종이가 있다고 수령인 본인의 확인이 끝난 건 아니에요.”
“그럼 누군가 내 이름을 썼는데 나는 몰랐으면요?”
“명의 도용을 신고할 수 있고, 원본 감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신고했다고 무조건 처벌받거나 권리를 잃는 건 아니에요.”
오딜은 한참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적어 주세요. 우리 구호소엔 법전보다 밥그릇을 더 자주 보는 사람이 많아요.”
나는 짧은 문장으로 안내문을 다시 썼다. '이름을 쓴 것과 돈을 받은 것은 다릅니다. 손도장을 찍으라고 하면, 무엇을 확인하는지 먼저 물어보세요. 공식 창구는 돈을 주기 전에 돈이 어디 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글을 다 쓴 뒤에도 한 가지가 걸렸다. 경비대나 재무청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공식 창구'라는 단어가 얼마나 도움이 될까. 나는 발급 기관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개 연락처와 봉인 번호 대조 방법을 덧붙였다. 국왕의 얼굴이 찍힌 안내문이라도 확인할 길이 없다면 가짜와 다르지 않았다.
그날 북문 상인회 대표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는 장사가 느려지는 것만 걱정하던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실무적인 제안을 했다. 서류 진위 확인 담당자를 시장 날씨가 좋은 날에 한 명 파견해 달라는 것이었다. 상인들은 왕궁까지 오가는 동안 하루치 장사를 놓쳤다. 나는 정식 담당자 배정 가능 여부를 로웬에게 문의했다. 상인회가 자비로 표지판을 만들겠다는 조건은 받되, 표지판 문구와 발급 권한은 재무청이 확인하게 했다.
“이번에는 진짜 표지판이겠지요?” 대표가 물었다.
“표지판 하나만 보고 믿지 않도록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웃었다. “돈 벌기가 점점 번거로워지네.”
“세금 내기는 조금 덜 번거로워지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대화가 끝나자 에리카가 케른에게 보낼 연락장을 가져왔다. 편지의 첫 줄은 '과거 이름의 공개를 요청하지 않습니다'였다. 나는 그 한 줄만으로도 우리가 처음보다 나은 조사자가 됐다고 생각했다.
공동구매단의 서류를 정리하다 루카스는 오래된 보존 기간 표시를 발견했다. 대부분의 납품 전표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폐기되도록 돼 있었지만, 안전사고에 관한 운송 전표는 더 오래 보관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화재 뒤 물건을 옮긴 기록이라면 후자의 적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누가 일부러 버렸을 수도 있겠네요.” 그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고, 보존 규정을 몰랐을 수도 있지. 먼저 폐기 결재 기록을 보자.”
우리는 불에 그을린 옛 문서철을 열었다. 폐기 승인 날짜가 쓰인 면은 일부 훼손돼 있었다. 가짜 날짜라고 몰아붙이기 전에 종이 자체가 언제 젖었고 언제 마른 것인지 감정할 필요가 있었다. 티르센은 화재 현장에서 건져 낸 문서들이 여러 번 재건조됐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문서철의 목차에는 표지 열두 장이라는 항목 옆에 작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송, 미반환.' 실제 이송처는 비어 있었다.
“사라진 물건들이 왜 전부 반환 대기 상태일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같은 관리 절차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물건을 나중에 같은 이름으로 묶었을 수도 있지.”
그는 잠깐 답답해하더니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물건마다 고유 번호를 매겨 현재 위치, 마지막 서명, 실제 확인 여부를 한 표에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찬성했다. 북쪽 초소의 미반환 청동 상자와 공동구매단의 표지 열두 장은 같은 것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먼저였다.
에리카는 표 맨 위에 경고를 적었다. '동일한 분류 명칭은 동일 물건 또는 동일 소유자를 뜻하지 않음.' 짧은 문장이었다. 나중에 누군가 이 표만 보고 새로운 계약 권한을 주장하려 할 때 꼭 필요한 문장이기도 했다.
저녁 심리에서 하엘의 진술은 비공개로 채택됐다. 법관은 판 반출 당시 감독자와 당직자를 특정할 자료를 보전하라고 명령했다. 레온하르트 차관의 기관부호가 관련 대장에 찍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범인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법정을 나서는데 오딜이 달려왔다. 공동구매단 건물에 남아 있던 낡은 월세 영수증 중 하나를 그녀가 알아봤다고 했다. 화재 뒤 구호소로 물자를 옮겨 주던 수레꾼의 이름이 영수증 수령인란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살아 있어요. 그런데 이름을 바꾸고 다른 마을에 갔죠.”
나는 숨을 내쉬었다. 서류에는 새 이름으로 된 적법한 임대 계약이 필요했다. 이름을 바꾼 이유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을 추적해야 할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먼저 연락할 방법을 묻자. 증인이 된다는 것과 도망자라는 건 다르니까.”
에리카가 영수증을 다시 접었다. 내 수첩의 첫 날짜를 찾던 길이 누군가의 새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부를지가 다음 조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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