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93화
PAYLUA ORIGINAL · 제93화

93화. 표지가 먼저였다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673자

오프라인 책장
“수첩을 어디서 샀습니까?” 티르센의 질문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어려웠다. 나는 한국에서 늘 쓰던 것처럼 수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봉인실에 있는 물건은 거친 갈색 가죽 표지에 왕국 제지공의 실로 묶인 작은 책이었다. 한국에서 들고 온 물건인지, 왕국에 도착한 뒤 받은 물건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손에 쥐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재무청 책상에서 처음 썼던 기억이 나지만, 그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괜찮습니다. 물건의 출처를 모른다는 것도 중요한 진술입니다.” 에리카가 보관고 관리인에게 지급품 원장을 받아 왔다. 내가 징수관으로 임명될 때 받은 물품에는 잉크병 하나, 왕실 규격지 여섯 장, 수첩 한 권이 있었다. 규격지에는 서명이 있는데 수첩 항목의 서명은 비어 있었다. 지급자가 대충 처리했을 수도, 물품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빈칸이 곧 범죄라는 증거는 아니었다. “내가 수첩을 만들어 냈다고 믿으셨습니까?” 티르센이 물었다. “제가 그렇게 믿었나 봅니다.” 내가 답했다. “고향에선 손에 익은 물건이었으니까요.” 그는 수첩의 제본 실과 왕궁 납품 실을 비교했다. 굵기는 비슷했지만 꼬임 방향이 달랐다. 마을의 제지소와 북문 필사점에서도 같은 재료를 쓰는지 확인해야 했다. 법원이 허락한 재료 검사는 계속됐지만 내용 검사는 제한돼 있었다. 나는 한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수첩이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내 고향의 글씨는 누가 옮겨 적었을까. 곧 스스로 답했다. 내가 직접 적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물건의 출신과 글씨의 출신을 혼동하면 안 된다. 그날 오후 왕궁 기록실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급식실 견습 마이렌의 행정 등록 정정이 완료되기 전까지 보류됐던 근무 일수 일부가 인정됐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에 편지를 열었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시 조용해졌다. '지급액 산정은 별도, 실제 수령 증명은 없음.' 마이렌의 보호기관 담당자는 통화용 수정구를 통해 말했다. “당사자는 돈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몸이 굳습니다. 사망 보상금과 임금이라는 말이 자꾸 뒤섞인다고 합니다.” “그럴 만합니다.” 나는 답했다. “두 서류를 분리해서 보내겠습니다. 그가 직접 나오지 않아도 대리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요.” “그에게 또 손도장을 요구하는 일은 없겠죠?” “현재 확인 절차에 손도장이 필요하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나는 전화가 끊긴 뒤 오래된 급식실 기록을 꺼냈다. 근무 일수는 식사 횟수와 같지 않았다. 누군가는 아파서 일을 쉬었어도 밥을 먹었고, 누군가는 밤을 새워 일하면서도 식사를 놓쳤다. 삼 년 전 장부는 둘을 같은 칸에 적었다. 그 모순을 찾아야 실제 체불임금을 산정할 수 있었다. 메라가 급식소에서 쓰던 낡은 국자를 가져왔다. “이것 보세요. 손잡이에 줄이 셋 있죠? 식사 마감 시간마다 한 줄을 긁었어요.” “줄이 세 개면 세 끼인가요?” “아니요. 한 번은 급식소 문을 잠근 시간, 한 번은 남은 국을 분배한 시간, 한 번은 물자를 받은 시간이에요. 사람 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나는 웃음이 났다. 회계 기록에서는 숫자보다 그 숫자를 만드는 습관을 아는 사람이 중요했다. 국자를 쥔 메라의 손이 그걸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왕궁 제이 인쇄실의 물품 담당자는 네일의 주문서와 비슷한 번호를 보고도 자신들은 두 번째 받침만 주문했으며 첫 번째 받침은 이전 계약의 미납품분이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납품서를 요청했다. 그는 짜증을 냈다. “왕실 인쇄실이 범죄 현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수령 확인을 부탁드리는 겁니다.” “서명이 없어도 매일 물건은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서명 없는 날을 따로 확인하겠습니다. 정상 물품을 의심 물품과 섞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쇄실 노동자들이 서명한 기록을 자신의 목숨처럼 지키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책임자가 편의를 위해 건너뛴 칸 때문에 작업자 전체가 의심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수첩의 출처를 묻는 일이 고향을 묻는 일처럼 느껴져서인지, 나는 그날 유독 한국 생각을 많이 했다. 세무조사관으로 일할 때 나는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조사 계획서를 세 장 출력하곤 했다. 한 장은 팀장에게, 한 장은 담당자에게, 한 장은 내 가방에 넣었다. 가방에 넣은 장은 늘 구겨졌지만 내 손이 적은 메모 덕분에 시간이 지난 뒤 상황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 습관이 이세계로 따라왔다는 생각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생각이 그럴듯하다는 것과 정말 그렇게 했다는 것은 다르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국 사무실의 창문은 분명 사각형이었다. 그런데 그 창문이 오른쪽 벽이었는지 왼쪽 벽이었는지는 잊었다. 기억을 조금 더듬자 새로운 장면이 생겨나는 듯해서 나는 거기서 멈췄다. 불명확한 기억을 억지로 채우는 것은 빈칸을 위조하는 것과 닮았다. 루카스가 나를 지켜보다 물었다. “수첩에 적힌 글자를 제가 읽을 수는 없겠죠?” “한국어니까 어려울 거야. 하지만 읽을 수 없는 글씨가 꼭 비밀은 아니야.” “그럼 왜 가리고 있어요?” “남에게 보여 줄 필요가 없는 내용이니까.” 그는 한동안 생각했다. “제 어머니 편지를 제가 안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거랑 같은 거네요.” “그렇지.” 나는 그에게 내가 아는 한국어 숫자 몇 개를 적어 주었다. 하나, 둘, 셋. 물론 그 종이는 사건 증거가 아니었다. 루카스는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발음을 따라 적어 주었지만 정확한 한국 표기법에 맞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는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면 이것도 증거가 되겠네요. 징수관님이 여기 있었다는.” 나는 그 말에 웃었다. “그땐 내가 직접 증언하면 좋겠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에리카가 돌아왔다. 그녀는 수첩을 제출한 사람으로서 내가 감정 범위에 관해 추가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판의 압흔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범위만 열고, 개인적인 이름과 지명은 가리되 획의 방향과 잉크 종류는 감정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적인 글씨가 원본인지 알아야 하지 않나요?” 루카스가 물었다. “그 글씨가 사건과 관련된다고 입증되지 않는 한 먼저 확인할 이유는 없어.” 에리카가 답했다. “나중에 필요성이 생기면 별도 심리를 열어야지.” 그녀는 이해관계 고지도 다시 제출했다. 자기 부친이 삼 년 전 이 사건의 초기 문서에 관여했으므로, 부친 필적 감정은 다른 전문가가 맡도록 요청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게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어렵죠. 제 아버지 글씨는 제가 누구보다 많이 봤으니까요. 하지만 많이 봤다는 게 정확하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그녀가 웃지 않은 채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저에게 같은 말을 했을 거예요.”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는 금화가 제일 중요한 줄 알았다. 지금은 문서 한 줄에 사람의 기억과 명예가 매달려 있었다. 금화는 돌아오지 않으면 돈을 추적할 수라도 있다. 사람의 명예가 잘못된 장부 때문에 손상되면 되돌리기 훨씬 어렵다. 오후에 왕실 기록관이 납품 원장을 펼쳐 보였다. 수첩 항목 옆에는 물건을 받았다는 서명 대신 '추후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당시 임시 징수관 물품을 정기 지급품으로 처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설명했다. 국고가 비어 있던 시절이라 기존 물품을 재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새 수첩을 산 적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구매 기록을 못 찾았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 말을 정확히 기록했다. 결론을 서둘러 얻는 사람보다 자료의 빈칸을 지킬 줄 아는 기록관이 필요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 고향의 이름을 회복하게 된다면 그 이름에도 같은 태도를 지키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수첩이 없는 책상 앞에서 새 기록 양식을 만들었다. 맨 위에 날짜를 적고 세 칸을 그었다. '내가 직접 본 것', '남에게 들은 것', '나중에 떠올린 것.' 첫 칸에는 저녁 식사로 나온 수프, 두 번째 칸에는 케른이라는 사람에 관한 연락, 세 번째 칸에는 한국의 문구점 기억을 적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났다. 이런 식으로 쓰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끝없이 분류만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삼 년 전 화재 기록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의 수가 부족하다는 점만이 아니었다. 누가 직접 보았는지와 누가 나중에 들었는지가 같은 문장에 섞여 있었다. 마이렌이 치료소에서 들었다는 말이 화재 현장에서 직접 들은 것처럼 옮겨졌을 때 사건의 방향이 얼마나 달라졌던가. 에리카가 내 서류를 보며 말했다. “기억을 고치지 말고 출처를 적겠다는 거군요.”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 붙잡고 싶습니다. 그런데 붙잡겠다는 마음 때문에 없던 기억을 만들어 내면 안 되잖아요.” “당신이 돌아갈 수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여기서 우리가 함께 했던 일은 적을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고향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모르는 것과 곁에 있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창밖에서는 왕궁 종이 세 번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한국의 신호등 소리가 떠오르다가 멈췄다. 두 소리가 실제로 비슷한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비슷하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 칸에 '소리 연상, 사실 확인 불가'라고 썼다. 그렇게 기록하고 나니 기억이 조금 덜 무서워졌다. 이튿날 나는 왕실 보관고에서 내 수첩과 같은 크기의 빈 수첩을 찾아냈다. 표지 색은 비슷했으나 안쪽 종이의 올이 달랐다. 지급품 원장의 수첩 규격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국왕 집무용, 다른 하나는 임시 징수관에게 지급하는 값싼 장부였다. 내가 썼던 것은 뒤쪽과 더 가까웠다. 그런데 제본 도장이 달랐다. 보관고의 빈 수첩은 '재무청 제삼 공급'이었고, 내 수첩의 실밥 아래에서는 '북문 구호소 기증품'이라는 희미한 압인이 보였다. “구호소에서 받았던 걸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가능하지. 하지만 기증품 도장이 후에 찍혔을 수도 있어.” 나는 오딜에게 이 표식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봉인된 물건을 멋대로 꺼내면 지금까지 지킨 절차가 무너진다. 대신 법원의 허가를 받아 압인 모양의 비식별 모사본만 보내기로 했다. 오딜의 답은 짧았다. “그 표식은 우리 구호소가 만든 게 아닙니다. 삼 년 전 화재 이후 종이와 수첩을 기증하던 북문 공동구매단의 표식입니다. 기증품을 받은 곳은 우리뿐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이름 없는 길을 얻었다. 구호소라는 단어가 수첩에 있다고 해서 수첩이 그곳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동구매단의 납품 원장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 로웬이 물었다. “자네가 쓰는 한국어도 이 나라에서 만든 종이에 얹혀 있다는 사실이 무섭지 않나?” “무섭죠.” 나는 말했다. “그래도 종이가 어느 나라 것이든 제가 썼다는 사실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남이 쓴 부분이 섞였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때 오딜이 보내온 두 번째 답신이 도착했다. 공동구매단의 오래된 기증 명부에는 수첩이 한 권도 없었다. 대신 '빈 표지 열두 장'이라는 물품이 들어 있었다. 에리카가 그 수량을 보고 내 얼굴을 살폈다. “열두 개라서 제12석과 관련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먼저 말했다. “알아요. 하지만 표지가 어디로 갔는지는 확인해야겠어요.” 나는 대답 대신 납품 경로 옆에 물음표를 그렸다. 처음으로 수첩의 첫 페이지보다 겉표지가 더 중요한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3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