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 제출하는 물건이 내 수첩일 줄은 몰랐다.
나는 왕국에 와서 처음 보았던 숫자, 금화 열일곱 닢을 맨 앞장에 적어 두었다. 그다음부터는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적었다. 한국의 집 현관에서 들리던 소리, 누군가 마지막으로 내게 건넸던 말, 이제는 이름조차 흐릿해진 첫 직장의 기억.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내가 나중에 떠올려 고쳐 적은 것인지 표시하려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브란트 법관의 요청은 한 문장이었다. '개인 수첩의 최초 작성 시점에 관한 본인 진술 및 영번 전사본과의 제한적 대조.' 내 마음에는 그 앞에 보이지 않는 문장이 하나 더 붙었다. '당신의 잊힌 기억까지 국가에 제출하라.'
“그런 요구까지 받은 건 아닙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내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제출하고 나면 누군가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범위를 정하는 겁니다.”
그녀는 종이에 칸을 셋 그렸다. 첫째는 종이와 잉크의 재료 감정, 둘째는 눌린 필압과 작성 순서의 감정, 셋째는 날짜와 문구 가운데 사건과 관련된 부분의 제한 열람. 한국에서 온 개인적인 기억은 원칙적으로 셋째 칸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법관이 필요성을 따로 판단하지 않는 한 누구도 내용을 복사할 수 없게 해 달라고 신청했다.
“수첩을 안 내면 의심받을 수도 있잖아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렇다고 내 모든 기억을 내놓을 의무가 생기지는 않아.” 나는 대답했다. “너도 누군가 네 임금 장부를 보자고 하면 가족에게 보낸 편지까지 함께 제출하고 싶진 않겠지?”
루카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기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그의 주머니에 있었다.
수첩을 봉인하는 자리에 국왕은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오렐, 법정 서기, 중립 감정관 티르센이 왔다. 오렐은 내가 가지고 온 수첩의 겉모습을 설명하고, 모서리가 닳은 정도를 그림으로 남겼다. 나는 수첩을 마지막으로 펼쳐 한국어로 적힌 부분에 얇은 종이 가리개를 놓았다. 감정에 필요한 쪽이 아니었다. 티르센은 가리개가 종이에 닿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지 확인했다.
“원본을 가져갈 수 있습니까?” 법정 서기가 물었다.
“원본은 봉인 보관하되, 감정할 때만 참관 아래 열어 주세요. 나중에 제게 보여 줄 열람 기록도 남겨 주시고요.”
서기는 괜한 요구가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오렐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없이 한 줄을 더 적었다. 나는 수첩을 내밀었다. 손바닥에서 작은 물건 하나가 빠져나갔을 뿐인데, 한국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문고리를 놓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심리에서 제삼 결제소의 대리인 리엔 모브는 반대했다. “수첩에 쓰인 내용이 영번 전사본과 같다면 전부 공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검증자라면 그의 기억은 공공의 계약에 속합니다.”
“그 사람이 동의했다는 증거부터 제시하시죠.” 내가 말했다.
“삼백 년 서식에 검증자의 확인란이 있습니다.”
“확인란이 있다는 사실과 제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 제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서로 다른 세 가지입니다.”
법관이 책상을 두드렸다. “오늘 심리는 신원 귀속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문서의 시간과 제작 과정을 다룹니다. 사적 기억 열람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브가 불쾌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가 가져온 사본에는 '외래 검증자 성명'이라는 칸이 있었다. 문제는 그 종이가 삼백 년 전 양식과 닮았지만 최근 붙인 표제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래된 칸이 새 사람의 권한을 증명해 주지는 않았다.
감정실에서 티르센이 내게 물었다. “왕국에 처음 온 날 바로 이 수첩을 쓰셨습니까?”
“그날 숫자 열일곱을 적었다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처음 몇 줄이 언제 적혔는지는 독립 자료로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왜 첫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편하겠죠. 그런데 제 기억이 흐려질 수도 있다는 걸 제가 제일 잘 압니다.”
티르센은 원본 첫 장의 아래쪽을 비스듬히 비췄다. 숫자 열일곱 아래에는 사각형이 있었다. 나는 영수증을 그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도 의견일 뿐이었다. 더 놀라운 건 종이를 덮고 눌렀을 때 다음 장에 생긴 아주 얕은 필압이었다. 날짜 비슷한 획이 보였으나 글자 전체가 아니었다.
“앞장을 넘겨 적은 흔적일까요?” 내가 물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언제 눌렀는지 먼저 봐야 합니다. 다른 종이를 위에 얹고 쓴 자국일 수도 있죠.”
그는 그 흔적을 새로 따라 그리지 않았다. 감정용 빛의 방향과 관찰 시간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대신 광학 투사판 위에 원형을 그대로 비춰 증인들에게 확인시켰다.
오후 늦게 서기가 나를 찾아왔다. “감정관님이 물으십니다. 숫자 열일곱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처음 제가 확인한 국고 현금입니다. 다만 지금도 열일곱 닢이 남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숫자가 오늘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아직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제 수첩을 베꼈다면 베낀 구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준점이 될 수 있겠죠.”
서기는 어색하게 웃었다. “징수관님은 본인의 기억에도 영수증을 요구하시는군요.”
“가능하면 두 장이요.”
나는 저녁까지 감정 결과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수첩을 보여 준 사람과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을 나눠 적었다. 루카스는 첫 장의 열일곱을 몇 번 보았다. 에리카는 그 숫자와 한국어 일부를 보았다. 오렐은 봉인 전 겉표지를 보았고, 브란트 경비대장은 내가 숫자를 적는 장면을 멀리서 한 번 봤다고 했다. 공개 회계 보고에도 국고 열일곱 닢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누구든 그 숫자를 알 수 있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수첩을 훔쳐봤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누구나 아는 숫자를 누군가 특별한 암호처럼 써서 나를 흔들 수 있었다.
수첩을 넘긴 뒤 나는 생각보다 오래 빈손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는 조사 대상 회사의 회계 장부를 맡겨 두고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 장부는 타인의 것이었고, 나는 법에서 정한 권한으로 보관했다. 지금은 반대였다. 누군가 내 기억을 조사하고 있었다.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보다 권한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불안한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징수관님이 이렇게 긴장하시는 건 처음 봐요.”
“나도 내 말이 틀렸을까 봐 겁이 나는 거야.”
“저는 틀리면 혼나는데, 징수관님은 틀리면 법정에서 바로잡으면 되잖아요.”
“바로잡히기 전에 누가 그 말을 믿고 행동할 수도 있지. 그게 무서운 거야.”
우리는 감정실에서 빠져나와 북문 세관의 아침 수납 상황을 확인했다. 수첩을 봉인하느라 원래 해야 할 업무를 미룬 참이었다. 북문 세관의 원장에는 오늘도 화물 품목이 빼곡했다. 곡물을 실은 수레가 셋, 약초를 실은 수레가 둘, 빈 통을 되가져가는 수레가 하나였다. 누군가는 수레마다 새로 만들어진 영번 확인표를 붙이라고 요구했다. 그 표가 없으면 통관이 지연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공식 절차입니까?” 나는 세관 서기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런데 상인들이 표를 가져와야 더 빨리 처리해 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 창구 앞에 현재 필요한 서류 목록을 붙입시다. 없는 서류를 추가로 요구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쓰고요.”
서기는 마지못해 그렇게 했다. 줄 뒤쪽에서 한 남자가 씩씩거렸다. “어제는 표가 필요하다기에 돈 주고 만들었는데 오늘은 필요 없다고요?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합니까?”
나는 그의 지출 증빙을 받아 들었다. 영수증에는 제삼 결제소의 네 번째 깃털 그림이 있었으나 공인 발행 번호가 없었다. 돈을 실제로 받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피해 접수 방법과 환급 가능성을 설명했고, 곧장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남자는 내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영수증 사본을 맡겼다.
“적어도 필요한 서류가 뭔지는 이제 알겠군.”
“그 목록이 또 바뀌면 공지하겠습니다. 창구 직원 개인이 새 조건을 만들지는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루카스가 말했다. “수첩 한 권을 누가 훔쳐보는 것과 저분이 엉뚱한 표를 사는 일이 연결되어 있네요.”
“같은 원칙이긴 하지. 누가 정당하게 요구할 권한이 있는가.”
“그래도 수첩은 돈으로 돌려받을 수 없잖아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책 한 권은 다시 살 수 있다. 거기에 적은 말을 다시 옮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왜 그 말을 적었는지까지 되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렐에게서 봉인 절차에 쓰는 장치 설명을 들은 것도 그날이었다. 증거물 상자를 둘이서 연다는 규칙은 처음에는 번거로워 보였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열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봉인 번호를 기록하면, 누구든 단독으로 물건을 바꿔 넣기 어려웠다. 오렐은 그걸 '나중에 서로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장치'라고 불렀다.
“그래도 두 사람이 공모하면 어떡합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그래서 외부 참관인과 열람 기록이 더 있지.” 오렐이 말했다. “완벽한 장치는 없지만 실패하기 어려운 절차를 만들 수는 있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삼 년 전 화재의 회색 외투와 상자들을 떠올렸다. 당시 누군가 원통을 보관했다고 주장했지만 봉인 번호와 인계 서명이 끊긴 지점이 있었다. 한 장의 장부가 불탔다고 해서 모든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기관의 이송 내역, 운송인의 식사 기록, 수문 통과표가 남았다. 우리가 끝내 찾으려는 것도 그 조각들이었다.
저녁 식사를 건너뛰려던 순간 에리카가 작은 빵 하나를 내밀었다. “한국의 기억이 사라지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정작 오늘을 굶어서 잊어버리면 무슨 소용이에요.”
나는 빵을 받아 들었다. “한국의 세무조사관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왕국 징수관에게는 제가 말해 드리는 거죠.”
빵은 조금 딱딱했다. 그래도 맛있었다. 그 맛까지 수첩에 적고 싶어졌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 종이에나 기억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개인 기록과 공개 장부를 구분하는 연습이 먼저였다.
다시 감정실로 돌아왔을 때 서기는 봉인 열람 장부에 내 이름을 적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날 수첩을 제출한 사람이면서도 감정에 개입하지 않는 참관인이었다. 두 지위가 같은 사람에게 있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티르센은 이런 때일수록 역할을 분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본인 진술은 감정 자료입니다. 다만 본인이 물건에 손댄 사실은 별도로 남겨야죠.”
“그럼 제가 수첩의 어느 장을 펼쳤는지도 기록합니까?”
“필요한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나중에 누군가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행정은 언제든 악의에 이용될 수 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을 범인처럼 대하는 행정은 아무도 협조하지 않는 나라를 만든다. 둘 사이의 가는 선을 넘지 않는 일이 오늘의 숙제였다.
나는 장부 옆에 서명을 남긴 뒤 주머니를 더듬었다. 습관적으로 수첩을 찾은 것이다. 빈 주머니에 손이 닿자 이상하게도 어릴 적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작은 공책을 고르던 장면이었다. 표지가 파란색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장면을 서둘러 사실로 적지 않았다. 대신 '오늘 떠오른 인상, 외부 근거 없음'이라고 별도 메모에 남겼다.
루카스가 그 글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은 원래 다 기억을 잘못하지 않나요?”
“그렇지. 그래서 네가 오늘 나한테 이 말을 했다는 것도 나중엔 다르게 기억할 수 있겠지.”
“그럼 제가 증명하겠습니다.”
그는 똑같은 문장을 자기 작업 일지에 적었다. 우리는 웃었다. 나는 여전히 한국 집 현관의 소리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되찾겠다고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의 말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일과가 거의 끝날 무렵 티르센이 감정실에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결과서가 아니라 얇은 빈 종이 두 장이 있었다.
“감정 결과를 말하기 전에 이 두 장을 봐 주시겠습니까?”
한 장에는 오늘 아침 내가 쓴 서명과 비슷한 눌림이 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수첩 첫 장의 사각형과 닮은 모양이 있었다.
“둘 다 제 수첩에서 나온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는 오늘 제 작업대에서 만든 실험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번 전사본 밑에 붙어 있던 받침 종이입니다.”
나는 두 장을 다시 보았다. 같은 모양이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먼저 그렸는지, 누군가 비슷한 틀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티르센이 말했다. “수첩의 첫 번째 날짜를 찾으려면 수첩만 볼 게 아닙니다. 같은 자국이 찍힌 기계를 찾아야 합니다.”
나는 새로운 수첩에 한 문장을 적었다. ‘내 기억을 제출했으나, 아직 내 기억으로 누군가를 유죄로 만들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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