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되지 않은 상자의 번호는 ‘영번’이 아니었다.
나는 다렌의 반출 번호표를 손에 들고 말했다. “여기 적힌 건 새 물품 번호예요. 삼백 년 전의 기록봉과 같은 물건이라고 단정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같은 출석 서식이 붙어 있죠?” 루카스가 물었다.
“누가 일부러 닮게 만들었을 수도 있죠. 아니면 같은 종류의 공무에 쓰인 걸 수도 있고요.”
그날 우리는 군무청 배차 원장과 북문 수리소의 수령 장부를 대조할 수 있는 임시 열람 명령을 받았다. 법관은 기밀 항목을 가린 상태에서 금액, 무게, 인계 시각, 서명 권한의 연속성만 확인하게 했다. 이 정도로도 충분할지 몰랐다. 누가 무엇을 넘겼는지는 사라진 물건보다 더 오래 기록에 남는 법이다.
첫 번째 대조에서는 놀라운 일이 없었다. 수레의 무게는 명세와 비슷했고, 왕궁에서 북문으로 이동한 시간이 맞았다. 두 번째 대조에서 비로소 차이가 났다. 출고 장부에는 청동 가름판 두 상자, 입고 장부에는 한 상자와 ‘반환 대기 물품’ 하나. 분류가 달랐지만 실물의 수량까지 달랐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반환 대기 물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수리소 관리자는 머뭇거렸다. “그날 외부 감사인이 확인하러 왔습니다. 확인을 마치면 다시 실어 가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실어 갔는지는…”
“기록이 없군요.”
“예.”
우리는 관리자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출고 문 옆의 낡은 저울과 포장 천 조각을 보전했다. 저울에는 최근 수리 흔적이 있었다. 물건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먼저 고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정확한 무게를 남기려 한 건지, 무게를 조작하려 한 건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오후에는 세르나와 로흐가 청동 가름판의 용도를 설명했다. 원통을 고정할 때 흔들림을 줄이는 판이며, 부속 부품을 교체하면 감응판처럼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구조 경보의 종소리가 울렸다는 신호를 기록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사람의 승인 증거는 아니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왜 출석 확인기를 만들었을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정말 사람의 출석을 확인하려고 했는지부터 봅시다. 장치가 남긴 흔적만으로 의도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주 동안 내가 배운 가장 불편한 기술은 결론을 미루는 일이었다. 국세청 조사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증거가 하나 나오면 기사 제목은 곧장 완성되지만, 사람의 인생은 그 제목보다 오래 남는다.
마이렌의 보호기관은 새 증언 요청에 답했다. 그는 더는 폐쇄 초소에 가지 않겠다고 분명히 했다. 대신 같은 날 자신이 급식실에서 받았던 작은 나무 밥표의 사진을 다시 감정하는 데 동의했다. 나무의 홈 세 개 가운데 하나가 최근 사진에서 더 선명하게 보였다. 티르센은 확대 결과만으로 새로운 홈이 생겼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조명과 촬영 각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에리카가 나무 표의 뒷면을 보고 물었다. “왜 이쪽에는 아무 글씨도 없죠?”
“원래 없었으니까요.” 오딜이 대답했다. “급식실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쓰려면 뒤에 썼는데, 마이렌은 끝내 아무것도 쓰지 않았어요.”
“왜요?”
“글을 몰라서가 아니었어요. 열두 번째 자리만은 매일 다른 사람이 잠깐 앉을 수 있었거든요. 그릇의 주인이 아니라 자리를 확인하는 사람의 표였으니까요.”
나는 오딜의 말을 기록했다. 수개월 동안 ‘열두 번째 견습’은 한 사람의 신분과 함께 사용되는 자리였지만, 행정상 ‘열두 번째 자리’에는 대체 확인자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과 직책을 구분하려던 노력이 그제야 의미를 얻었다.
“그러면 삼 년 전 마이렌의 대리 출석은 반드시 신분 위조였다는 뜻이 아닐 수도 있군요.” 내가 말했다.
“맞아요. 급식실의 정상적인 교대였을 수도 있어요.” 오딜이 답했다. “문제는 누가 그 교대 기록을 사망자 명단과 결합했느냐겠죠.”
그 말에 모두가 잠시 조용해졌다. 누군가는 일상적인 서식을 끔찍한 목적에 맞게 바꾸었다. 그게 모든 사고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다음 날 법정은 마이렌의 일부 근무 일수를 추가로 인정할 수 있는지 군무청과 당사자에게 의견을 요청했다. 그러나 실제 임금 지급이나 보상금 은화 마흔 닢의 수령은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보전된 조폐소 260금화도 움직이지 않았다. 돈은 그대로 묶여 있는데 문서만 수없이 쌓였다. 로웬이 나를 보며 말했다. “왕국이 서류로 가득 차면 그걸 태워서 겨울을 나면 되겠군.”
“그 전에 종이를 만든 상인한테 세금이 제대로 납부됐는지부터 봐야죠.”
그는 한참 웃었다. 나도 조금 웃었다. 웃음이 끝나자 비로소 숨이 돌아왔다.
그날 오후 다렌이 도착했다. 왕궁 물자실의 폐기 목록을 대조하던 중, 반환 대기 물품에 붙였던 봉인끈의 일련번호가 왕실 인장실 반출 장부와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봉인끈 자체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발주 문서의 사본 한 장이 발견됐다.
사본에는 ‘제12석 대리 확인인의 직접 출석’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마이렌을 끌어내려 했던 문구와 닮았다. 그 아래엔 낯선 서명 대신 직책이 적혀 있었다.
‘공동 증언 보존관 대리.’
나는 세르나를 불렀다. 마계 공동협약에는 이런 직책이 있는가. 그는 오랜 문서를 찾아본 뒤 답했다. “보존관은 있습니다. 대리의 권한은 사건마다 위임장을 요구합니다. 자동 승계되는 지위는 아니에요.”
“최근에 누가 위임장을 냈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마계와 왕실 양측 대장을 비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왕실 쪽에 대장 보전 요청을 보냈다. 마계에도 같은 요청을 공식 전달했다. 양쪽이 서로를 의심하는 틈을 노려 단 한 장의 가짜 서식으로 권한을 행사한 사람이 있다면, 원본을 나란히 놓는 순간 드러날 수 있었다.
해가 지기 직전 마계에서 회신이 왔다. 기다리던 위임장 자체는 아직 제출되지 않았다. 대신 세르나가 매우 오래된 보관 관례를 한 줄로 설명한 사본을 전달했다.
‘제12석 확인자는 증인이 아니라, 증인이 남긴 말을 원형대로 되돌려 줄 사람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이렌이 세 번째 받침 아래 고무를 기억한다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목격자이면서, 누군가를 대신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말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밤늦게 새 공문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발신자와 권한을 확인한 정식 자료 제출 요청이었다. 대상은 마이렌이 아니었다. 서류의 수신인은 ‘왕실 징수관 강태준’. 제출 대상은 ‘한국에서 가져온 개인 수첩의 최초 작성 시점에 대한 본인 진술’이었다.
나는 수첩을 내려다봤다. 이 세계에 처음 온 날부터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적었던 단어들. 어떤 것은 내 손글씨였고 어떤 것은 내가 옮겨 적은 남의 말이었다. 그걸 법원이 묻는 이유는 아직 설명돼 있지 않았다.
루카스가 물었다. “이제 징수관님이 증인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수첩을 바로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개인 기억과 공적 증거가 섞여 있으니까.”
나는 절차 안내문을 끝까지 읽었다. 제출 범위를 다툴 권리와 비공개 열람을 신청할 권리가 있었다. 적어도 이번 종이는 발신인이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 조그맣게 덧붙여진 첨부 목록이 나왔다.
‘검증 대상: 영번 기록봉의 최근 전사본 원본 제작 시간.’
내 수첩은 삼 년 전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내 수첩의 문구를 가져와 오래된 원통에 옮겼다는 뜻일까. 혹은 다른 문서를 내가 먼저 베껴 적었는데, 어느 순간 기억이 서로 뒤섞였다는 뜻일까.
새 공문을 읽은 뒤 서랍 안에서 한국 수첩을 꺼내자 종이 냄새가 먼저 났다. 한때 그 냄새가 익숙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억하는지 묻는 순간엔 오히려 멀어졌다. 나는 수첩의 표지 안쪽에 적힌 날짜를 보았다. 이 세계의 날짜로 옮긴 뒤 적은 숫자였다. 내 손글씨가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숫자를 언제 처음 썼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에리카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수첩을 보지 않고 있었다. 내가 개인적인 기억을 펼쳐 놓기 전에 시선을 돌려 준 것이다. 나는 그가 눈을 돌린 시간이 오히려 고마웠다.
“법원에는 어디까지 제출할 생각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문구가 만들어진 시점과 보관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부터요. 가족 이름이나 집 주소처럼 사건과 무관한 내용은 일단 비공개 심사를 신청할 겁니다.”
“그 수첩에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적혀 있습니까?”
“적혀 있으면 저도 좋겠네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나도 웃지 않았다. 우리는 내 마음속 가장 큰 질문을 그동안 부정확한 영수증 사이에 숨겨 두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돌아갈 방법을 알려 주겠다며 타인의 기억이나 권리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 방법은 믿을 수 없었다.
에리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떠나야 한다면, 여기서 하던 일을 누가 이어받죠?”
“지금부터 기록을 남기는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예요.”
“그럼 진실의 장부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기록을 읽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내 능력만 있으면 왕국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금화도, 마왕의 세금도, 왕실 채무의 상계도 법과 사람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가 언젠가 사라져도 재무청이 세입과 보관금을 구분할 수 있다면 그게 더 큰 성공일지 몰랐다.
그날 티르센은 수첩을 바로 맡기지 말고 기록물의 인수 상태부터 조사하자고 했다. 종이의 재질과 잉크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관함을 준비할 수 있고,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사적 부분을 가린 복제본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원본을 내면 잉크를 분석할 수는 있겠죠?”
“가능합니다. 하지만 종이를 어떤 순서로 사용했는지는 단번에 나오지 않습니다. 눌러 쓴 글씨가 다음 장에 남을 수 있고, 날짜가 다르게 적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먼저 원본을 사진으로 기록해 두죠.”
그는 법정의 별도 허가 아래 출처와 촬영 조건을 남기자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다만 사진이 증거의 전부인 것처럼 쓰이지 않도록 실물을 보관할 수 있는 절차도 마련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에서 쓰던 세법 책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대신 뜻은 남아 있었다. 세금을 매기려면 거래와 납세 의무의 근거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 그때 나는 법이 무겁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무게 덕분에 누군가를 함부로 밀어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나는 수첩을 다시 닫고 봉투 앞에 새 메모를 붙였다. ‘원본 보관은 본인 동의와 법원 결정의 범위에서만. 진술이 필요한 부분만 분리하여 제출.’ 그 메모 하나로 소환의 비밀이 풀리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나 자신을 조사하는 순간에도 내가 다른 이에게 요구했던 절차를 지킬 수는 있었다.
수첩의 맨 앞장에는 단순한 숫자가 있었다. 열일곱. 나는 그게 국고에 남은 금화 수였음을 기억했다. 그 옆에는 조그마한 사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한국에서 쓰던 거래 영수증의 모양 같기도 했다. 내가 이 세계에서 그렸는지, 고향에서 쓰던 습관이 손에 남아 저절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법을 쓰면 정답이 튀어나올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정답이 나오더라도 그것을 독립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모르는 것을 명확히 적는 편이 낫다. 나는 사각형 아래 ‘작성 시점 미상’이라고 썼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배워야 할 첫 번째 문장이었다.
나는 진실의 장부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 도구를 열면 문답이 쉬워질지 몰랐다. 대신 종이를 덮고 새로운 수첩 첫 줄을 적었다.
‘기억을 증거로 쓰려면, 기억이 적힌 시간부터 확인할 것.’
내일 처음으로 내가 가진 기록도 조사를 받는다.
제9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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