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이 법정에 들어오자 모두가 일어났다. 브란트 법관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은 왕실 회계 법정의 자료 보전 심리입니다.” 그가 말했다. “증인으로 출석한 국왕께서도 같은 절차를 따릅니다.”
왕은 잠시 당황하더니 웃었다. “알겠다. 오늘 내가 왕이라는 이유로 먼저 말하게 해 주지는 말라는 뜻이군.”
“순서는 신청 순서에 따릅니다.”
나는 왠지 그 대화가 마음에 들었다. 왕이 법을 배우고 있는 게 아니라 법이 왕을 맞이하는 법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로웬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차관과 정면으로 부딪히면 국왕의 예산안이 멈출 수도 있소.”
“그래서 자료 보전 신청은 법정에 맡기는 겁니다. 우리가 상대를 유죄로 만들 권한은 없으니까요.”
“정말 자네는 답답한 사람이오.”
“예산이 멈추는 걸 걱정하시면 군무청과 합법적인 수납·지출부터 다시 확인합시다.”
그는 지갑에서 낡은 동전을 꺼내 굴렸다. 국왕이 집무를 시작하던 날 기념으로 받은 동전이라고 했다. 한쪽엔 왕실 문양, 한쪽엔 왕국 세입을 표시하는 작은 나무 그림이 있었다.
“자네가 와서 국고에 금화 열일곱 닢 남았다고 외칠 땐, 정말 나라가 문을 닫는 줄 알았지.”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무섭소. 다만 예전엔 돈이 없어서 무섭고 지금은 돈이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무섭군.”
나는 그를 바라봤다. 재무대신이 두려움을 솔직히 인정한 건 처음이었다. 보고서에 적기 어려운 말이지만 그 말이 가장 정확한 재정 진단일지도 몰랐다.
재무청은 왕실 인장 복제판과 검은 깃털 판, 북쪽 초소의 현물 지급 원장, 마이렌 명의 출석 요구서의 원본 보전을 요청했다. 군무청은 일부 기록에 방위시설의 구조가 포함됐다며 공개 범위를 다투었다. 양측의 주장이 전부 거짓이거나 전부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법관은 공개 심리와 비공개 감정 열람을 분리했다.
레온하르트 차관은 변호인과 함께 나왔다. 그는 나를 노려봤다. 나는 사건의 지휘자처럼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지 않았다. 자료 요청을 시작한 것은 재무청이지만 실제 책임을 판단하는 것은 법정이었다.
“물자실 반출 기록에 차관실 부호가 있습니다.” 내가 질문했다. “당일 담당자의 배치 대장을 제출할 수 있습니까?”
“제출 가능한 부분은 제출했소. 나머지는 기밀이오.”
“실제 기밀 부분은 비공개 심사에 맡길 수 있습니다. 다만 인장 유리판의 관리 책임자를 특정할 정보까지 전부 숨길 이유는 설명해야 합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법관은 그에게 기밀 주장 범위를 구체화한 목록을 내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것을 승리로 적지 않았다. 기록 한 묶음이 더 보호될 가능성이 생긴 것뿐이었다.
에리카는 자신의 이름이 열하루 전 물자실 반출 대장에 기재된 사실을 증언했다. 본인은 반출을 승인하거나 서명한 적이 없다고 했다. 티르센은 그 서명이 아직 원본 감정 중이라고 밝혔다. 법관은 명의자의 부인 진술을 남기면서, 상대방에게 그 명의를 진실이라고 전제로 새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임시 제한을 걸었다.
“제가 정말 해명해야 하는 사람이었나요?” 에리카가 휴정 뒤 물었다.
“당신이 해명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죠. 하지만 오늘 말한 사실은 기록이 됐어요.”
“아버지도 이렇게 법정에 섰을까요?”
“그랬을지 몰라요. 다만 당신이 그분과 같은 길을 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먹지 못한 점심을 내밀었다. 차갑게 식은 빵 두 조각이었다.
오후에는 마이렌의 증언 녹취 중 공개 가능한 부분만 읽혔다. ‘제삼의 종이받침 아래에 고무를 깔았다는 기억’, ‘화재 직후 다른 견습이 자리를 대신했다는 전언’, ‘직접 보지 않은 얼굴은 특정할 수 없음’. 그 문장들이 마치 작은 돌처럼 하나씩 법정 바닥에 놓였다.
“증인 진술이 부정확하지 않습니까?” 군무청 측 변호인이 물었다.
“불확실한 부분을 불확실하다고 구분하는 것이 부정확함의 증거는 아닙니다.” 법관이 답했다.
방청석에서 오딜이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나는 마이렌이 스스로 멈출 권리를 지키면서도 오늘의 질문에 도움을 준 사실을 떠올렸다. 신뢰는 모든 질문에 대답하는 데서 생기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 증거는 수레 통행표였다. 세모난 쇠살의 바퀴가 목격된 수레 한 대를 찾았지만, 그 수레는 운송 조합의 공동 소유였다. 여러 사람이 빌려 쓸 수 있었고, 같은 바퀴가 초소와 시장에서 목격된 날짜 사이에 수리됐을 가능성도 있었다. 누가 어떤 화물을 운반했는지는 조합의 배차 원장이 있어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원장을 확보했습니까?” 법관이 물었다.
“조합이 자발적 제출을 검토 중입니다.” 내가 말했다.
“검토와 제출은 다릅니다.”
“맞습니다.”
법관은 압수 또는 제한 열람 필요성을 별도 심리하겠다고 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자꾸 성급한 결론 앞에 작은 문을 닫고 있었다.
추가 감정 심리에서 법관은 자료마다 누가 관리 책임을 지는지 먼저 물었다. 왕실 인장 판은 왕궁 인장실, 검은 깃털 판은 공동 보관인단의 서명 확인을 받은 중립 감정실, 북쪽 초소 현물 지급 원장은 군무청과 법원 기록실이 각기 사본을 보관하도록 했다. 서로 다른 장소에 있어도 일련번호와 봉인 시각을 함께 남기면 교체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다.
“이렇게 나눠 놓으면 누가 훔쳐 갈까요?” 루카스가 속삭였다.
“쉽게 훔쳐 가지 못하게 나누는 겁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낫죠.”
나는 문득 드래곤 카르디온이 소유한 것처럼 보였던 거대한 금고를 떠올렸다. 그곳 금화의 일부는 드워프 후손을 위한 신탁이었다. 한 장소에 있다고 한 사람의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왕국은 얼마나 여러 번 배워야 할까.
군무청 변호인은 왕실 인장과 검은 깃털 판을 함께 감정하는 것이 국가 안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무조건 배척할 말이 아니었다. 문양의 복제 방식을 그대로 공개하면 실제 위조를 돕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법관은 기술 감정 보고서의 세부 제작법을 공개본에서 제외하고, 사용 여부와 보관경로 등 판단에 필요한 부분만 공개하기로 했다.
“숨기는 게 아니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보호해야 할 정보를 구분하는 겁니다. 비밀이 있다고 모두 은폐는 아니죠.”
오후 심리에서 레온하르트는 북쪽 초소의 현물 지급 지시를 자신은 승인한 적 없다고 답했다. 변호인은 관련 업무를 보조 담당이 처리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제출했다. 우리는 그 규정이 있는지 확인했고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보조 담당의 배치 원장은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관의 명령이 없었어도 부서가 합법적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군요.” 내가 말했다.
“그렇소.” 레온하르트가 즉시 답했다.
“반대로 규정 범위를 벗어난 처리가 있었을 가능성도 남습니다. 어느 쪽이든 담당자의 실제 승인 절차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내가 그를 몰아붙이기 위해 말을 꾸몄다면 아마 더 통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통쾌함은 하루짜리였다. 재판 기록은 몇 년이고 남는다.
재판이 끝나갈 때 마든 로스의 제출 자료도 도착했다. 열하루 전 수레 운송 계약서에는 완료 증명 후 잔금을 지급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완료 증명의 조건이 물품 인도 확인이 아니라 ‘제12석 대리 출석의 성립’이었다. 법관은 해당 계약 조항의 효력을 별도 검토 대상으로 기록했다.
“운송비가 왜 사람의 출석에 달렸을까요?” 내가 물었다.
마든은 방청석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일을 끝내려면 도장을 받아야 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를 믿을지 말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손에 쥔 영수증의 빈칸이 누군가를 초소로 부르는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출석 요구서의 발신자를 찾지 못했어도, 누군가가 출석을 금전적 이익과 연결해 놓았다는 계약 구조가 눈앞에 있었다.
휴정 중 국왕은 법정 뒤편에서 내게 말했다. “혹시 내 이름으로도 저런 가짜 승인이 만들어졌다면 어찌 해야 하느냐?”
“부인하셔야죠. 그리고 누가 그 문서를 근거로 무엇을 요구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왕인데도?”
“왕이니까 더 먼저 해야 합니다. 폐하의 인장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자기가 가진 작은 인장함의 열쇠를 감사원 확인 절차에 내겠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열쇠를 받지 않았다. 왕의 선의도 정해진 관리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브란트는 결정을 내리기 직전 모든 봉인 담당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료를 열람하려면 누가 무엇을 기록해야 합니까?” 각 기관의 대표가 자기 절차를 설명했다. 왕실은 왕실대로, 마계는 마계대로, 시민 보관인단은 시민의 권리대로. 하나의 물건에 여러 책임자가 있다는 사실은 일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몰래 원본을 바꾸려 할 때 다른 사람이 알아챌 가능성도 높였다. 왕은 그 설명을 듣고 혼잣말을 했다. “금고 열쇠가 하나면 편하지만 왕 한 사람만 믿어야 하는군.” 나는 그 말을 수첩 한쪽에 적었다. 드디어 왕이 금고를 자기가 갖는 것과 지키는 것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결정문이 작성되는 동안 나는 법원 벽시계를 바라봤다. 사건에 얽힌 사람들은 각자 시간을 다르게 셌다. 마이렌은 삼 년, 에리카는 부친이 남긴 공백만큼, 상인들은 오늘 장사가 멈춘 시간만큼. 나는 조사 보고서의 날짜를 세었지만 그 날짜 안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서류 한 장으로 알 수 없었다. 브란트가 마지막 당부를 했다. “자료 보전은 정답을 찾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정답을 왜곡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죠.” 나는 그 문장을 적었다. 앞으로 누가 이 자료를 읽든 수사의 출발점과 판단의 끝을 혼동하지 않도록, 결정문의 첫머리에 절차의 한계를 명확히 적어 달라고 요청했다.
저녁에 나온 결정은 예상보다 짧았다. 자료의 현재 상태를 보전한다. 인장 복제판에 기재된 명의자의 실제 동의가 확인되기 전까지 새로운 권리 이전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출석 요구서만을 근거로 마이렌을 공개 소환하거나 위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책임자 확정과 형사 판단은 후속 조사로 남긴다.
왕은 결정문을 소리 내어 읽었다. “우리 왕실의 인장을 우리 왕실이 잠깐 쓰지 못하는 꼴이군.”
“위조 의혹이 있는 복제판만 그렇습니다. 적법하게 관리되는 원래의 인장은 정상 공무에 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네. 내일 세금 고지서에도 도장은 찍어야 하니까.”
“세금 고지서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발급된다면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농담을 할 때도 징수관이군.”
법정 밖에서 다렌이 날 기다렸다. 그는 처음 보는 군무청 내부 반출 번호표를 보여 줬다. 법원 결정이 나온 뒤 부서에서 보존 목록을 작성하다 발견했다는 것이다. 반출 예정일은 열하루 전. 목적지는 북쪽 초소. 수령인은 비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붉은 글씨 한 줄이 있었다.
‘증인 출석 확인 후 반환.’
나는 서류를 빤히 봤다. 누군가가 먼저 출석을 확인해야만 물건이 돌아오는 구조였다. 반대로 말하면 물건을 돌려주지 않기 위해 계속 누군가의 출석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자리에 마이렌의 옛 직책을 끼워 넣은 자가 있었다.
다렌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명령을 내린 사람을 찾을 수 있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명령이 어떤 물건을 움직였는지부터 찾을 수는 있겠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백 하나보다 반출되고 반환되지 않은 상자 한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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