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인장은 죽을 수 없다. 다만 ‘폐기’될 수 있을 뿐이다.
로웬은 내 설명을 듣자 고개를 기울였다. “도장이 죽는다고 하니까 소름이 끼치는군.”
“폐기 번호가 다시 살아나서 공문을 찍으니 더 소름 끼치죠.”
우리는 왕실 인장실의 오래된 번호부를 펼쳐 놓았다. 폐기된 왕실 인장 번호 하나가 최근 승인 표기에 사용된 정황은 이미 확인됐다. 그런데 북쪽 초소의 현물 지급 목록에서는 그 번호와 한 글자만 다른 표식이 발견됐다. 티르센은 두 표식을 나란히 놓고 종이를 겹쳤다. 작은 금색 무늬 하나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위조라고 확정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아직은 복제 도구로 만든 인영이 원판과 부분적으로 다르다는 것까지입니다. 누가 눌렀고 어떤 문서를 실제로 승인했는지는 별도입니다.”
물자실을 감정하기 전, 티르센은 작은 연습판을 준비했다. 금속판 두 개에 똑같은 모양을 새기고 하나를 나무판에, 다른 하나를 유리틀에 고정했다. 그리고 잉크를 찍었다. 두 인영은 멀리서 보면 완벽히 같았다. 가까이 보니 곡선 하나가 조금 달랐다.
“똑같은 문양이라고 같은 도구는 아니군요.” 내가 말했다.
“반대로 다른 문양이라고 다른 도구인 것도 아닙니다. 잉크가 흘렀거나 종이가 젖었을 수도 있죠.”
그는 종이 열 장에 같은 인장을 찍어 변화를 보여 주었다. 다섯 번째는 오른쪽 끝이 번졌고 여덟 번째는 아래 글자가 찌그러졌다. 그 차이를 보자 나는 지난번 왕실 인장 유리판과 검은 깃털 유리판에서 찾은 흠집 하나를 너무 큰 발견처럼 생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그럼 동일한 거치대라는 결론도 미정이겠군요.”
“예. 다만 두 판이 같은 규격의 나사 구멍을 갖는다는 사실은 확인됐어요. 동일 제작 계열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죠.”
로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같은 장인이 만들었어도 물건의 주인은 다를 수 있소.”
“오늘은 제 직업을 잊게 만드는 날이군요.” 내가 중얼거렸다.
“자네 직업은 원래 그런 걸 묻는 직업 아니었소?”
맞는 말이었다. 세금 조사에서 동일한 물품이 두 회사의 창고에 나타났다고 두 회사가 하나인 것은 아니다. 소유권과 보관, 거래가 서로 다른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마법과 인장이 등장하자 나는 자꾸 이야기처럼 결론을 빠르게 만들고 싶어졌다.
왕실 인장실에는 ‘폐기’라는 말의 뜻을 두고도 다툼이 있었다. 어떤 인장은 실제로 부쉈고, 어떤 인장은 무효화를 선언한 뒤 교육용으로 보관했다. 목록에는 무효화 선언 날짜만 적혀 있었다. 만약 실제 판을 부수지 않았다면 누군가 그것을 꺼내 복제판의 바탕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다.
“무효 인장이 왜 아직 남아 있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네라의 대리인이 대신 답했다. “교육할 때 모양을 알아야 위조를 막을 수 있으니까요.”
“그게 오히려 위조에 쓰인다면요?”
“그래서 열람자 기록을 따로 남기도록 돼 있었습니다. 그 기록이 비어 있다는 게 지금 문제죠.”
나는 그 문장을 적었다. 좋은 제도를 악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제도를 전부 없앨 순 없다. 대신 감시해야 할 문을 잠그지 못한 사람과 잠금장치를 부순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
물자실의 직원 몇 명은 우리 조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 사람은 우리가 군무청과 왕궁 사이의 권한 다툼에 작은 직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항의했다. 나는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했다. 큰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작은 사람에게 서명을 맡기고 나중에 책임을 떠넘기기 쉽다.
“누구든 자신의 일을 설명할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서류를 보관한 것과 그 서류를 위조한 것은 다릅니다.”
한 직원이 손을 들었다. 열하루 전 인장 유리판 두 개를 포장하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정확한 내용물을 보지 못했으며 ‘깨지기 쉬운 유리’라는 표시만 보고 두꺼운 천을 둘렀다고 했다. 우리가 찾던 두 상자 가운데 하나가 그런 포장이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누가 주문했습니까?”
“작업 배분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개인 서명은 없었어요.”
“배분판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까?”
“아뇨. 매일 닦아 내니까요.”
루카스가 아쉬운 얼굴을 하자 그 직원은 당황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일하지 않은 증거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배분판의 글씨가 없어졌다고 해서 직원이 범인이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 대신 포장용 천의 수불장을 확인했다. 해당 날에는 보통보다 두 배 많은 천이 출고됐지만, 다른 왕실 행사 준비가 겹쳐 있었다. 나는 숫자 자체를 수상하다고 단정하지 않고, 어떤 주문에 얼마가 실제로 배분됐는지 나중에 대조하기로 했다.
퇴근길 에리카가 나와 나란히 걸었다. “내 이름으로 서명한 사람이 누구든,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손을 갖지는 않았겠죠.”
“필체나 인장을 흉내 낼 수는 있어요. 그래도 동의를 흉내 내는 건 다른 일입니다.”
“그 말이 오늘은 위로가 되네요.”
그녀는 손을 펴 보였다. 손바닥에는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부친의 화재 뒤 문서 상자를 꺼내다 데었다고 했다. 나는 그 자국을 증거로 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수사를 부탁한 게 아니라, 그날 자기 손으로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복제할 수 있는 것은 인장의 모양이다. 누군가 그 모양 뒤에 숨겨 놓은 책임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네라의 대리인은 그녀가 보호기관을 통해 보내온 작은 감사 편지를 전했다. 거기에는 동생 치료에 쓰인 돈을 증명하는 영수증을 왜 공개하지 않는지 설명이 있었다. 누군가 그 비용으로 네라를 협박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영수증에는 동생의 이름과 병증이 적혀 있었다. 본인이 사건과 무관한 치료 정보를 노출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동의했다. 범행을 밝히는 데 필요하다면 법원의 비공개 심사를 받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시장 전체가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루카스는 종이를 덮고 말했다. “사람의 약점까지 공문에 담으면 안 되는군요.” 나는 그가 이번에는 질문보다 답을 먼저 찾았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왕실 보관실 관리인 네라는 보호기관을 통해 진술서를 보냈다. 인장실의 비상 열쇠가 삼 년 전 화재 뒤 한 번 교체됐고, 열하루 전에는 자신 이름으로 문서를 반출한 기록이 생겼다는 내용이었다. 네라는 해당 문서를 반출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럼 네라가 피해자인 겁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진술이 맞는다면 명의를 도용당했을 수 있죠. 하지만 신뢰도는 독립 기록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네라의 진술에는 뜻밖의 물건이 나왔다. 사용이 끝난 인장 유리판은 보관실에서 폐기 처리하는 게 원칙인데, 왕궁 물자실에서 ‘보관 대조용’이라는 명목으로 회수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일의 책임자 서명란에는 레온하르트 차관실의 기관 부호가 있었다. 실제 차관의 지시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군무차관 레온하르트에게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그가 화를 낼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화가 아니라 답변이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사람 대신 공문을 보냈다. ‘기관 부호는 공무에 널리 쓰이며 모든 수령이 차관 승인에 해당하지 않는다. 세관 조사로 군무청을 모욕하지 말라.’
나는 답장을 썼다. ‘기관 부호가 광범위하게 쓰인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따라서 실제 사용자 기록을 제출해 주십시오.’
왕궁 회랑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그는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하기를 바랐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징수관이 군대의 도장까지 조사하는 법이 어디 있소?” 그가 물었다.
“군무청 지출 명목으로 수납과 인수 기록이 만들어졌습니다. 공금과 연결된 부분은 확인해야 합니다. 군사 기밀의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히 왕실 권위를 의심해?”
“인장을 의심하는 게 권위를 지키는 방법일 때도 있습니다.”
그는 웃지 않았다. 경호원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일부러 음량을 낮췄다. 언성을 높여 얻을 수 있는 건 구경꾼뿐이다.
오후에 물자실 보관 담당자가 입회 아래 대장을 펼쳤다. 최근 열하루 전 같은 시간대에 유리판 반출 기록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왕실 인장 무늬, 하나는 검은 깃털 모양을 시험하는 판이었다. 이미 발견된 복제 유리판 두 개와 규격은 비슷했다. 하지만 반출 대장상의 판이 바로 그 두 물건인지 확인하려면 긁힘과 무게를 비교해야 했다.
“보낸 곳은?”
“북문 외부 임시 수리소입니다.”
“거기에는 누가 있었죠?”
“물자 인수인으로 ‘장갑’ 표식이 찍혀 있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사람 이름이 없는 표식이 사람 이름보다 멀리 돌아다녔다. 세르나는 이 표식이 원래 작업 책임을 나타내는 기호라는 점을 다시 설명했다. 이제 필요한 건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의 근무 배치 기록이었다.
루카스가 장부를 넘기다 한 줄을 멈췄다. ‘임시 관리 업무 인수: 에리카 벨란.’
에리카는 오늘 종일 감정실에 있었다. 삼 년 전 기록이 아니라 열하루 전 기록이었다. 나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표기 옆에는 에리카가 부인한 서명과 같은 모양이 있었다.
“두 번째로 명의가 등장하는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요. 명의를 두 번 도용하면 그 사람이 두 번 죄인이 되는 식으로 계산할 순 없잖아요.”
티르센은 원본 대장의 실을 봉인했다. 종이를 빼냈다가 끼운 흔적이 있었고, 다른 페이지보다 구멍이 두 개 더 나 있었다. 조작이 있었을 수 있지만 일부 수리를 위한 교체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제본 시점부터 감정하기로 했다.
물자실의 벽에는 오래된 업무 지침이 남아 있었다. ‘미사용 인장은 재고가 아니라 권한으로 관리한다.’ 나는 그 문장에 한참 눈길이 머물렀다. 장부에 물건의 가격만 적으면 그 물건을 쓰는 사람이 가지는 힘을 놓칠 수 있다. 낡은 인장판 한 장은 시장에서 별값이 없어도, 그것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왕의 명령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인장 복제 도구가 부속품으로 신고됐다고 해도 관리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기록했다. 직원들은 자신이 맡은 일이 포장이었는지, 열람 허가였는지, 반출 승인인지 구별해서 진술할 수 있어야 했다. 누군가의 부주의를 캐는 것보다 위조를 가능하게 한 권한의 틈을 찾는 게 중요했다.
밤이 되어 에리카에게 이 기록을 전했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그날 어디 있었는지 증명해야겠네요.”
“억울한 사람이 매번 자기가 결백하다는 걸 모두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 문서를 근거로 권리를 주장하는 쪽이 진위를 밝혀야 하죠.”
“그래도 하고 싶어요. 저보다 약한 사람에게 같은 일이 생기지 않게.”
우리는 그날 그녀가 참석했던 시청 감정인의 합동 회의록을 보전 요청했다. 회의에 있었던 것이 다른 곳에 잠시 갔을 가능성을 전부 부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허위 서명의 시간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티르센이 가져온 인장 감정 초안을 펼쳤다. 두 복제판에서 같은 흠집이 확인됐다. 흠집은 금속에 찍힌 문양이 아니라 판을 고정하던 나사 자리였다. 원판 두 개가 같은 거치대에서 교대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에 그런 거치대가 있죠?” 내가 물었다.
“왕궁 물자실만은 아닙니다. 군무청 제이 인쇄실, 그리고 북문 수리소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내 수첩의 질문이 달라졌다. 누가 어느 도장을 가지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같은 기계로 왕실의 권한과 검은 깃털의 권한을 한꺼번에 복제하려 했는가. 답은 아직 없었지만 질문은 처음보다 훨씬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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