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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77화
PAYLUA ORIGINAL · 제77화

77화. 마왕의 사본에는 사람이 없다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740자

오프라인 책장
세르나가 국경에서 가져온 상자는 봉인도 뜯지 않은 채 법원 감정실로 옮겨졌다. 열어 보기 전부터 로웬은 잔뜩 긴장했다. “마왕이 우리한테 뭘 보내는 건가?” “돈이 아니라 문서입니다.” 내가 답했다. “돈이었으면 좋겠군.” “그 생각부터 버리셔야 합니다. 남의 돈을 보면 마음속 국고가 먼저 커지니까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몇 달 전의 그였다면 마계에서 온 상자를 일단 압수하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마계에서 가져온 자료가 어떤 권한과 절차로 왕국 법정에 제출되는지 확인하는 편이 더 중요했다. 세르나는 상자의 내용물을 공개하지 않은 채 출처를 설명했다. 삼백 년 전 왕국과 마계가 맺은 공동 협약에는 반송물품 대조 목록이 붙어 있었다. 물건이 국경을 잘못 넘어가면 누구에게 맡겼고 누가 보관 중인지 적는 목록이었다. 마계는 그 원본을 두 차례 복사했고, 이번에 가져온 것은 백 년 전 감정된 사본 중 하나였다. “고대 협약의 최신 법적 효력은 별도 심사해야 합니다.” 세르나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최근 왕국 인쇄물과 비교할 문장으로는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게 필요했습니다.” 상자를 열자 짙은 푸른 잉크로 적힌 표가 나왔다. 품목 번호, 인계 장소, 보관 형태, 소유권 유보 사유가 네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목록의 처음에는 물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번, 신원 대조 전 미분류 기록봉.’ 루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제0호!” “일단 영번이라는 표기가 같다는 것까지만.” 세르나가 웃었다. “징수관의 견습생도 조심스러워졌군요.” 우리는 문서의 낡은 단어를 세 번 번역했다. 왕국 고어, 마계 협정어, 현재 재무청에서 쓰는 말. 가장 큰 차이는 주어였다. 최근 인쇄된 왕국 안내에는 ‘장부 밖에서 온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마계 사본에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미분류 기록봉’은 장치 또는 문서 꾸러미를 가리키는 품목이었다. “그럼 강태준의 입국 기록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브란트가 물었다. “이 사본만으로는 그렇게 단정할 수 없어요. 영번 기록봉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모르니까요.” 나는 세르나와 번역가에게 원본 어휘의 가능성을 기록해 달라고 했다. 잘못 번역된 낱말이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가짜 권리를 만드는 데 쓰였다면, 단어 하나가 누군가의 삶을 위협하는 칼이 될 수 있었다. 원본을 번역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마계의 기록관은 자신들의 인건비를 마계 예산으로 부담하겠다고 했고, 왕국 측은 왕실 감사원의 감정 예산에서 필요한 비용을 심의하기로 했다. 로웬이 처음에는 ‘마왕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돈이 들면 안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가 세르나의 서늘한 시선을 받았다. “왕국의 명령으로 한 일을 마계 공무원의 호의로 처리하라는 뜻입니까?” 세르나가 물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소.” 로웬이 급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기록관의 동의와 근무 시간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나는 세르나의 편을 들었다. 어느 나라의 인력이든 공짜라고 가정하면 보이지 않는 비용은 결국 가장 힘없는 직원에게 돌아간다. 왕국은 자기 몫의 번역 비용을 정식으로 산정하기로 했다. 마계에서 제공한 오래된 사본은 공동 감정을 위한 자료일 뿐, 상대의 세금 미납을 청산하는 수단도 아니었다. 번역 과정에서는 웃기면서도 위험한 문제가 있었다. 왕국 고어의 ‘보류’는 문맥에 따라 맡긴 물건을 계속 보관한다는 뜻이었지만, 최근 인쇄물에서는 소유권 이전 전 마지막 대기 단계로 쓰였다. 번역가 둘은 같은 단어를 두고 한참 다퉜다. 세르나는 직접 단어 하나를 지웠다. “의견이 다른데 하나만 골라 적으면 후대가 그 문구를 절대적인 정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럼 어떻게 쓰죠?” 루카스가 물었다. “두 해석을 함께 적고, 원문이 바뀌지 않도록 남겨야죠.” 그 말에 나는 문서 한 장이 무기처럼 쓰이던 지난 몇 달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보다 짧은 확언을 좋아했다. 누군가 ‘대체 승인 가능’이라고 크게 인쇄하면, 그보다 작고 정확한 ‘본인 동의 확인 필요’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우리는 번역본에 비교표를 붙였다. 왕국의 해석과 마계의 해석, 그 차이가 실제 소유권 판단에 미치는 영향, 아직 판단할 수 없는 부분까지. 한 장을 더 쓰는 일이 귀찮았지만, 적어도 다음에 누군가 이 표를 인용할 때 무엇을 생략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오후에는 카르디온의 드워프 사절 로흐가 감정실에 도착했다. 그는 오래된 금속 인장과 종이를 차례로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협약 사본에 붙은 작은 금속 고리는 드워프 장인이 쓰던 표준 규격이었다. 그런데 왕국이 최근 보관 중이라고 주장한 제0호 문서 목록에는 같은 고리를 ‘봉인 해제 대가’라고 적어 금화 한 닢을 청구했다. “금속 고리 하나가 금화 한 닢입니까?” 로흐가 소리쳤다. “이건 고리 열 개를 만들어도 은화 하나가 안 드는 물건인데!” 그의 목소리에 로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우리가 많이 속은 거군!” “속았는지 확인하려면 실제 지급과 수령을 봐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아직은 청구서뿐입니다.” 로흐는 내 말을 듣더니 웃으며 주머니에서 작은 철제 도장을 꺼냈다. “자네도 아주 지독한 상인이야. 우리보다 까다로워.” “저는 상인이 아니라 세금 징수관입니다.” “그래서 더 무섭군.”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러나 번역 감정실에서 나온 다음 문장은 모두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원래 협약의 영번 기록봉에는 ‘보관 기간 중 소유권 미결정’이라는 명시가 있었다. 지금 왕실 인장 보관실에서 나오는 새 판본에는 그 부분이 ‘검증자 미승인 시 권리 귀속 변경’이라고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반대되는 뜻으로 고쳤습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그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누가 고쳤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우리는 적어도 독립된 두 사본의 문장 차이를 확보했다. 법원은 그 차이를 근거로 제0호 관련 강제 징수를 계속 중지했다. 원본 협약의 최종 해석은 재판부와 양측 전문 감정인이 함께 다뤄야 했다. 카르디온에게서도 답신이 도착했다. 거대한 드래곤은 세르나가 인장 감정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동굴의 고대 물품 장부를 일부 공개하겠다고 했다. 단, 드워프 후손을 위해 맡아 둔 신탁 재산의 소유자 정보를 임의로 노출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나는 즉시 수락하되,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된 표식만 확인하겠다고 서신을 보냈다. “드래곤은 동굴에 금을 얼마나 쌓아 뒀습니까?” 로웬이 물었다. “그 질문은 이번 감정과 관계없습니다.” “조금 궁금해서.” “그건 저도 궁금합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과 조사할 권한이 있는 것은 달라요.” 카르디온의 사절은 다음 날 드워프 표준 장부에서 영번 보관표식이 어떤 공정으로 제작됐는지 알려 줬다. 금속 고리 안쪽의 두 홈은 장인이 한 번에 새기는 게 아니라, 보관자와 증인 대표가 각자 하나씩 확인했다는 표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보관 사실’, 다른 하나는 ‘원소유권 미확정’을 뜻한다. “그러면 누가 두 번째 홈을 새겼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고리마다 다릅니다. 장부가 남아 있으면 대조할 수 있겠지만, 삼백 년이나 된 자료는 일부 훼손됐어요.” 로흐가 대답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고리를 달고 있던 기록봉이 누군가의 몸이나 기억을 보관했다는 관습은 있었습니까?” 로흐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사람을 고리로 보관해? 차라리 드래곤에게 항아리로 들어가 달라고 하지 그래?” 세르나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그 말이 반가웠다. 고대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드워프의 일반적인 보관 관습은 사람의 소유권을 담보로 다루지 않았다. 이런 일상적인 사실 하나가 악의적인 문구를 반박하는 데 도움이 됐다. 저녁에는 세르나와 함께 북문 장터를 걸었다. 벨키의 약초방에는 왕국 사람과 마계 사람이 뒤섞여 서 있었다. 한 상인이 물었다. “마왕이 정말 돈을 냈소?” “지난달 등록 약초방 거래세는 정식으로 납부했습니다.” 세르나가 답했다. “마왕도 세금 내면 우리도 낼 만하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었다. 사소한 영수증 한 장이 전쟁 소문보다 멀리 갈 때도 있다. 다만 마왕이 이번에 가져온 서류는 세금 영수증보다 더 복잡한 힘을 갖고 있었다. ‘사람을 물건으로 기재하지 않았다’는 고대 사본이 있다. 그 사본이 바로 내 이름과 연결된 최근 판본의 허위 권한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르나의 수행원이 도착하자 작은 외교 문제가 생겼다. 왕궁 창고가 마계 문서 상자에 붙은 봉인을 왕실 보안 규정에 따라 새로 찍으려 한 것이다. 그러면 원래 봉인의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워질 수 있었다. 세르나는 왕실의 안전 규칙을 존중하되 원래 봉인을 훼손하지 않는 이중 보관을 제안했다. “왜 그 상자 하나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창고 관리인이 물었다. “서류 내용도 중요하지만 누가 보관했는지 보여 주는 표식도 중요합니다.” 내가 답했다. 왕국과 마계의 참관인이 각각 봉인 상태를 확인하고, 새 보관 상자 바깥에 왕실의 관리표를 달았다. 원래 봉인은 그대로 두었다. 두 세계는 자신의 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기록을 훼손하지 않을 방법을 찾았다. 그때 세르나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정말로 돌아가고 싶은 세계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다만 그 길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럼 돌아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 세금을 받겠다고 하면?” “법적 근거부터 물어야겠죠.” 그녀는 웃었다. “역시 당신답군요.” 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그게 진짜 길인지도요.” 그 순간에는 마계와 왕국 사이의 오래된 협약보다, 한 사람의 돌아갈 곳을 돈과 권한으로 거래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더 분명해 보였다. 밤이 되자 로흐가 혼자 찾아왔다. 그는 영번 기록봉의 금속 고리 안쪽에 새겨진 작은 자국을 보여 주었다. 일반 제품에는 없는 홈 두 개였다. 드워프 장인 조합에서는 어떤 물건을 개인 소유가 아닌 ‘공동 증언의 보관물’로 맡길 때 그런 홈을 남겼다고 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란 뜻입니까?” “아니. 소유권은 누군가에게 있을 수도 있지. 다만 증언을 위해 맡겨졌으니 보관자가 마음대로 없애거나 팔 수 없다는 뜻일세.” 나는 노트에 적었다. ‘공동 증언의 보관물. 소유권 판단과 별개.’ 그는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걸 맡기는 사람이 반드시 왕이나 귀족이어야 하는 건 아니었어. 보통은 자기 말을 믿어 달라고 찾아온 가난한 사람들이었지.” 잠시 뒤 세르나가 보낸 추가 쪽지가 왔다. 마계 기록실에서 확인한 과거 반송 절차에는 ‘신원 미등록자의 설명을 대신하는 공동 증언 장치’라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그 표현을 여러 번 읽었다. 내가 도착한 날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면, 누군가 대신 증언을 맡겼을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다고 내가 영번의 소유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럼 이 안에는 누가 처음 도착했는지 적혀 있겠네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열어 볼 권한부터 확인해야 해.” 그는 숨을 크게 쉬더니 말했다. “우리 정말 느리게 가네요.” “그렇지. 그래도 이번엔 누가 우리 대신 서명해 버리지는 못할 거야.” 로웬은 마지막까지 번역비를 아까워했지만 정작 시민들에게 공개된 비교표를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이렇게 적어 놓으면 다음 번에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이번 회의의 가장 좋은 결론으로 기록했다. 나는 잠시 창밖의 마계 사절기를 바라봤다. 300년 동안 세금도 제대로 정산하지 못한 두 세계가, 이제는 서로의 사본을 들고 한 사람의 권리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기묘하게도 그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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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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