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은 자신이 서명하지 않은 문서를 보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서에는 왕실 인장 보관실의 임시 재발급 번호가 찍혀 있었다. 북문 통행료를 징수하라는 가짜 안내장과 제0호 반송품 정정 요청의 배포 단위가 그 번호를 가리켰다. 같은 번호는 곧 같은 사람이 사용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하지만 왕의 이름으로 발송된 것처럼 보이는 문서가 거리에서 사람을 협박하는 상황을 국왕이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내 인장이면 내 명령이 되는가?” 아델리온 왕이 물었다.
“폐하, 법이 요구하는 결재와 기록이 갖춰져야 합니다.” 에리카가 답했다.
“그걸 지키라며 인장 보관실을 둔 것이다.”
“맞습니다.”
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지금 그 보관실을 조사해라. 단, 내 기분에 맞는 범인을 찾아오지는 말고.”
그 말에 브란트의 표정이 잠깐 누그러졌다. 왕이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의심하는 것은 이 왕국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렇다고 왕실의 결단 하나로 법적 감정과 수사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회계 법정의 보전 명령과 감사원의 조사권을 별도로 받아 인장 발급 원장을 열었다.
원장에는 직인 원판, 복제 방지 섬유, 왁스 재고, 긴급 재발급 카드가 따로 등록돼 있었다. 문제의 임시 재발급 번호는 삼 년 전 화재 조사 이후 한 번 폐기 처리됐던 번호였다. 최근 두 달 사이에 다시 활성 표기가 나타났지만 폐기 취소 승인서가 없었다.
“폐기된 번호를 되살릴 수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인장 관리인 네라가 고개를 저었다. “기계에 입력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번호로 공문을 내보내려면 새 승인과 대장 인계가 있어야 합니다.”
“기계에 입력했다는 사실과 합법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다르군요.”
“그렇죠.”
나는 그녀가 증언하는 동안 손가락을 떨고 있다는 것을 봤다. 브란트도 봤지만 질문을 재촉하지 않았다. 네라는 지난주 자신이 보관실 열쇠를 반납한 뒤에도 퇴근 시각이 원장에 늦게 적힌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상급자가 수정을 명령했지만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했다.
“상급자가 누구였습니까?”
“정식 책임자는 휴가 중이었고, 임시 지휘자는 군무청에서 파견됐습니다.”
“이름이 있습니까?”
그녀는 봉투를 꺼냈다. ‘레온하르트 차관실 업무협조’라는 표기와 함께 서명 없는 업무분장이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름이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레온하르트가 직접 지시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의 집무실 발신대장과 실제 전달자 기록을 대조하기로 했다.
법정 심문 전에 티르센과 네라는 인장실 앞에서 작은 시연을 했다. 그는 정상 공문 하나와 복제 인장이 찍힌 종이 하나를 나란히 놓았다. 둘 다 왕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멀리서는 구별할 수 없었다.
“당신들은 어디가 다른지 알겠습니까?” 티르센이 물었다.
루카스는 유리판의 모서리를 살폈다. “왼쪽 새가 오른쪽보다 날개가 짧아요.”
“그건 그림 자체가 조금 다른 겁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가 있지요.”
그는 인장이 찍힌 시각이 기록된 발급표를 펼쳤다. 정품 인장은 원판 보관자의 인수 기록, 발급 업무번호, 승인 기안서가 연결됐다. 복제품은 도장 그림만 있고 나머지 자료가 없었다. 인장은 진위를 확인할 단서이지 홀로 권한을 만들어 내는 장치가 아니었다.
“그럼 사람들은 공문을 받을 때마다 인장실로 달려와야 합니까?” 네라가 물었다.
“그렇게 만들면 안 되죠.” 내가 말했다. “공문에 적힌 공개 번호를 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에리카는 감사원과 재무청의 장부를 대조하는 공통 창구를 제안했다. 왕실 인장실이 관리하는 문서라고 왕실 인장실만 검증하게 하면 내부 공모가 있을 때 막을 수 없다. 두 부서의 독립된 기록이 일치해야 최종 유효로 표시하는 편이 나았다.
네라는 오래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러면 제가 잘못 쓰거나 속아 넘어갔을 때도 누군가 발견하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한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에요.”
그 말이 끝나자 네라는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이미 일어나지 않은 근무 기록 때문에 밤마다 잠을 못 잔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뭔가를 숨긴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었다.
증언실의 책상에는 관인이 없는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물건인데, 에리카는 컵을 보더니 손을 멈췄다. 삼 년 전 부친이 마지막으로 서명했다는 문서에 컵의 둥근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잠시 회의를 멈췄다.
“잠깐 바람을 쐬고 와도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렇게 하세요. 이번 질문은 제가 이어가겠습니다.”
에리카는 복도 끝에 서서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그녀가 돌아온 뒤 부친의 죽음을 수사의 동력으로 삼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복수보다 확인이에요. 아버지가 무엇을 막으려 했고,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럼 그 확인을 함께 하죠.”
그녀는 다시 책상에 앉았지만 자신의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는 다른 감정관의 검토를 요청했다.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자료를 혼자 판정하면 아무리 옳은 판단을 해도 누군가 의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요청을 감사원 기록에 남겼다.
사람의 마음을 보호하는 절차와 증거의 공정성을 지키는 절차가 때로는 같은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그날 오후 레온하르트는 법원에 출석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업무협조 공문을 본 적 없다고 말했다. 수행 비서는 제이 인쇄실이 폐쇄되면서 서식 정리가 필요했던 건 맞지만 임시 인장 활성에 대한 결재는 없었다고 했다.
“그럼 파견 명단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정식 파견 명령이 있었다면 군무청 인사대장에 남아 있겠지요.”
“그 대장은 아직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제출 절차를 밟겠습니다.”
“오늘 중입니까?”
“가능한 범위에서.”
나는 말을 보탰다. “차관님, 명령을 했느냐는 질문보다 명령이 발송된 경로를 묻는 겁니다. 사용한 원장이 어디에 있는지만 확인해 주십시오.”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미묘하게 웃었다. “징수관은 늘 서류가 사람보다 정직하다고 믿습니까?”
“아닙니다. 서류도 사람 손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이 남긴 기록을 비교합니다.”
회계 법정은 인사대장 제출기한과 원본 보전 방법을 지정했다. 다만 레온하르트에게 당장 직무 정지를 명하지는 않았다. 증언에서 드러난 불일치는 수사의 이유였지 판결이 아니었다. 법정을 나오며 루카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은 늘 말로 빠져나가요.”
“거짓말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면 그때 묻자. 지금은 그가 무엇을 제출하는지 지켜봐야 해.”
왕궁으로 돌아온 뒤 왕은 작은 회의를 열었다. 이번에는 경제 문제였다. 임시 인장 때문에 시장 허가 갱신이 중단돼 상인들이 상품을 쌓아 두고 있었다. 인장이 불안하니 공문을 믿지 못하고, 공문을 믿지 못하니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이들이 늘었다.
“우리 세수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왕이 물었다.
“당장 전체 세수가 멈추진 않습니다. 하지만 합법 거래까지 수상한 청구서와 구별할 수 없으면 시장이 얼어붙을 수 있습니다.”
나는 공개할 수 있는 유효 인장 목록과 실제 징수 고지서 확인 절차를 제안했다. 중요한 것은 위조 방지 도장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직접 ‘이 돈을 누구에게 왜 내는지’ 확인할 방법을 갖는 것이었다. 에리카는 종이 한 장에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세 가지 항목을 적었다. 세목, 수납기관, 이의신청 경로. 그 항목이 없다면 돈부터 내지 말고 문의하라고 했다.
국왕은 문서를 읽다가 웃었다. “백성을 지키려고 만든 왕실 인장보다 세 줄 안내문이 더 도움이 되는군.”
“세 줄이 늘 진실은 아닙니다. 하지만 확인하러 갈 곳은 알려 줍니다.”
우리는 군무청과 재무청의 민원 창구를 분리해 임시 운영했고, 확인되지 않은 추가 징세는 모두 보류했다. 정상 세금 납부는 기존 수납창구에서 계속하도록 했다. 시장이 완전히 멈춘다는 소문을 막는 데에는 그런 작은 구분이 필요했다.
공개 확인 창구의 첫날은 썩 성공적이지 않았다. 주민들은 왕실 도장을 보여 달라고 줄을 섰고, 담당자는 기존 공문 번호를 일일이 찾아보느라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다. 오후 세 시부터는 줄이 계단을 내려가 장터 입구까지 이어졌다.
“이러면 정상 상인들만 더 지치겠습니다.” 라니아가 말했다.
나는 줄을 확인했다. 실제 돈을 내야 하는 사람과 단순히 소문이 무서워 확인하러 온 사람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접수 목적을 두 갈래로 분류했다. 세금 납부 기한이 있는 사람은 기존 수납창구에서 조회할 수 있도록 하고, 위조 의심 문서를 가진 사람은 사본을 남긴 뒤 검증 결과를 통지받게 했다. 위험한 자동 호출 창구와는 물리적으로 분리했다.
“그럼 누가 거짓 신고를 하면요?” 견습 직원이 물었다.
“거짓인지 조사하면 됩니다. 신고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면 진짜 피해자가 먼저 입을 다물어요.”
뒤에서 기다리던 상인이 한숨을 쉬었다. “그저 장사하고 세금 내고 집에 가고 싶을 뿐인데요.”
“그게 정상입니다.” 내가 말했다. “국가는 그 일을 이상하게 어렵게 만들지 않아야 해요.”
그날 끝날 때까지 민원은 전부 처리되지 않았다. 우리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건수와 이유를 안내판에 적었다. 직원들은 밤을 새우자고 했지만 무리한 야간근무는 또 다른 오류를 만들 수 있었다. 대신 다음 날의 인력을 보강하고, 야간 근무자에게는 실제 수당을 계산했다. 왕실 인장실을 조사한다며 새로운 무급 노동을 만드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창구를 닫을 무렵 어떤 노인이 손에 쥔 공문을 보여 줬다. 사흘 안에 기부금을 내라는 안내였다. 우리는 공문을 확인해 법적 의무가 없는 자발적 모금임을 알려 줬다. 그는 작게 욕을 했다. 내게 한 욕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 문서의 발급처를 신고 대장에 적었다.
저녁 무렵 티르센이 감정 결과를 가져왔다. 문제의 임시 재발급 번호를 찍은 장치에는 최근 정품 인장 원판이 끼워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문서에 남은 자국은 복제 판본이거나 다른 제작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잉크 압흔은 왕실 원판의 흠집까지 흉내 냈다.
“누군가 원판을 본 적이 있겠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원판을 직접 봤을 수도 있고, 자세한 본을 제공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티르센은 답을 서둘러 좁히지 않았다.
그때 네라가 인장 보관실에서 달려왔다. 그녀는 보전된 폐기 카드 사이에서 얇은 종이를 찾았다. 카드에는 ‘제0호 원소유권 조사’라는 신규 업무 명칭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왕실 도장이 아닌 사적인 서명이 있었다.
‘감정 완료 전 재발급 금지. 벨란.’
에리카가 종이를 받는 손을 멈췄다. 그녀의 부친이 쓰던 글씨와 닮아 있었지만 이 문서는 삼 년 전 원판의 복사본일 뿐이었다. 누군가 최근에 경고를 그대로 옮겨 적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막으려고 했다는 뜻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우선 이 경고가 언제 어떤 문서에서 옮겨졌는지 찾아야 합니다.”
왕이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이 경고했다면, 우리는 그 경고를 들었어야 했군.”
나는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경고는 이미 여러 곳에 남아 있었다. 문제는 남은 사람들의 책임이었다. 경고를 읽고도 다시 그 번호를 살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왕실의 힘을 빌렸든 도둑질했든, 한 번쯤은 장치 앞에 서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인장실 출입 원장에는 네라의 서명이 하나 더 생겼다. 전날 그녀가 보관실에 없던 시각이었다. 그녀는 서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원본 봉인을 확인한 뒤에야 모두 알아차렸다. 어떤 사람은 지금도 증거를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조사받는 바로 그 보관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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