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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73화
PAYLUA ORIGINAL · 제73화

73화. 증명하지 못한 하루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699자

오프라인 책장
나는 이 세계에 도착한 날짜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성벽을 넘어 들어온 새벽의 안개, 왕궁 문지기가 내 옷을 보고 경악하던 얼굴, 그리고 국고가 열일곱 금화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처음 들은 날. 그 장면들은 아직 기억났다. 문제는 날짜였다. “공식 방문객 등록부에 강태준이 없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이름을 못 알아들었겠지.” “비슷한 발음도 찾아봤어요. 미등록 방문자 칸에도 없습니다.”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외국에서 온 사람은 흔치 않았지만, 이 세계에 갑자기 떨어졌다는 나의 주장을 설명할 기록도 흔치 않았다. 처음 나를 데리고 온 시종은 경비병에게 인계했고, 경비병은 왕실 재무청에 인계했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누구도 최초 장소와 시각을 한꺼번에 기록하지 않았다. 세무조사관으로 살아온 내가 정작 내 출입 기록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한 셈이었다. “그래도 직접 본 사람은 있잖아요.” 루카스가 말했다. “사람의 기억은 중요해. 다만 서로 이야기한 뒤에는 같은 오류를 공유할 수도 있어.” “그럼 따로 물어보죠.” 그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수첩을 들었다. 우리는 최초 목격자 세 사람을 각각 다른 방에 앉혔다. 브란트는 경비병에게, 에리카는 시종에게, 나는 당시 왕궁에서 세탁물을 운반하던 노동자에게 물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완벽히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가 북문에서 왔다고 했고 누군가는 동쪽 화물길에서 처음 봤다고 했다. 옷이 젖어 있었다는 사실만 일치했다. “그날 비가 왔습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오렐이 오래된 기상표를 가져왔다. 왕궁 정원사는 매일 비가 내린 시간과 우물 수위를 적어 두었다. 내가 왔다고 생각한 날 아침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대신 밤새 북문 급수관이 터졌다는 수리 기록이 있었다. 기록을 보자 젖은 옷이 곧 폭우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제 옷은 누가 세탁했죠?” 내가 물었다. 세탁실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서기관 한 명이 장부를 뒤졌다. 이상한 옷 한 벌에 대한 수선료가 적혀 있었다. 금액은 은화 반 닢 상당의 공임으로 표시돼 있었고, 개인 물품이라 왕실에서 전액 지급하지 않았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이걸 제가 냈습니까?” “서명란에 이름 대신 작은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당시 나는 왕국의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서명을 못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대리 지급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나는 그 반 닢을 내 소환의 증거로 삼지 않았다. 옷을 말리고 수선한 사람이 있었다는 작은 사실만 기록했다. 초기 목격자 진술을 대조하던 에리카는 나에게 낯선 질문을 했다. “강태준 씨는 처음 여기 왔을 때 무엇을 갖고 있었죠?” “휴대전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없어요.” “실물을 본 사람이 있나요?”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검은 화면이 손 안에서 미끄러지던 느낌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세계에 넘어온 뒤의 기억인지, 바로 직전 한국에서의 기억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꺼낸 기억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확인된 소지품 명부는 없어요.” 에리카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세무조사 하던 사람인데 소지품 하나를 적어 놓지 않았다니.” “당신이 처음부터 조사관이었던 건 아니잖아요. 그때는 낯선 곳에 떨어진 사람이었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 수첩에서 빈칸을 하나 발견했다. 한국의 동료가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는 자리였다. 초기에 진실의 장부를 쓴 뒤 흐려졌던 기억이었다. 나는 그 빈칸을 메우려 하지 않았다. 기억이 없다는 사실도 지금의 사실이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까요?” 에리카가 물었다. “돌아갈 방법이 있다는 근거가 아직 없어요.” “그럼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요?” 그 질문은 장부에 쓸 숫자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여기서 끝내야 할 일이 있다는 마음도 있다. 둘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증거가 아니지만, 제 것입니다.” 에리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내 기억을 대가로 정밀 검증을 해 보라고 권한다면 나는 더더욱 경계할 것이다. 그 기억이 돌아갈 이유 자체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점심에 라니아가 뜨거운 수프를 가져왔다. 그녀는 내 수첩을 보고 피식 웃었다. “자기 출근 날짜를 찾는 징수관은 처음 봐요.” “급여를 정산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이 와중에 급여 걱정입니까?” “거기에 제가 무엇을 했는지도 적히잖아요.” 그녀는 웃다가 조용해졌다. 사망 처리된 노동자들이 임금을 청구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 날짜와 이름의 부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마이렌의 일을 떠올렸다. 내 입국 기록보다 그가 되찾아야 할 근무 기록이 훨씬 급했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 질문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 가지를 서로 빼앗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후에는 마계 사절단의 세르나가 답신을 보냈다. 오래된 국경 반송품 대장에는 사람이 물품으로 등록된 사례가 없다고 했다. 다만 ‘거래 범위를 벗어난 미분류 유입물’에 한해 영번 임시표를 달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영번은 소유권을 확정하는 번호가 아니라 보관 위치를 잃지 않도록 하는 번호였다. “유입물이라고 하면 사람이 포함될 수 있습니까?” 브란트가 물었다. “그 질문이 바로 함정입니다.” 내가 말했다. “분류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물건이라 불러서는 안 돼요.” 세르나는 별도의 의견서에 ‘왕국 시민 여부와 인적 존엄의 보호는 별개’라고 써 왔다. 마계 감사관이 우리보다 먼저 그 문장을 적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저녁 무렵 루카스가 옷 수선료 전표의 뒷면에서 작은 번호를 찾았다. 왕궁 출입 명부에 없는 번호였지만, 물자실의 영번 용지 묶음에도 같은 다섯 자리 표시가 있었다. 그는 기뻐하며 달려왔다. “드디어 연결됐어요!” “연결된 건 번호야. 날짜와 사람이 아니지.” “아, 맞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발견이야. 연결됐다는 말에 어떤 범위를 붙여야 할지 배우는 중일 뿐이지.” 티르센은 번호를 확인한 뒤 두 장의 종이 섬유를 비교했다. 물자실 쪽 용지는 삼 년 전에 제작된 재고일 가능성이 높았고, 수선료 전표는 최근 생산 종이였다. 번호가 재사용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누군가 옛 번호를 가져와 내 도착과 연결하는 문서를 새로 만들었을지도 몰랐다. 반대로 왕궁이 오랫동안 같은 물자번호를 썼을 수도 있었다. 나는 양쪽 가능성을 분리해서 적었다. 왕궁 세탁실의 늙은 직원은 나를 다시 불러 수선료 전표의 약호를 설명해 줬다. 그것은 신분 미상자의 표시가 아니었다. 대여한 작업복을 수선하고 돌려받지 못했을 때 붙이는 표시였다. 낯선 복장 하나가 세탁장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은 남지만, 그 옷의 주인이 바로 나라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입고 다닌 옷 모양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검은 옷이었고 주머니가 많았어요. 하지만 그 주에 비슷한 옷을 입은 상인이 하나 더 왔지요.” 나는 실망했다. 동료와 달리 그 직원은 불확실한 점을 스스로 밝혔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사실을 모른다는 답도 도움이 됩니다.” 그녀는 작업실 구석에서 조각난 단추 하나를 꺼냈다. 옷 수선 때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모아 놓은 통이었다. 그중 어느 것이 내 옷의 것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작은 금속 단추를 손가락으로 굴리자 낯선 도시의 소음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나는 그 느낌을 증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날의 보고서에는 ‘과거 소지품 명세서 부재, 단추 소유자 미상’이라고만 적었다. 이 문장은 누구에게도 짜릿하지 않았다. 그래도 증거가 없는 곳을 비워 둔 덕분에 최근 누군가 추가해 놓은 기록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래된 문서라며 내 이름을 적은 종이는 왜 다른 진짜 기록들과 달리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특정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우연보다 의심스럽다는 느낌을 숨기지 않았다. 단, 느낌과 보고서의 결론 사이에는 거리를 남겼다. 그날 밤 혼자 앉아 한국의 지하철역을 떠올리려 했다. 출근하던 노선의 색은 생각났지만 어느 역에서 갈아탔는지 선명하지 않았다. 그 기억이 예전 정밀 열람의 대가로 흐려진 것인지, 평범한 망각인지는 증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첩에는 ‘원인 모름’이라고 썼다. 장부의 힘을 쓰지 않은 날에도 사람은 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 내 기억을 대신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거리에서는 북문 구조 경보 시험을 알리는 일정한 종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나를 놀라게 했지만 이제 구분할 수 있었다. 경고의 종은 사람을 부르는 소리이고, 검증자의 자동 호출은 사람이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는데도 기계가 대신 누르는 소리였다. 두 신호를 같은 관에 흘려보낸 자가 있다면 아주 위험한 일을 한 셈이었다. 실종된 휴대전화를 찾겠다는 소문이 퍼지자 왕실 창고 직원들이 갑자기 물건을 들고 몰려왔다. 검은 판, 작은 거울, 문자가 새겨진 돌까지. 누군가는 전부 내 고향의 도구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실제로 본 적이 없는 물건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이 물건들 중 하나라도 알아보겠습니까?” 창고지기가 물었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조사를 합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찾는 물건이 있다고 해서 남의 물건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기 위해서요.” 직원들은 허탈해했지만 물건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 명은 내가 도착한 날 왕궁 문 앞에 구경꾼이 많이 모였다고 했다. 나는 당시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불러들이는 대신 현장 지도에 목격 위치를 표시하게 했다. 앞에서 본 사람과 뒤에서 본 사람의 묘사는 다를 수 있었다. 그날 지도에는 동쪽 화물길과 북문을 잇는 경로가 하나 그려졌다. 실선은 실제 이동 확인, 점선은 구전으로만 이어진 구간으로 표시했다. 점선이 실선보다 길었다.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진 진실의 크기였다. 루카스는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길이 아니라 빈칸 지도 같네요.” “빈칸이 어디에 있는지 알면, 다음에 뭘 물을지 정할 수 있어.” 그때 브란트가 급히 들어왔다. 새벽 시종의 기억과 관련해 증언할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삼 년 전 화재 조사에 참여했던 소방대원 이셀이었다. 그는 내가 처음 나타난 날 왕실로 불려 갔던 사람이 아니라, 최근에 누군가 그날의 목격 내용을 물어 갔던 사람을 알고 있었다. “누가 물어 갔습니까?” “왕실 인장 보관실의 서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장실에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언제였습니까?” “열하루 전입니다.” 열하루 전. 내 이름이 적힌 후보 명부의 보존판이 교체된 날과 같았다. 오래된 기억을 확인한 뒤 최근 서식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나는 이셀에게 그 사람의 인상착의를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외모만으로 범인을 특정하기보다 그가 실제로 보여 준 증표와 방문 기록이 중요했다. 이셀은 품에서 작은 영수증을 꺼냈다. 왕실에서 지급하는 증언 협조비라고 들었지만 돈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영수증 하단에는 ‘확인된 입국일은 정정 가능’이라는 인쇄 문구가 있었다. “그 사람이 내 날짜를 바꾸려 했군.” 나는 말하고 나서 바로 고쳤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서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지.” 수첩에 기록한 날짜 하나가 틀리더라도 내가 여기 서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증언한 사람들의 날짜까지 바꾸면 그 사실을 법정에서 말하기 어려워진다. 누군가는 내 소환의 비밀을 풀려는 것보다 먼저, 내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다고 기록할지를 조정하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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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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