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에서 가장 위험한 문서는 때때로 서명도 없었다.
나는 긴급 회계 정정 요청을 책상 위에 놓고 첫 줄부터 다시 읽었다. ‘귀환 계정의 원소유권을 주장하는 자가 등장했음.’ 그 아래 ‘제0호 반송품: 장부 밖에서 온 사람의 입국 기록’이라는 문구가 이어졌다. 누구의 입국인지, 어디서 입국했는지, 처음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을 말하는 거겠죠?” 루카스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종이에 쓰인 문장이 사람을 지정하는 증거는 아니야.”
“그래도 장부가 그 문구를 보여 줬잖아요.”
“내 눈에 보이는 장부는 법원의 공증인이 아니야.”
나는 어젯밤 떠올랐던 선택창을 수첩에 적었다. 조회 요청을 눌렀는지 여부에는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아니오’라고 썼다. 이미 잊은 한국의 기억을 더 잃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버튼이 타인의 소유권을 바꿀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리카는 봉투 모서리에 작은 집게를 채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하던 방식이라 했다. 손이 닿은 면과 원래 붙어 있던 먼지의 위치를 표시하려는 것이었다.
“접수인이 누구죠?” 그녀가 물었다.
오렐이 보존고의 출입표를 폈다. “왕실 앞마당 접수함에 새벽 첫 순찰 때 들어 있었습니다. 당직 서기관은 장부에 ‘발신인 미상’이라고 적었어요. 왕실 직송이라는 말은 봉투 표지에만 있습니다.”
“왕실에 발송된 문서와 왕실이 발송한 문서는 다르군요.”
“그렇습니다.”
브란트는 당장 도시의 인쇄실을 수색하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먼저 봉투가 지나온 길부터 좁히자고 제안했다. 왕궁의 문지기 세 명이 언제 무엇을 봤는지 따로 들었고, 에리카는 접수함 잠금쇠의 수리 기록을 가져왔다. 잠금쇠는 나흘 전에 교체됐다. 교체를 발주한 곳은 왕실 인장 보관실이었지만 실제 작업은 외부 수리공이 했다.
“수리공이 범인입니까?” 루카스가 속삭였다.
“수리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이 되면 이 왕국의 모든 목수와 대장장이가 감옥에 가야 해.”
수리공의 작업 종료 시각과 봉투 발견 시각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열쇠 복제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뜻밖의 불일치가 있었다. 봉투에는 습기가 남아 있었는데 밤새 비가 오지 않았다. 왕궁 서쪽 수도관의 작은 누수 지점은 새벽 순찰 길과 겹쳤다. 누군가 그쪽 통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나는 물기를 닦지 말라고 부탁했다. 가능성은 방향을 알려 주지만 누군가를 체포할 권한을 주지는 않는다.
접수함에 모형 종이를 밀어 넣어 보자는 제안은 생각보다 시끄러운 논쟁을 불렀다. 왕궁 관리인은 국가 시설에 장난을 치는 것이냐고 따졌고, 브란트는 원형을 훼손하지 않도록 나무 모형을 따로 만드는 편이 낫다고 했다. 나는 후자의 말에 찬성했다. 모형에는 실제 접수함의 치수만 복제하고, 국가 문서가 지나가는 원래 통로에는 손대지 않았다.
목수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접수함에 들어온 봉투의 크기를 정리했다. 표준 봉투는 폭이 일정했지만 영번 정정 요청 봉투는 길쭉하게 접혀 있었다. 얇게 접힌 종이가 배관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인지, 우연히 그런 형식이 된 것인지는 모른다. 오래된 봉투 두 장에도 비슷한 접힌 자국이 있었으나 발신 기관은 서로 달랐다. 나는 세 건을 하나의 범죄라고 묶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정리하면 하루가 다 가겠습니다.” 왕궁 관리인이 투덜거렸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도 오늘은 누구도 체포되지 않겠죠.”
“그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잘못 체포하면 다음 주에는 진짜 범인을 찾는 것보다 사과할 일이 더 많아지니까요.”
관리인은 어이없는 얼굴을 하더니 어느새 직접 자를 들고 봉투 폭을 재기 시작했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때로 위대한 연설보다 자기 손으로 확인할 만한 일을 주는 편이 빠르다.
모형 실험에서 첫 번째 봉투는 모서리가 찢어졌고 두 번째는 중간에서 구겨졌다. 세 번째는 왁스를 붙인 면을 안으로 접으니 순조롭게 미끄러졌다. 그러자 브란트가 물었다.
“누군가 미리 몇 차례 연습한 것 같군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꼭 우리 같은 연습을 했다고 볼 수 없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통로가 사용 가능하다는 사실뿐이었다. 봉투를 실제로 넣었다는 직접 증거는 여전히 없었다.
점심 무렵 티르센이 인장 감정실에서 나왔다. 그는 첫 문장을 읽은 뒤 유독 ‘반송품’이라는 두 글자에서 눈을 멈췄다.
“이 용어는 물품 인수 규정에만 씁니다. 사람의 출입 등록에는 쓰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바뀌었을 수도 있잖습니까.”
“바뀌었다면 변경 승인 원장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제출된 것은 제목이 바뀐 인쇄 서식뿐입니다.”
감정 결과도 신중했다. 종이의 섬유는 오래된 재고와 비슷했지만, 먹물은 최근 군무청 제이 인쇄실에서 쓰던 안료 계열과 닮아 있었다. 같은 계열이지 같은 병에서 나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래된 종이에 어제 글자를 인쇄할 수도 있다는 것, 그 단순한 가능성이 우리의 첫 결론이었다.
오후에 왕궁 회계 법정은 긴급 명령을 내렸다. ‘제0호’라는 제목만으로 어떤 사람에게 수수료를 청구하거나 기억·귀환·신분을 처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원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면 본인이 직접 소유 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나는 명령문을 읽고서야 숨을 내쉬었다. 서류 하나가 적법한 권리를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법한 절차가 서류 하나의 공격을 막아 주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북문에는 또다시 소문이 돌았다. 낯선 세계에서 온 징수관이 사실은 왕국의 재산으로 등록된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시장의 노인이 내게 물었다.
“당신에게도 세금이 붙는 겁니까?”
“제가 산 물건이나 번 돈에는 법에 따라 세금이 붙을 수 있겠죠. 제가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가격표를 붙일 수 없습니다.”
노인은 내 대답을 곱씹더니 손에 든 양파를 내밀었다. “이건 그럼 세금 빼고 주는 거요.”
“정상적인 영수증으로 사겠습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반가웠지만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 내 이름으로 또 다른 거래를 꾸미기 전에 기록의 발신인부터 찾아야 했다.
저녁에 오렐이 접수함 옆의 작업표를 가져왔다. 수리공이 남긴 도면에는 ‘물 빠짐’ 구멍이 표시돼 있었다. 그런데 실제 접수함 바닥에는 도면보다 큰 구멍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물을 빼는 구멍, 다른 하나는 얇은 관을 통과시킬 수 있는 크기였다. 그 관은 서쪽 복도로 이어진 비어 있는 배관과 맞닿아 있었다.
브란트가 손전등을 들었다. “봉투를 배관으로 밀어 넣었다?”
“실제로 가능한지는 시험해야 합니다.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모형으로요.”
그는 이번에는 성급히 ‘범인’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두께의 빈 종이를 넣어 보았다. 통로는 중간에서 막혔다. 반대쪽 뚜껑을 열어야만 종이가 나올 수 있었다. 반대쪽은 왕실 인장 보관실의 낡은 물자실이었다. 열쇠 반출대장에는 지난주 이틀 동안 승인자가 없는 임시 대여가 표시돼 있었다.
“안쪽의 사람과 바깥의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안쪽 사람이 출입을 숨기려고 저쪽을 이용했을 수도 있고.”
오렐은 접수함에 남겨진 예전 분실물 신고까지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한 건은 석 달 전에 한 상인이 계약서가 분실됐다고 신고한 기록이었다. 신고된 계약서는 며칠 뒤 왕실 물자실에서 발견됐지만, 누구도 그곳으로 옮긴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는 당시 담당자에게 계약서가 실제로 돌아왔는지 확인했다. 상인은 돌려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럼 이번 사건과 관계없지 않습니까?” 브란트가 말했다.
“누군가 같은 길을 사용했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죠. 다만 그때 물자실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번에도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래된 사건의 신고인에게 새 혐의를 묻지 않았다. 대신 분실물 인수 담당자 두 명의 교대 시간을 확인했다. 한 사람은 이미 퇴직했고 다른 사람은 현재 급식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퇴직자에게는 공식 요청서를 보내고, 현직자에게는 직무 외 조사에 응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마련했다.
작은 사건 기록을 다시 들추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과거의 실수는 종종 미래의 절차를 고칠 단서를 남긴다. 오렐이 조용히 말했다. “그때는 물건만 돌아오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때 그렇게 처리한 이유도 기록해 두죠. 지금의 기준으로 전부 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분실물 접수표를 새로 만들었다. 찾았다는 사실과 누가 어디서 찾았는지를 구분하는 칸을 넣었다. 다음에 누가 종이를 잃어버려도 그 종이가 돌아온 길까지 기록될 것이다.
오렐은 오래된 도면을 접어 나에게 건넸다. 평소라면 서류 한 장의 빈칸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을 표시가 있었다. 물자실 옆에 ‘반송품 임시 보류대’라는 문패가 그려져 있었다. 삼 년 전, 화재 조사로 폐쇄된 뒤부터 없어진 방이었다.
제0호 반송품을 만든 사람을 찾으려던 첫날, 우리는 사람의 이름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대신 봉투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누군가는 길을 만들었고, 길에는 사용한 흔적이 남았다.
수색이 끝나기 전 나는 왕실 감사원에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보관실 열쇠가 언제부터 개인에게 배당됐고 누가 복제할 권한을 갖는지 제도 전체를 점검하자는 것이었다. 사건 하나에만 매달려 열쇠를 회수하면 다음 달에는 다른 문이 같은 방식으로 열릴 수 있었다.
오렐은 오래된 인장실 규정을 펼쳤다. 정기 점검은 두 명이 함께 해야 했고 비상 열쇠는 봉인된 상자에 들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담당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야간에 한 명이 서고를 오가곤 했다. 열쇠 목록은 지난번 비상 수리 이후 갱신되지 않았다. 서명이 없다는 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누구 책임인지 지금부터 더 어렵게 찾게 됐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모자라서 그런 겁니다.” 오렐이 말했다.
“인력이 부족했다는 사실도 책임을 나눌 때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죠.”
“그러면 내일부터 모든 열쇠를 두 명이 같이 가져가야 합니까?”
“중요 문서가 있는 곳부터요. 추가 근무수당이 필요하면 실제 필요한 시간을 계산해서 예산을 올립시다.”
로웬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싸맸다. 보안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또 임금 문제가 생긴다. 나는 그에게 웃어 보였다. “인장 도난 피해액보다는 미리 지급하는 수당이 쌀 수도 있잖습니까.”
“그 말을 왜 그렇게 즐겁게 하나?”
“국가가 멀쩡한 돈을 쓰는 장면이 귀해서요.”
우리는 당장 증원할 수 없는 시간대에는 열쇠 반출 자체를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긴급한 공문은 다음 당직 때 이중 입회로 처리하면 됐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 빈칸을 이용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날 밤 나는 개인 수첩 마지막 줄에 썼다. ‘입국 기록이라 주장되는 서류. 아직 실물 없음. 봉투 발신인 미상. 인증하지 않음.’ 문장을 다 적고 나자 내 손이 조금 가벼워졌다. 사실을 한 줄씩 분리해 놓으면 두려움이 전부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잠들기 직전 루카스가 문을 두드렸다. 왕실 물자실에서 발견된 오래된 서랍의 목록이었다. 제0호라는 번호는 없었다. 그 대신 ‘영번, 미귀속 용지 보관’이라는 표기가 있었다. 등록일은 삼 년 전. 서랍 열쇠를 맡긴 사람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만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을 적지 말 것.’
나는 그 문구를 오래 바라봤다. 누군가는 사람을 재산으로 적지 않으려고 그런 말을 남겼을지 몰랐다. 누군가는 그 말을 이용해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려 했을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우리가 조사해야 할 것은 이름을 빼앗긴 사람이 아니라, 이름을 적고 지울 권한을 가진 자였다.
제71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