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아래 납세자 금고는 왕실 소유가 아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성벽은 왕국 돈으로 쌓았고, 그 안의 통로는 경비대가 관리했다. 그런데 통로 끝에 있는 납세자 금고는 오래전 상인과 노동자가 공동으로 만든 보관소였다. 국가는 출입 안전만 책임지고, 안에 맡긴 물건의 주인은 각각 달랐다.
“국가가 못 여는 금고라니.” 로웬이 중얼거렸다.
“오히려 정상입니다.” 내가 말했다. “우체국이 있다고 모든 편지가 국가 소유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당신 나라의 우체국은 참 성가시겠소.”
“그래도 편지를 훔쳐 읽지는 못하게 하죠.”
로웬은 내게 금고 문을 가리켰다. 바깥쪽에는 고대 드워프의 문양이 있었고, 안쪽에는 작고 낡은 사람 손바닥 모양이 찍혀 있었다. 문 앞의 안내판에는 반송 요청이 있는 사람, 보관 담당자, 독립 검증자 세 명이 함께 있어야 개봉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 독립 검증자가 당신 아닙니까?” 로웬이 물었다.
“그렇게 누군가 적어 놓았을 수 있지만, 저는 정식으로 임명받거나 동의한 적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열겠소?”
“적법한 검증자를 지정해야죠. 그리고 보관물품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로웬은 나를 오래 바라봤다.
“당신이 오면 일이 빨라질 줄 알았는데, 문이 더 많이 잠기는군요.”
“열면 안 되는 문까지 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법원은 세 기관의 대표를 불렀다. 왕국 보관소, 마계 협약 감독관, 그리고 시민 보관인 대표. 마계 대표는 세르나였고, 시민 대표는 한때 구호소에서 일했던 오딜이 맡았다. 그녀는 평생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맡아 수선한 경험을 인정받아 임시 후보로 추천됐지만, 실제 개봉 권한 부여는 법원 심사를 거쳐야 했다.
“내가 금고를 열 자격이 있나?” 오딜이 물었다.
“돈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남의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노파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네 이름으로 먼저 열지 않겠다는 약속부터 해 봐라.”
나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약속합니다.”
그러나 금고 개봉은 그날 실행되지 않았다. 원래 보관인의 후손이 자신에게 먼저 통지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상속권이 인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관계인이 존재한다면 통지와 의견 제출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문 앞에서 뒤돌아섰다.
돌아오는 길에 카르디온의 사절이 도착했다. 불꽃 대신 가죽 신발을 신은 작은 드워프였다. 이름은 로흐. 그는 백 년 전 드워프 신탁에 관한 새 자료를 들고 왔다. 사절은 드래곤이 ‘마음만 먹으면 문을 녹일 수 있다’는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만, 문을 녹이면 절도 혐의와 수리비가 생깁니다.” 내가 말했다.
로흐는 한동안 내 얼굴을 바라봤다.
“용께서 그 말도 예상하셨소.”
“그렇습니까?”
“그래서 수리비를 내실 의향은 없다고 하셨소.”
“정말 현명하신 분이군요.”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카르디온이 조금 보고 싶어졌다. 백만 금화를 쌓아 놓은 드래곤에게도 지키는 약속이 있었다. 왕국의 인장 네 개를 찍은 사람보다 그 약속이 더 단단할 때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로흐가 가져온 것은 드워프 장인 조합의 폐기 금고 목록이었다. 그곳에는 ‘성벽 아래 제12보관함’의 위치가 정확히 적혀 있었다. 그러나 관리인은 드워프가 아니었다.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소유 미상 물품에 대한 임시 보관. 보관 책임은 왕국-마계-시민 공동. 열쇠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보류 인장으로 지정.’
“그럼 이 금고에는 사람 이름이 없어도 되는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처음부터 그랬을 가능성이 크지.”
“장부에는 왜 ‘원소유자 살아 있음’이라고 했을까요?”
“아직 모른다. 계정이 활성 상태라는 뜻일 수도 있고, 보관인이 살아 있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알았다. 하지만 납세자 금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질문을 해결할 수는 없다.
금고 개봉을 둘러싼 법원 심리도 있었다. 원래 보관인이 사망했다는 사람의 친척이 나타나 손도장을 찍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가문에서 금고를 관리해 왔으니 즉시 열쇠를 내놓으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상인조합 대표는 그 가문이 과거에 보관비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관비를 안 냈다는 이유로 소유권이 사라집니까?” 내가 물었다.
“계약에 따라 담보권을 주장할 순 있지요.” 상인 대표가 대답했다.
“그 계약의 상대방이 누구였습니까?”
그는 다시 종이를 뒤적였다. 계약 당사자 이름은 오래된 물 얼룩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가문 대표에게 자신이 실제 상속인이라는 자료를 제출할 기회를 주었다. 다만 자료 제출 기회와 곧장 금고를 열 권리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오딜은 심리를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집에 맡긴 옷이 있다고 내 아들한테 와서 그냥 가져가도 된다는 말은 못 하겠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격한 법률 문장보다 노파의 비유가 더 빨리 이해될 때가 있었다.
개봉 심리가 끝난 뒤 나는 기록실에서 스스로를 검증자라고 소개하는 사람 셋을 만났다. 첫 번째는 점성술사였고, 두 번째는 인장을 수집하는 상인이었으며, 세 번째는 왕실 병사 출신이었다. 셋 모두 자기 이름으로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증명서를 가져오셨습니까?”
점성술사는 자신의 별자리 그림을 내밀었다.
“별의 배열이 나를 지목하고 있소.”
“법원의 위임장이나 시민 보관인 회의록이 필요합니다.”
“별보다 법원이 높다는 거요?”
“이 금고를 열 때는 그렇습니다.”
상인은 자신의 인장 수집품을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네 개의 검은 깃털과 흡사한 모양이 있었다. 그러나 가게에서 산 모조품이라는 거래 영수증까지 함께 있었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며 조용히 돌려줬다.
마지막 병사는 자기가 삼 년 전 화재 현장을 지켰다고 말했다. 그는 두 번째 구조 신호가 울린 뒤 군무청 상관이 보관함을 봉인하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그의 말은 참고인 진술로 접수할 가치가 있었지만, 그가 그때 본 물건과 지금의 금고가 같은지 확인해야 했다.
“그 상관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기억은 하지만 문서로 확인받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기억한 이름을 지금 봉인 진술로 남겨 주시면 다른 기록과 독립적으로 대조하겠습니다.”
그가 봉인된 종이에 이름을 적는 순간 내 장부가 아주 약하게 반응했다. 나는 화면을 쳐다보지 않았다.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부의 판정부터 보면, 어떤 질문을 했는지도 모르게 될 때가 있다.
그날 저녁 에리카가 나를 찾아왔다.
“당신은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돌아간 뒤 이곳에서는 당신이 무슨 사람으로 기록될까요?”
나는 답을 찾느라 잠시 침묵했다. 영웅, 사기꾼, 외부 검증자, 징수관. 누가 어떻게 적든 내 뜻대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남의 이름으로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적혔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시선을 내렸다.
“저는 당신이 여기 있었던 일을 기억할 겁니다. 장부가 없어져도.”
그 말에 나는 마음이 이상해졌다. 내가 두려워하는 기억의 대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누군가는 기억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사고가 났다. 금고 앞에서 일하던 관리청의 젊은 수리공 하나가 돌 틈에 발이 끼인 것이다. 긴급 구조용 손잡이는 낡았고, 종루에 연결된 구리선은 후보 인증 기계와 여전히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브란트가 사람을 부르려 달려갈 때 네일이 소리쳤다.
“그 손잡이는 당기지 마세요! 아직 어떤 호출 문구가 뜰지 몰라요!”
나는 한순간 얼어붙었다. 사람을 구하는 손잡이를 누군가 계약 승인 장치에 연결해 놓았다는 사실이 바로 눈앞의 위험이 됐다.
“구조대를 사람 손으로 부릅니다.” 내가 말했다. “기계가 고장 났다고 구조를 포기할 순 없어요.”
브란트는 병사 둘을 뛰게 했고 세르나는 마계의 이동 신호를 보냈다. 수리공은 발목이 다쳤지만 무사히 빠져나왔다. 우리는 물리적 구호 신호와 인증 회로를 완전히 분리하기 전까지 기존 손잡이에 사용금지 표지를 붙였다. 그 대신 임시 경보병을 배치했다.
수리공은 들것에 실리면서 내게 말했다.
“저 문은 열지 못했지만, 안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사람 목소리였습니까?”
“아니요. 망치로 안쪽을 두드리는 것 같았어요. 열두 번.”
나는 금고를 바라봤다. 그 안에 사람이 갇혀 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었다. 낡은 장치의 공명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수리공의 진술은 따로 보존했다. 현재의 안전 문제는 고대 계약 수수께끼보다 먼저 확인해야 했다.
사고가 난 수리공의 치료비도 문제였다. 원래 작업이 성벽 관리청 소관이었는데, 그날은 법원 감정 일정에 맞춰 현장에 나온 상태였다. 관리청은 법원이 보상해야 한다고 했고, 법원은 위험한 시설을 관리하는 기관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나는 둘의 편을 가르기 전에 노동 계약서를 확인했다. 수리공은 안전장비 제공을 요구했지만 일부 장비가 낡아 있었다고 진술했다. 브란트가 먼저 자기 경비대의 응급 지원 물품을 보냈다. 비용 책임을 나중에 다투더라도 다친 사람을 기다리게 할 이유는 없었다.
“다리가 나을 때까지 일을 못 하면 임금은 어떻게 됩니까?” 수리공이 물었다.
“계약과 왕국의 작업상 사고 보상 규정을 확인하겠습니다. 구체적인 금액을 지금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서 그의 동료가 말했다.
“그래도 저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꼭 찾아보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다음 조사에서 다치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동료는 손을 들어 보였다. 다섯 손가락 사이에 잔뜩 낀 흙을 보자 나는 기계와 장부 뒤에 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했다.
수리공이 떠난 뒤 브란트는 경비대 교대표를 새로 그렸다. 금고 앞에 병사를 두면 북문 순찰이 비었다. 순찰을 유지하면 금고 앞에 사람이 부족했다. 나는 경비대를 무한히 늘릴 돈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존고의 이동형 봉인을 사용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두 곳을 확인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브란트는 절반쯤 못 미더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경비는 아니었지만, 누군가 몰래 봉인을 훼손하면 흔적이 남도록 설계했다.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물건이 있소?” 그가 물었다.
“누군가 가져가려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습니다.”
밤에 성벽 관리청에서 현장 음향 측정을 마쳤다. 일정한 간격의 열두 번 두드림은 금고 내부가 아니라 그 뒤쪽 배수로에서 들린 것으로 추정됐다. 그 배수로는 삼 년 전 창고 화재 이후 봉인된 북부 관로와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제방에서 인장을 꺼낸 뒤, 같은 관로를 통해 새로운 신호를 보낸 것인지도 몰랐다.
로흐는 금고 주변의 옛 드워프 글자를 스케치했다. 그중 하나는 아직 내가 해석할 수 없는 고대어였다. 그는 장인의 서명이라며 설명했지만, 그 문구를 곧바로 법적 위임장처럼 이용하지 말라고 했다.
“장인이 자기 작품을 사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물건을 소유한 건 아니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드래곤이 수백 년 동안 금을 지키면서도 자기 것이 아닌 재산을 구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카르디온 님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전해 드리겠소. 단, 찬사는 과세 자료에 기록하지 마시오.”
“무료입니다.”
로흐는 웃으며 돌아섰다. 마침 성벽 아래에서는 안전 점검을 마친 병사들이 교대하고 있었다. 금고를 지키는 일은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 일과였다.
문은 여전히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문을 열기보다 뒤에 있는 관로가 왜 다시 살아났는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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