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엔 모브가 내민 열쇠는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작고 초라한 철 열쇠였다. 왕국의 금고를 여는 열쇠보다 사람이 숨어 있는 장부실을 여는 열쇠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걸 나는 이곳에서 여러 번 배웠다.
“어째서 이제야 말합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리엔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방에 무엇이 있는지 저도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더 미루면 다른 사람 이름이 들어갈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장부실의 존재만 알았습니다. 계약에 내 이름으로 운영 지시가 들어가는 건 지금까지 몰랐어요.”
그녀는 스스로에게 유리한 말만 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법원이 계약 원본의 존재를 알고도 미제출한 경위를 조사할 수 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태도에 면죄부를 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문이었다.
우리는 법원 명령을 받아 결제소 지하의 장부실로 갔다. 법원 대표와 마계 감사관 세르나, 왕국의 독립 기록 담당자가 함께 입회했다. 열쇠를 돌리자 문은 쉽게 열렸지만 안에는 또 하나의 쇠문이 있었다. 두 번째 문에는 자물쇠가 없었다. 대신 오래된 서식이 붙어 있었다.
‘검증자는 본인의 이름으로만 책임을 진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누군가 조약을 아예 모르고 시스템을 만든 게 아니었다. 원래 규칙을 알면서도 다른 문구를 덧씌운 흔적이었다.
쇠문 너머에는 작은 서고가 있었다. 장부와 계약서가 선반마다 촘촘히 쌓여 있었다. 가장 위의 문서철에는 삼 년 전 벨란 감사관의 서명이 있었다. 에리카는 손을 뻗지 않고 티르센을 불렀다. 감정관은 원본 사진을 찍은 뒤 봉투에 넣었다.
서명 뒤의 문장은 짧았다.
‘대체 신청은 신분 확인의 보조 절차에 한한다. 본인의 기억, 재산, 귀환 여부에 관한 처분을 대신할 수 없다.’
벨란 감사관은 그 문구를 지우려는 운영 변경안에 반대한 기록을 남겼다. 반대한 뒤 그가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문서상 그는 대리인이 타인의 권리를 가져갈 수 있는 조항에 동의하지 않았다.
에리카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작게 말했다.
“아버지가 그날 끝까지 지키려 한 게 이 문장이었군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다른 기록도 봐야 합니다.”
“알아요. 그래도 오늘만은 기뻐해도 되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위로하는 데까지 감정 보고서를 들이댈 필요는 없었다.
선반 두 번째 칸에서 하청 계약 원본이 나왔다. 계약의 외부 운영자는 제삼 결제소가 아닌 '공동 반송 기록 관리단'이었다. 업무 범위는 오래된 구조 경보와 미배달 물품의 확인이었다. 삼 년 전 변경안이 붙으면서 사람의 이름을 호출하는 기능이 들어갔다. 그 뒤 최근 수정본에서 '본인 승인 불가 시 대체 호출'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누가 추가했습니까?” 내가 물었다.
문서에는 최종 승인자의 이름 대신 관리단 직인이 있었다. 그러나 계약 관리번호가 군무청 제이 인쇄실의 야간 근무표 번호와 연결됐다. 이것만으로 개인 책임을 확정할 수는 없었지만, 관리단이 누구에게 도장을 맡겼는지 조사할 명확한 근거가 생겼다.
그때 루카스가 선반 뒤에서 작은 금고를 발견했다. 안에는 현금 대신 회계 자료가 들어 있었다. 하청 업무 비용의 실제 지급 내역이었다. 인쇄틀 수리비로 은화 여섯 닢, 필사 공임으로 은화 세 닢, 광고 제작 선금으로 은화 두 닢이 나갔다는 기록이 있었다. 모든 지급에는 출금 확인 표기가 있었지만 최종 수령인이 누구인지는 따로 영수증 대조가 필요했다.
“왜 이렇게 적은 돈으로 사람들을 흔들죠?”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금액이 작아서 오히려 사람들이 큰 사건과 연결할 생각을 안 할 수도 있지.”
나는 왕실 방벽 유지료 사백팔십 금화와 이 비용들을 한 장에 합산하지 말라고 했다. 대금을 지급한 계정과 돈의 흐름이 달랐다. 소액 하청비가 범죄 수단을 살 수는 있지만 곧바로 국가 보전금 전액의 배후라는 뜻은 아니었다.
우리는 원본 서고의 보관 체계를 조사했다. 세 개의 봉인함 가운데 하나만 최근 열렸다가 닫힌 흔적이 있었다. 그 안에는 고대 기본 협약의 왕국 사본, 마계 사본과 대조한 차이표가 들어 있었다. 비오르가 문장을 읽고 얼굴을 굳혔다.
“원본과 최근 배포본이 다른 부분이 여기예요.”
마계 원본은 '본인 부재 시 보류'라고 적혀 있었고, 왕국 보관 사본도 같은 뜻이었다. 그러나 최근 운영본은 '본인 부재 시 대리 승인 가능'으로 바뀌어 있었다. 단어 하나가 사람의 권리를 뒤집었다. 세르나는 두 사본의 인장 연혁이 맞는지 최종 감정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다른 출처의 문서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누가 이렇게 바꿨는지 알아내야겠군요.”
“네. 그런데 그 전에 누구도 이 바뀐 문장을 근거로 승인할 수 없게 해야 해요.”
우리는 법원에 추가 중지 명령을 요청했다. 재판장은 긴급 심리 뒤 본인 동의 없는 대체 승인의 집행을 전면 금지했다. 정상적인 신용증서 지급이나 물품 반환 심리까지 정지시켜서는 안 된다는 단서도 함께 붙었다. 바로 그 구분 때문에 리엔은 더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워했다.
문서 대조를 하던 중 세르나는 협약의 다른 조항 하나를 가리켰다. 반송물품의 원소유자가 확인되지 않을 때는 물건을 임의 처분하지 않고 보관한다는 조항이었다. 오래된 표현으로는 '이름 없는 자를 위해 남겨 둔 자리'라고 되어 있었다.
“그게 귀환 계정입니까?” 내가 물었다.
“관련되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원래 대상이 사람의 기억인지, 실물 물품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비오르는 서고의 원래 입고표를 가져왔다. 삼백 년 전 기록에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물품의 표식과 위탁자의 서명이 있었다. 최근 들어 일부 표식에 사람 이름을 연결한 흔적이 보였다. 나와 에리카, 하르마 같은 이름이 왜 등장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단서였다.
“그렇다면 누군가 계약서에 '귀환'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은 목적도 달라지겠군요.”
“예. 본래 물품을 찾아갈 수 있는 권리를 사람의 운명과 바꿔 판 것일 수 있죠.”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이전까지는 우스꽝스러운 세금 장부의 오류처럼 보이던 일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아버지, 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동일한 빈 칸에 끼워 넣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회계 부정이 아니었다.
에리카는 내 표정을 보고 낮게 말했다.
“당신도 화가 나는군요.”
“그럼요.”
“늘 보고서의 문장처럼 말해서 몰랐어요.”
“화가 나면 숫자를 더 세게 씁니다.”
그녀가 웃었다. 나는 펜 끝에 힘이 들어가 종이를 찢을 뻔한 것을 숨겼다.
우리는 오래된 물품 대조 표본을 모형 장치에서 시험했다. 원래 서식은 위탁자 부재 시 보류 칸으로 이동했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자동 호출하지 않았다. 최근 서식을 입력하면 반대 결과가 나왔다. 두 경우 모두 실제 인쇄기에서는 실행하지 않았다. 법원 허가를 받은 모형만 사용했고 실제 장치의 활성 코드도 입력하지 않았다.
티르센은 테스트 보고서에 아주 굵은 글씨로 적었다.
'재현 결과는 문구 차이와 처리 방식의 관계를 보여 줄 뿐, 삼백 년 전 원래 기계와 동일하다는 증명은 아님.'
루카스가 그 문장을 읽고 웃었다.
“이제 저도 감정 보고서가 어떤 건지 알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을 딱 하나 말하려고 불확실한 것을 열 개 적네요.”
“그게 더 싸게 먹히는 일이야.” 내가 말했다. “잘못된 확신 하나 때문에 피해를 회복하는 비용은 훨씬 크거든.”
오후 늦게 왕국의 작은 투자자 모임에서도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은 제삼 결제소의 신용 수익권 증서를 샀다가 경고문이 잘린 채 판매됐다고 주장해 왔다. 이번 서고에서 원래의 상품 설명서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나는 원본을 함부로 공개하지 못한다는 설명부터 했다. 그 대신 법원이 공개를 허용한 조항과 이의 접수 방법을 안내했다.
한 노인은 자신이 왕실을 믿고 돈을 맡긴 것과 개인 사업자를 믿고 돈을 맡긴 것이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다. 나는 당장 판결을 대신하지 않았다. 상품 판매자의 법적 지위와 담보 범위를 확인하는 일이 투자자의 권리를 지키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신청서를 받아 갔다.
이런 일은 대개 승리의 순간을 흐리게 했다. 고대 계약의 잘못된 조항을 찾아도 누군가의 투자금이 즉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옛 조폐소의 보전금 이백육십 금화 역시 그날 봉인 상태 그대로였다. 우리는 누구의 돈인지 확인하기 전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이 사건을 심리할 법관에게는 누가 어떤 약속을 했고, 어떤 부분이 뒤늦게 바뀌었는지 판단할 자료가 늘었다. 나라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은 때로 금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주장을 검증할 기회였다.
서고를 나와 복도를 걷던 중 에리카는 내게 아버지의 마지막 보고서에 관해 물었다. 나는 우리가 찾은 것이 그의 전부를 증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가 남긴 반대 기록이 에리카의 이름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다.
“당신은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부터 할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연락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해야겠죠. 아마 그 뒤에 영수증을 정리할 겁니다.”
“정말 지독한 직업병이네요.”
“아직도 제게 임금 명세서를 보여 주지 않은 왕국보다는 낫습니다.”
에리카가 웃었다. 웃음은 짧았지만 우리가 지하에서 끌고 나온 무거운 공기를 조금 밀어냈다.
에리카는 서고 밖에서 잠깐 앉아 쉬었다. 나는 물을 가져다줬다.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만 조사에 참여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아버지의 잘못이 나와도 감추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가 그 말을 할 때마다 잘난 척한다고 생각하더군요.”
“사람들이 믿어 줄 때까지 말하는 것 말고 방법이 있습니까?”
“당신에게 묻는 제가 어리석었네요.”
“제게 물으면 늘 서류부터 찾으니까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을 함께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남긴 반대 문서가 그녀의 짐을 조금 덜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간 삼 년을 지워 주지는 않았다.
잠시 뒤 우리는 함께 서고의 봉인표를 다시 확인했다. 누가 어떤 시각에 들어왔고 무엇을 만졌는지 모두 적혀 있었다. 서류를 집으로 가져가서 위로받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원본이 사라지지는 않게 할 수 있었다.
밤이 깊을 무렵 법원 서기가 문서 하나를 들고 왔다. 관리단의 삼 년 전 설립 인가서였다. 인가서에는 세 기관의 이름이 있었다. 왕실 기록실, 군무청, 제삼 결제소. 네 번째 칸은 비어 있었다.
“왜 빈 칸이 있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서기가 대답했다.
“원래 독립 검증자 자리랍니다. 하지만 벨란 감사관이 사망하면서 충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네 번째 깃털을 떠올렸다. 누군가 빈 자리 하나를 이용해 모든 권한을 가져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인가서의 마지막 장에는 최근에 끼워 넣은 종이가 있었다.
‘네 번째 자리가 비어 있을 경우, 귀환 후보를 등록하여 자동 대체한다.’
그 종이에는 강태준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낯익은 일곱 자리 기호가 찍혀 있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있었는지, 열하루 전 만들어졌는지 구별해야 할 바로 그 기호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제삼 결제소 운영관리단 실무 책임자, 내일 정오 직접 입회.'
이름이 없는 약속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스스로 나타나겠다고 적어 보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을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제5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