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화재가 난 곡물창고에 출석하라는 종이를 하르마에게 바로 보여 주지는 않았다.
그가 겁먹을 사람이라서가 아니었다. 문서는 아직 수신 경로가 확인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사람의 이름을 넣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폐허에 보내는 건 위험했다. 나는 하르마를 법원 보호실로 불러 창고 방문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그는 쪽지를 읽자마자 종이 끝을 움켜쥐었다.
“그곳에 다시 가라고요?”
“의무는 없습니다. 제가 보여 드리는 이유는 누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당신을 보호할 선택지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르마는 한참 뒤에야 의자를 밀었다.
“그날 안에 사람들이 있었어요. 다들 죽었다고 했지만, 저는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였습니까?”
“저쪽 문에서 두 번, 이쪽 문에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죠.”
그는 창고 도면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기록상 출입구는 둘뿐이었다. 그러나 하르마는 세 번째 문이 있었다고 했다. 비상 통로가 아니라 곡물 분류기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검수실이었다.
“그곳 기록은 왜 없습니까?”
“불이 나기 전에 이미 막혔다는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누가 보고했죠?”
“셀딘 모로가 회계사로 일하던 부서요. 하지만 그분이 직접 서명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메모를 했다. 같은 이름 셀딘이라는 이유로 군무청 서기관 셀딘 라르크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구분을 여러 번 배웠다. 실수 한 번이 진술자의 인생을 망칠 수 있었다.
법원은 폐허의 한정 현장 조사 명령을 내렸다. 주민 출입 통제를 맡을 경비대와 구조 안전 담당자를 따로 배치했다. 위험한 벽을 무너뜨려 증거를 찾는 행위는 금지했다. 나는 하르마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는 결국 폐허 입구까지만 동행하겠다고 했다.
비가 내렸다. 오래된 곡물 냄새는 사라졌지만 불탄 벽돌에는 아직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에리카는 폐허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아버지가 숨진 사건과 관련된 장소였다. 내가 괜찮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들어가지 않고 도면부터 보려고요.”
우리는 현장에 들어가기 전에 소방대장 사벨의 메모를 읽었다. 화재 보고서에는 발화 시각이 하나만 기록돼 있었지만 사벨의 개인 기록에는 연기 발생 시각 두 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사람들이 대피하기 전, 두 번째는 구조대가 들어간 뒤였다. 누군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뜻인지, 남아 있던 불씨가 다시 번졌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문을 알고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사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수리 인부가 바닥 판을 들어 올렸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으니 정식 보고서에는 넣지 않았어요.”
“말을 들은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이셀. 지금도 그날 일을 후회하는 대원이지요.”
이셀은 뒤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당시 구조 중에 작은 철제 상자가 다른 출구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 상자에는 금화가 아니라 기록 두루마리가 있었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내용물은 보지 못했다.
점심 무렵 사벨은 폐허 맞은편 오래된 우물터를 가리켰다. 화재 당시 구조대가 두 번째 불길을 피하려고 사용했던 물 공급 지점이었다. 그런데 우물 옆 장부에는 물을 운반한 수레가 세 대라고 적혀 있었고, 당시 사진에는 두 대만 보였다. 브란트가 세 번째 수레가 범인의 도주용이었을 거라고 말하자 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사진 밖에 있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수레도 꼭 세 대였는지 자신이 없어요.”
나는 그 답을 기록했다. 분명하지 않다고 말하는 목격자의 진술은 쓸모없는 증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의 빈칸을 정직하게 보여 줬다. 사벨은 화재 직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고, 그래서 자신의 메모와 기억을 반드시 분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물 덮개 아래에서는 작은 청동 조각이 발견됐다. 나무판을 고정하는 평범한 부속처럼 보였지만 네일은 판독기의 접점과 규격이 비슷하다고 했다. 나는 그걸 즉시 '범행 도구'라고 쓰지 못하게 했다. 폐허에서는 온갖 물건이 섞일 수 있었다. 발견 위치와 깊이만 남겼다.
하르마는 우물가에 앉아 오래전 구조대가 누군가를 찾던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했다. 그날은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바닥이 미끄러웠다고 했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에리카가 물통을 건넸다.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이번에는 기억나는 게 있어요.”
하르마는 자신이 화재가 나기 전에 위험을 알리는 서류를 보관함에 넣었었다고 말했다. 회계사들이 사망자 명단으로 이용한 이름표 원장이었다. 그 서류에는 누가 어느 날 일했는지뿐 아니라 실제 임금을 받았는지도 적혀 있었다.
“그 장부가 불에 탔습니까?”
“그렇게 보고됐습니다. 하지만 서류를 넣었던 상자는 철제였어요.”
이셀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보았던 작은 금속 상자가 바로 그 장부를 보관한 상자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두 진술이 아직 독립된 기억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두 사람이 같은 물건을 말하는지는 크기와 봉인 번호를 비교해야 했다.
브란트는 화재 당시 폐허에서 반출된 물자 목록을 요청했다. 그 목록에는 철제 상자 세 개가 적혀 있었다. 두 개는 군무청으로, 하나는 '임시 대조실'로 옮겨졌다고 돼 있었다. 대조실 주소는 비어 있었다. 나는 왕궁 기록관에 해당 임시 시설이 존재했는지 조회를 의뢰했다.
“이제야 누군가가 상자를 들고 갔다는 기록을 찾았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기록 속 상자가 이 상자와 같은지 아직 모릅니다.”
“그 말 하실 줄 알았어요.”
그녀는 웃으려다 눈가를 훔쳤다. 자기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건드렸을지 모르는 문서의 행방이 눈앞에 조금씩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무리 회계 자료만 보려고 해도 그 사건은 누군가가 평생 품었던 질문과 연결돼 있었다.
현장 조사팀이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작은 아이가 우리에게 종이배 하나를 내밀었다. 폐허 안에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기다리던 주민의 아이였다. 그는 빗물에 종이배를 띄우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서 일했는데, 죽은 사람으로 적혀 있대요. 이름을 찾아 주세요.”
나는 종이배를 가져가지 않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직접 말씀하실 수 있니?”
“네. 집에 계세요.”
우리는 가족에게 정식 생존 신고 방법을 알려 줬다. 그가 기존 열두 사람 가운데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건이 어른들의 종이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아이가 보여 주었다.
그때 지하 검수실로 내려가는 바닥 판이 발견됐다. 최근에 새 나사로 고정된 부분이 있었다. 티르센은 나사 재질을 보고 최근 교체 가능성을 기록했다. 네일은 나사를 열고 싶어 했지만 안전 담당자가 바닥 하중을 확인하기 전까지 손대지 못했다.
“그래서 세금 징수관이 여기서 뭘 합니까?” 브란트가 물었다.
“기다리는 일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일을 하시는군요.”
“국왕께서 월급을 주시면 그때 계산해 보겠습니다.”
루카스가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월급이 밀린 공무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으니까.
현장에서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최근 방문객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식사 포장지에 작은 구멍들이 줄지어 있었다. 하르마가 구멍을 보고 말했다.
“저건 문서 전달용 압인 코드입니다. 읽는 사람이 다르게 해석할 수 없도록 두 번 접어야 해요.”
우리는 함부로 펴지 않고 원래 접힌 모양을 촬영하고 도면에 옮겼다. 평범한 숫자로 바꾸자 '보상금 목록: 12'라는 문구가 나왔다. 원래 창고에 남아 있던 흔적이 아니라 최근 누군가 방문해 남긴 안내일 가능성이 컸다.
폐허를 빠져나오려던 순간 마을 주민이 뛰어왔다. 어젯밤 이 근처에서 소방관 옷을 입은 사람이 종이 상자를 옮기는 걸 봤다는 신고였다. 브란트가 당장 수색대를 보내려 했지만, 우리는 정확한 시각과 옷의 특징을 먼저 물었다. 주민은 얼굴은 못 봤고 팔에 작은 흰 줄이 있었다고 했다. 오래전 소방대원 제복의 표식과 비슷했다.
“그럼 옛 소방대원 가운데 범인이 있다는 거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아니야. 옷을 입은 사람이 있던 거야.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되는 게 아니듯.”
하르마는 우리를 바라보며 의외의 말을 했다.
“내가 그날 서명하지 않은 이유를 기억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꺼내도록 기다렸다.
“서류에 적힌 열두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는데, 대답한 건 아홉 명이었어요. 나머지는 이미 죽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 근무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원을 사망 처리하라고 했죠.”
“그 사람을 봤습니까?”
“얼굴은 몰라요. 나무 칸막이 건너에서 목소리만 들었습니다. 말투는 기억나지만 법정에서 누구라고 가리킬 자신은 없어요.”
이 진술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었다. 사망자 명단은 화재로 확인된 시신의 목록이 아니라 근무 명부를 잘못 사용한 것일 수 있었다. 우리는 기존 생존 네 명과 가족이 사망을 주장한 두 명, 미확인 여섯 명을 다시 나눠 검토하기로 했다.
폐허 근처의 양조장 주인이 오래된 외상 장부를 내놓았다. 삼 년 전 화재 다음 날 소방대원이 아니라 제삼 결제소 서류 운반원 한 명이 숙박비를 냈다는 기록이었다.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고, 짐의 무게는 '가벼운 상자 두 개'라고 되어 있었다. 돈은 현금으로 지급됐다. 나는 이것이 범행의 증거가 아니라 화재 뒤 물건이 이동한 경로를 밝힐 수 있는 단서라고 적었다.
그날 오후 에리카는 아버지의 생전 마지막 출장명령서를 꺼냈다. 공식 업무지는 군무청 창고였고, 종료 예정 시각은 첫 번째 화재 경보보다 두 시간 빨랐다. 그녀는 오래도록 그 시간표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떠날 예정이었네요.”
“예정과 실제 이동은 다를 수 있습니다.”
“알아요. 오늘은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나는 그녀에게 두 번째 화재가 어떤 경위로 번졌는지 추가 조사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에리카는 눈물이 고이는 대신 기록을 천천히 봉인했다. 나는 그것이 더 강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울고 어떤 날은 종이를 접는 법이었다.
그때 에리카가 낡은 돌계단 앞에서 뒤돌아봤다. “이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전 오늘 큰일을 한 것 같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삼 년간 닫혀 있던 공간이 열린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무엇을 숨겼는지 묻는 길은 열릴 수 있었다.
해질 무렵 안전 담당자가 바닥 판 일부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허가했다. 검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막혀 있었지만 틈 안에서 낡은 나무 상자가 보였다. 상자 겉면에 찍힌 숫자는 '40'이었다. 모두가 사망 보상금 은화 마흔 닢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무 상자의 실제 크기를 보니 은화 사십 닢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다.
상자를 꺼내자 안에서는 돈 대신 낡은 노동자 이름표와 빈 지급 봉투가 나왔다. 봉투에는 '결제소 이관'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일제히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돈이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현금을 지급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이건 아직 사건의 절반입니다.”
루카스가 봉투를 넘기다 멈췄다. 안쪽에서 작은 접이식 지도 한 장이 나왔다. 지도는 창고나 금고가 아니라 왕궁 지하로 이어지는 구리 관의 단면도였다.
세 번째 문과 네 번째 구리선은 같은 모양의 봉인표를 쓰고 있었다.
“종소리 장치가 원래 사람을 구조하려고 만들어졌던 걸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도의 끝에 적힌 이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검수 책임자: 벨란. 승인 상태: 보류.’
아버지의 성이 또 한 번 등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백히 승인하지 않았다는 표기가 함께 있었다.
제5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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