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2화
PAYLUA ORIGINAL · 제52화

52화. 이름을 빌려드립니다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757자

오프라인 책장
다음 날 아침 왕궁 앞에 내 얼굴이 그려진 광고판이 세워졌다. ‘세금 징수관 강태준도 이용한 귀환 검증!’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광고판을 떼어 버리는 게 아니었다. 그림 아래의 판매자 주소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욕을 했다. 어떤 사람은 재무청 직원들이 광고에 동의했으니 관청 앞에 세워진 거라고 믿었다. 어떤 노인은 내 이름을 쓰면 실종된 손자를 찾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가 이 서비스를 이용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저는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림이 닮았잖소.” “그림이 닮았다고 제가 판 건 아니니까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 세무조사관으로 일할 때 명의도용 사건을 수도 없이 봤다. 이세계에서는 내 얼굴을 그림으로 그려서 세금을 걷는다는 소문을 팔고 있었다. 범죄의 기술은 달라도 사람의 욕심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브란트는 광고판을 세운 목수를 찾았다. 목수는 새벽에 돈을 받고 설치한 사실을 인정했지만 의뢰인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보수는 은화 네 닢, 그중 두 닢은 이미 받았고 나머지 두 닢은 종루 뒤편 우편함에서 받기로 돼 있었다. 나는 그에게 범인으로 몰리지 않도록 진술서와 보수 수령 사실을 구분해 적었다. “남의 이름을 파는 줄 알았다면 안 했을 겁니다.” 목수가 말했다. “그 사실도 조사하겠습니다. 광고를 설치한 일과 거짓 정보를 기획한 일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사이 에리카는 뒤편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이 자동 승인에 사용됐다는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 누군가 공청회에서 그녀가 말했던 '제 글씨부터 대조하세요'를 '자백했다'로 바꿔 전하고 있었다. “제가 공개 해명하겠습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본인에게 맡길 일입니다. 증거자료와 법원 명령을 함께 준비하죠.” 그녀는 군중 앞에 섰다. 목소리가 떨리는 순간도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은 승인 요청, 법원이 중지시킨 인장 사용, 아직 확인되지 않은 입력 주체를 차례로 설명했다. 그 뒤 한 시민이 소리쳤다. “아버지가 그 일을 하셨다면서요! 그럼 딸도 똑같은 거 아닙니까?” 에리카는 침묵했다. 나는 끼어들고 싶었지만 그녀가 먼저 대답했다.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자료로 판단해야 합니다. 제가 한 일은 제 기록으로 판단해 주세요.” 군중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내게 그 대답은 왕실 어떤 선언보다 중요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의 딸이라는 이유로 권한을 물려받을 수는 없었고, 의심도 유전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북쪽 중계 창구를 다시 찾았을 때 리엔 모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결제소 직인 세 개와 직원 급여명부를 내놓았다. 청구서가 원래 결제소 직원의 손에서 나간 것인지 확인하라는 의미였다. “당신이 문서를 내주면 책임이 없어지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아뇨. 다만 어떤 책임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였지만 그 말은 옳았다. 명부에는 '벨란'이라는 수령자 서명이 없었다. 대신 세 달 전에 신설된 항목 하나가 있었다. 외부 서명 교정 업무, 도급 담당 'B-란'. 옆에는 사람 이름 대신 업무명 코드가 붙었다. 리엔은 그게 실제 개인과 계약한 것이 아니라 가문 기록을 참조하는 일괄 처리 코드라고 설명했다. “그럼 에리카의 성이 아니라 처리 코드일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걸 누가 사람 이름으로 바꾸었는지는 모르죠.” 서명 영수증을 다시 살펴보니 '벨란' 앞 글자의 잉크가 뭉개져 있었다. 티르센은 문서 뒷면에 남은 압흔과 실제 획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누군가 인쇄된 처리 코드를 사람의 서명처럼 보이도록 덧쓴 흔적일 수 있었다. 확정 감정은 아니었다.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어제 에리카 님을 의심했던 사람들이 다 틀린 거예요?” “아직 자료가 부족해. 다만 성만으로 의심한 사람들은 근거가 부족했다는 걸 알려줄 수 있지.” “그런 건 왜 다들 바로 안 믿어요?” “이름은 쉬워 보이거든. 원본은 찾으러 가야 하고.” 점심에는 라니아가 귀환 청구서를 받은 가족들과 작은 간담회를 열었다. 광고판에 속아 돈을 빌린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다행히 아직 수수료를 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자 약속을 하고 빌린 돈이라 돌려줄 방법을 몰라 했다. 우리는 대부업자에게 계약서 사본을 요청했다. 왕국의 고리대금 규정이 적용되는지 법원 상담을 연결했다. “그 사람도 나쁜 사람입니까?” 가족이 물었다. “누가 나쁜 사람인지보다 빚의 조건이 적법한지 먼저 볼 겁니다.” “다들 돈부터 내라는데 당신은 맨날 서류부터 내라고 하네요.” “둘 다 싫은 말이긴 하죠.” 그 가족이 웃었다. 웃을 여유가 생긴 것이 작은 다행이었다. 에리카의 설명을 들은 뒤 재무청 마당에 남아 있던 한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증서 판매원도, 귀환 신청인도 아니었다. 사망 처리된 노동자 가족에게 글을 읽어 주던 마을 교사였다. 그녀는 귀환 광고에서 이상한 표현을 봤다고 했다. “아이들이 배우는 글쓰기 교본에 없는 말이에요. '반송 인도'라는 말을 사람에게 써 놨거든요.” “원문에는 물건을 돌려보낸다는 뜻이죠.” “그런데 옆에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풀이가 붙어 있어요. 서로 다른 말을 같은 뜻처럼 읽게 만든 겁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보여 준 낡은 그림책을 내놓았다. 책에는 여행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면과 잃어버린 상자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장면이 서로 다른 문자로 표현돼 있었다. 이 작은 차이를 아는 아이들도 광고에서는 두 뜻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나는 교사에게 자료 제출 의사가 있는지 묻고 원본을 돌려줬다. 공립학교 교본은 여러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사소한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그 말 때문에 은화를 내고 있었다. 단어 하나가 매출을 만드는 방식은 한국의 허위 과장 광고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떠난 뒤 기자 한 명이 나를 붙잡았다. 아침에 내 얼굴이 그려진 광고를 찍었던 바로 그 기자였다. “그럼 징수관님은 귀환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만 하면 기사가 안 되죠.” “그렇다면 확인된 사실을 기사로 써 주세요. 광고 판매자는 왕실의 인증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건 재미없어요.” “재미없는 사실 때문에 돈을 잃지 않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기자는 한동안 나를 보더니 수첩을 폈다. 그가 적은 제목은 '왕실 인증 없는 귀환 상품'이었다. 세상에는 재미보다 중요한 제목이 있는 모양이었다. 에리카는 기사보다 기자의 질문을 오래 생각했다. 퇴근길에 그녀가 물었다. “정말 귀환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말을 사람들이 계속 들으면, 누군가는 당신을 거짓말쟁이라고 하겠죠?” “할 수 있죠.” “그렇게까지 고향이 그립습니까?” 나는 한국 집 현관이 어떤 소리를 냈는지 수첩에서 확인했다. 얼마 전부터 그 소리를 직접 떠올리기 어려웠다. 글자를 읽으면 당시 감정은 조금 돌아왔지만, 그 소리가 실제로 어땠는지는 확신이 없었다. “그립습니다. 하지만 고향에 돌아갈 표를 사느라 여기 사람 이름을 넘길 수는 없어요.” “그 말은 마음에 들어요.” “기록할 겁니까?” “아뇨. 이번에는 그냥 기억하려고요.” 나는 잠시 길가 가판대에서 팔리는 오래된 왕국 지도를 봤다. 지도에는 돌아갈 수 없는 항구가 표시돼 있었다. 다리가 무너져 지금은 쓰지 않는 길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지워진 항구를 보고도 길이 한때 있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내가 돌아갈 길도 혹시 그런 곳에 있을까 생각했다. 지도 장수는 새 지도를 권했지만 나는 사지 않았다. 살 수 없는 길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귀환 증서를 파는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걸었다. 왕궁 근처 가게에서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났다. 나는 한국에서 먹던 빵을 떠올리려다가 그만뒀다. 지금 먹는 빵의 맛을 처음부터 잃어버릴 필요는 없었다. 라니아는 그날 상담 신청서의 뒷면에 무료 신고 창구 주소를 적어 나눠 줬다. 종이를 받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돈을 내지 않아도 서류를 접수할 수 있다는 설명에 조금씩 줄을 섰다. 나는 한 사람씩 이름을 확인하면서 어디까지가 민원이고 어디부터가 수사 자료인지 구분했다. 신고했다는 사실 자체가 누군가의 유죄를 증명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시민이 제 목소리를 남길 곳은 있어야 했다. 오후에 북쪽 중계 창구의 창고를 열었다. 브란트가 지키고, 리엔이 결제소 쪽 열쇠를, 법원 보존 담당자가 법원 열쇠를 사용했다. 안에는 장부를 보관하는 평범한 상자가 여러 개 있었다. 가장 무거운 것은 귀환 수수료 접수봉투가 아니라 '미배달 편지' 상자였다. 출처와 수신인이 불명확해 배달하지 못한 서류들이 모여 있었다. 그 안에서 윤서아의 필사체가 보였다. 그녀가 옮긴 강태준 발음표와 일곱 자리 기호. 그 옆에는 나와 에리카 외의 세 사람 이름이 적힌 얇은 종이가 있었다. 이름마다 작은 칸이 두 개씩 붙어 있었다. 한 칸은 '당사자', 다른 칸은 '대체'. 나는 그 이름들을 읽고 심장이 뛰었다. 셀딘 라르크, 하르마, 오스윈. 모두 조사에서 만나거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저 사람들이 전부 신청했다고 보시면 안 됩니다.” 에리카가 먼저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감정관에게 명부의 작성 시기와 기계 판독 가능성을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 순간 벽장 안쪽에서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네일이 허리를 숙였다. “이건 신청자 명단이 아닐 수도 있어요.” 종이에는 다른 표제가 붙어 있었다. ‘후보 충돌 시 호출 순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명단이 아니라, 첫 번째 사람이 거절하면 두 번째에게, 두 번째가 거절하면 세 번째에게 계속 요청을 보내는 운영 계획처럼 보였다. 에리카가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거절을 오류로 처리할 수 있죠?” “거절이 권리라는 사실을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겁니다.” 세르나가 대답했다. 우리는 그날 밤 장치의 호출 순서만 봉인하고, 원본은 공동 보관했다. 그런데 사본을 만드는 중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하르마와 오스윈은 이름이 자필로 적힌 반면 셀딘 라르크 옆의 숫자만 기계로 눌러 찍혀 있었다. 그 숫자는 열한 번째 수정본의 끝 두 자리와 같았다. 누군가 오래된 명부에 최근 이름을 한 줄 끼워 넣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에리카가 벨란 감사관의 옛 장부를 펼쳤다. 그녀는 아버지가 가르쳐 준 방식으로 문서 가장자리의 접힌 순서를 살폈다. 가장 아래에 적힌 문장은 잉크가 아니라 눌린 자국이었다. '대체 신청인이 거절하면 신청을 반려할 것.' 나는 그 문장을 그대로 복사해 법원에 제출했다. 이것이 유효한 규정인지 검증해야 했지만, 적어도 무조건 다음 사람을 부르라는 명령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닐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광고판을 다시 봤다. 브란트가 철거 집행 결정서를 받아 판을 내리고 있었다. 목수는 증인으로 서서 자기 손으로 나사를 풀었다. 내 얼굴은 비를 맞아 엉망이 됐다. “명예가 훼손되는 기분이십니까?” 세르나가 물었다. “원래부터 잘생긴 그림은 아니었어요.” “그건 인정합니다.” “좀 너무 쉽게 인정하시는군요.” 에리카가 웃었다. 그날 아침 성난 사람들 앞에 섰던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환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기뻐할 시간은 짧았다. 우리가 궁으로 돌아오자 전송 중지 명령이 붙어 있던 인쇄기 아래에 작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공식 문서와 흡사한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대체 승인 2차 호출: 하르마. 출석 장소: 삼 년 전 군무청 곡물창고.’ 종이의 구석에는 내 얼굴이 그려진 광고판에 쓰인 같은 푸른 잉크가 번져 있었다. 누군가 사람들의 이름을 바꾸며 우리를 폐허로 불러내고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52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5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