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 벨란은 내 수첩에 적힌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대체 승인 신청인: 에리카 벨란]
처음에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두 번째에는 자기 이름을 손톱으로 짚었다. 세 번째에야 물었다.
“이게 보이는 사람은 당신뿐이죠?”
“지금까지는요.”
“그럼 당신 말이 거짓이라고 하면 그만이겠네요.”
“맞습니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어제까지 에리카는 아버지가 남긴 오래된 문서 때문에 의심받았다. 오늘은 내가 보고 있는,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장 때문에 의심받아야 했다. 그건 공정하지 않았다.
“수사 기록에는 제 관찰 진술로만 넣겠습니다. 당신이 신청했다는 사실로 적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요?”
“장치 자체가 내보낸 종이 기록이 있는지 확인해야죠.”
루카스가 등불을 들고 왔다. 문밖에서는 브란트가 야간 근무 교대 보고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에리카의 안전을 위한 경호를 부탁하기 전에 의견부터 물었다. 에리카는 경호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출퇴근을 감시하는 조치는 거부했다. 대신 공동 보관고에 있는 그녀 명의의 승인 열쇠를 잠정 사용 중지하고, 법원 추천 보존 담당자에게 별도로 검증을 맡기기로 했다.
“제가 제 이름을 쓸 권리까지 잃는 건 아니겠죠?”
“물론입니다. 누가 당신 이름을 도용하는지 확인하는 동안, 도용된 인장만 멈추는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 진실의 장부 가장자리에서 잔잔한 빛이 움직였다. 무언가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책상 서랍의 검은 천으로 장부를 덮었다. 덮는다고 사라지는 물건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내가 보지 않을 자유만큼은 누가 빼앗기 전에 먼저 행사하고 싶었다.
새벽 첫 종이 울리기 전 왕실 인쇄실에서 종이띠가 한 장 나왔다. 오렐이 출입명부와 함께 봉인한 채 가져왔다. 수신처는 재무청이 아니라 제삼 결제소의 검증 접수창구였다.
‘본인 승인 불가 시 등록 대리인 호출. 대체 신청인 성명 대조 완료.’
그 아래에는 작은 칸 두 개가 있었다. 왼쪽 ‘호출’에는 인쇄된 점이 있었고 오른쪽 ‘수락’은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점을 먼저 가리켰다.
“호출했지 수락한 게 아니군요.”
“기계 설명서대로라면요.” 네일이 말했다. “하지만 호출이 세 번 반복되면 자동으로 다음 단계에 넘어가는 우회 회로가 있어요.”
“그 우회 회로가 계약상 유효합니까?”
세르나는 아침부터 왕국과 마계의 오래된 협약을 펼쳐 놓고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조항은 없어요. 본인 승인에 대신할 수 있는 것은 동일인 확인을 위한 독립 증언뿐입니다. 대체 인물이 기억이나 권리를 인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럼 기계가 할 수 있는 일과 계약이 허용하는 일은 다르군요.”
“그 말, 당신 입에서 오늘만 벌써 다섯 번 들었어요.”
그녀는 말끝에 웃었지만 손은 종이를 꽉 쥐고 있었다. 마계 감사관도 이 기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법원에 긴급 보전 요청서를 냈다. 요청의 요지는 대체 승인 시스템을 파괴해 달라는 게 아니었다. 인쇄 명령을 내리는 전송로를 분리하고, 이미 접수된 기록은 양측 대표가 함께 봉인하되 누구도 기억과 신원 정보를 새로 입력하지 못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장치를 부수면 범행 흔적도 사라질 수 있었다.
법원 서기가 서류를 훑으며 물었다.
“청구인의 피해는 무엇입니까?”
“에리카 벨란의 신원이 본인 동의 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 이름을 가진 별도 후보 계정에도 자동 요청이 발생하고 있고요.”
“그 자동 요청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제 진술과 같은 시각에 생성된 인쇄띠의 일치 여부부터 감정해야 합니다. 직접 봤다는 이유로 법원이 믿어 달라는 청구가 아닙니다.”
서기는 고개를 끄덕였고 임시 재판장은 당일 한정으로 전송 중지 명령을 내렸다. 리엔 모브가 결제소의 대리인으로 출석해 이의를 제기했다. 업무가 멈추면 투자자 피해가 커진다는 주장이었다.
“사적 투자증서의 통상 지급 업무까지 멈추자는 건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문제가 된 후보 신원 호출 기능만 분리하고 나머지 거래는 별도의 감시하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편한 구분이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다면 왜 한 기계에 다른 사람의 재산과 기억을 함께 올려놓았는지 설명하셔야죠.”
법정이 조용해졌다. 나는 비웃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의 절박함을 담보로 사업을 꾸려 놓고, 그것을 멈추면 피해자가 생긴다고 주장하는 건 익숙한 수법이었다. 한국에서 본 부실 금융회사가 내세운 말과 닮아 있었다.
정오에 보존 명령이 도착했지만 현장에서는 이상한 문제가 생겼다. 인쇄기의 전송선 세 가닥 가운데 하나가 공식 도면에 없었다. 왕궁, 조폐소, 북쪽 초소로 연결된 세 갈래라는 설명과 달리, 실제 장치에는 아주 얇은 네 번째 구리선이 끼워져 있었다. 네일은 그 선을 잘라 버리려다 내 시선을 보고 손을 멈췄다.
“증거를 먼저 그려야겠죠?”
“길이, 연결부, 금속 가루까지요.”
우리는 기계를 끄지 않은 상태로 안전한 외부 계측만 했다. 회로 해체는 감정관 동석하에 다음 날 진행하기로 했다. 네 번째 선은 조폐소 쪽이 아니라 오래전에 막혔다던 지하 기록 관로로 이어져 있었다.
그 관로 끝에는 작은 회계실이 있었다. 문에는 삼 년 전 벨란 감사관이 사용하던 낡은 봉인표가 붙어 있었다. 에리카가 손을 뻗다가 멈췄다.
“아버지 것과 닮았어요. 하지만 저건 사망한 뒤에도 복제할 수 있는 물건이죠.”
“그래서 열지 않고 보전해야 합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제 이름을 지켜 주는 이유가 뭡니까?”
“이름이 도장보다 싸게 취급되면, 다음에는 누구 이름이 팔릴지 모르니까요.”
“그럴듯한 답이네요.”
“실제로는 동료가 억울하게 끌려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요.”
에리카가 짧게 웃었다. 아침부터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 사이 나는 재무청에 사람 이름을 다루는 규정을 따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왕실은 장부에 숫자가 틀리면 수정표를 발행하면서도 이름이 틀리면 직원 한 명의 구두 설명으로 끝내곤 했다. 루카스가 작성한 초안에는 세 가지 서명이 필요했다. 본인, 확인 담당자, 기록 보존 담당자. 에리카는 그 초안을 읽고 붉은 펜으로 한 줄을 덧붙였다.
'본인이 이의를 제기한 경우, 이의 내용은 원래 기록에 나란히 보존한다.'
“왜 정정만 하면 안 됩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기록을 고쳤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때가 있어요. 누군가 처음부터 잘못 적지 않은 것처럼 만들면 다음 피해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게 되니까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에리카의 부친이 남겼던 ‘서명 보류’를 떠올렸다. 누군가 그 글자를 지우기만 하면 세상에는 동의한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그렇다면 왕국의 장부는 사건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짓말을 영원히 보관하는 장치가 된다.
“규정은 제가 승인해도 됩니까?” 로웬이 물었다.
“내부 기록 처리 규칙은 재무청에서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기관의 법적 서명 효력은 의회와 법원이 별도로 판단해야 합니다.”
“당신은 왕실에서 가장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국고 잔액이 열일곱 금화일 때도 그랬습니까?”
“그때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저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까지 불행 목록에 추가했지요.”
루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웬도 끝내 입꼬리를 올렸다. 장부를 고치는 사람들에게도 웃을 일이 있어야 했다.
새 규칙을 적용할 첫 대상은 에리카의 대체 승인 기록이었다. 우리는 기존 인쇄 문구를 삭제하지 않았다. 바로 아래에 '당사자 신청 부인, 집행 정지, 입력 주체 조사 중'이라는 현재 상태를 붙였다. 그다음 에리카에게 문서 열람권을 주고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직접 표시하게 했다. 그녀는 자기 이름 옆의 '신청인'이라는 단어에만 줄을 그었다.
“누군가 제 이름을 넣은 사실은 남아야 해요. 제가 넣었다는 뜻만 없어져야 해요.”
그 짧은 차이가 오늘 우리가 일한 이유였다.
브란트가 돌아왔을 때는 공식 인쇄실의 전날 보초 명단을 가져왔다. 순찰은 네 번 있었고 마지막 근무자는 기계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썼다. 그런데 문지기는 종이 나오는 소리를 한 번 들었다고 했다. 둘 중 하나가 거짓말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자리가 다른 두 사람이 다른 소리를 들었을 수 있었다. 우리는 순찰 위치와 벽의 두께를 도면에 표시했다. 구리 관을 통한 진동이 어느 쪽에 전달되는지 다음 날 재현하기로 했다.
저녁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던 에리카가 먼저 물었다.
“그 장부에서 제 이름이 지워지면 이제 끝나는 건가요?”
“신원 도용의 시작이 막히는 거죠. 도용한 사람이 남아 있으면 다시 쓸 수 있어요.”
그녀는 침묵하다가 자기 인장집을 새 것으로 바꿨다. 이전 인장은 봉인했지만 폐기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명의가 어떻게 이용됐는지 설명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다.
오후에는 국경에서 온 소식이 있었다. 사망 처리된 노동자의 가족 두 사람이 같은 형식의 귀환 검증 청구서를 받았다. 기존 세 가정에 대한 청구 중지 명령이 있었는데도, 새로운 이름을 넣어 종이를 뿌린 것이다. 라니아가 청구서를 들고 관청 마당에 서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손에 종이를 움켜쥔 사람들이 있었다.
“이거 내야 죽은 사람이 돌아온대요.” 한 여성이 말했다. “은화 두 닢이라는데, 없어서 옆집에서 빌리려고 했어요.”
나는 청구서를 받아 뒷면부터 봤다. 아주 작은 글씨로 '미납 시 공적 기록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음'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실제 법적 근거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납부하지 마십시오. 신고하셨다고 가족 찾는 절차가 중단되지도 않습니다.”
여성은 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손을 풀지 못했다. 불법이라는 설명보다 혹시나 돌아올 사람을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더 무거워 보였다. 나는 그 종이가 왜 위험한지 설명하는 대신 먼저 그녀가 받을 수 있는 지원과 실종 조회 접수처를 안내했다. 라니아가 옆에서 무료 접수표를 적었다.
그날 새로 확인된 것은 청구 두 건의 유포 사실뿐이었다. 실제 금전 납부는 없었다. 우리는 기존 세 건과 별도 사건번호를 붙였다. 누군가 총액을 다섯 가정 열 은화라고 발표하려 하자, 나는 청구 총액과 납부액을 나눠 적게 했다. 겁을 먹은 사람들의 지갑이 비었다고 쉽게 가정할 수는 없었다.
저녁에 에리카가 공동 보관고에 자신의 공식 서명 견본을 제출했다. 인장 하나를 사용 중지할 뿐, 그녀의 직무 전체를 정지시키지 않는다는 법원 명령이 함께 붙었다. 루카스가 묻자 그녀는 말했다.
“조사받는 것과 죄인 되는 건 다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작은 쪽지를 건넸다. 아버지의 옛 봉인표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억해 두었던 숫자라고 했다. 봉인표 오른쪽 구석에 늘 들어가던 네 자리 관리번호. 오늘 지하 관로 문에는 그 숫자 중 가운데 두 자리가 뒤집혀 있었다.
“복제하면서 틀린 걸까요?”
“가능성은 있어요. 아버지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거든요.”
“아버지를 믿는 마음과 숫자가 틀렸다는 사실은 나눠 적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밤 열한 시, 봉인된 전송 회로에서 다시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아무도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 말만으로 기록을 지울 수는 없었다. 티르센은 종이를 봉투에 넣었다.
‘대체 승인 신청인: 에리카 벨란. 호출 실패.’
그 아래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찍혀 있었다.
‘제2 대체 신청인을 조회합니다.’
나는 창가로 달려가 종루를 보았다. 네 번째 종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지하의 낡은 구리 관이 아주 느리게 떨리고 있었다. 그 관에 손을 얹자, 누군가 내부에서 종이를 구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멈춘 것은 승인 하나였다. 누군가 준비해 둔 이름의 목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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