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란.'
수령자 칸에 남은 그 성을 본 뒤 에리카는 가장 먼저 자기 서명을 꺼냈다.
“제 글씨부터 대조하세요.”
나는 그 말에 잠시 놀랐다. 보통은 자신을 의심하는 절차를 뒤로 미루고 싶어 한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증언과 행동을 먼저 조사해 달라고 했다.
“의심받을 이유가 없는데도요?” 루카스가 말했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몰아가면 안 되니까.”
그녀는 서명을 했다. 날짜와 장소, 필기 도구까지 적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남긴 필적 표본을 따로 봉인했다. 두 사람이 같은 성을 가졌다고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죄로 이어지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법원 감정관 티르센은 수령 영수증의 글자가 에리카나 부친의 필적과 직접 일치한다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했다. 특히 끝부분의 곡선은 우연히 비슷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배송 기록의 수령 장소가 중요했다. 왕궁의 공식 기록실이 아니라 제삼 결제소의 북쪽 중계 창구였다.
“부친 성을 누군가 사용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다른 벨란이 있었을 수도 있어요.”
나는 감정 보고서에 그 두 가능성을 모두 남겼다.
그날 정오 왕실 공청회가 열렸다. 귀환 검증 수수료와 왕실 신용 수익권 증서가 엮이면서 피해자들이 서로의 사연을 알게 된 뒤였다. 노인은 자기가 산 종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다고 했고, 나디아는 불법 통행료 때문에 사업을 잃을 뻔했다고 말했다. 사망 처리된 노동자 가운데 생존 확인된 네 명은, 자신들이 입증해야 했던 것이 세금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했다.
“그럼 누가 이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줍니까?” 한 의원이 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숫자를 쏟아내지 않았다. 청구 금액과 실제 납부 금액, 계약 무효 판단과 환급 집행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제삼 결제소의 귀환 수수료 청구 세 건은 임시 집행이 중지됐고, 그중 실제로 납부한 사람이 있는지는 조사 중이었다. 신용 수익권 증서의 피해와는 성격이 달랐다.
“모든 피해를 한 금고의 금화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확인된 권리부터 회복하고, 누가 실제로 받았는지 추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라니아가 사망 등록 정정 접수표를 들어 보였다. 바넨의 기록을 정정 절차에 넘겼고, 나머지 생존 확인자도 같은 절차를 밟고 있었다. 최종 등록 정정은 심사 뒤에 이뤄지지만, 그동안 신청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취급되지 않게 접수 사실을 공개했다.
공청회가 한창일 때 리엔 모브가 직접 출석했다. 사람들은 소리쳤다.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제삼 결제소 대리인 자격으로 정식 서류를 내놓았다. 귀환 수수료를 승인한 기록에는 그녀의 인장이 없었고, 결제소가 유지해 온 정상적인 보관 대장에도 '사람의 기억'을 실제로 인출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승인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리엔은 손가락으로 새 계약서의 두 번째 면을 가리켰다.
“여기요. '외부 대조인이 본인 동의를 대신할 수 있다'는 부속 조항.”
“그 조항이 어디에서 나왔죠?”
“서류를 넘겨받을 때는 원본에 붙어 있었어요.”
“고대 공동협약에서는 대리 승인이 금지돼 있습니다.” 세르나가 말했다.
“그걸 몰랐던 건 아닙니다.”
리엔이 눈을 감았다.
“하지만 원본을 확인한 적도 없어요. 계약 운영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운영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법원의 비공개 증언을 요청했다. 신원이 밝혀지면 위험하다고 주장했지만, 위험의 구체적 근거는 비공개 심리에서 확인하기로 했다. 나는 답답했다. 그래도 공청회장에서 그녀를 몰아붙여 누군가의 이름을 얻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구 집행정지 명령은 유지됐다. 법원은 결제소가 계정 자료와 외부 대행 계약의 원본을 보전하도록 명령했고, 기록 조작 가능성이 있는 인쇄기는 독립 보관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강태준 이름표의 열한 번 수정 중 실제 출력된 것은 세 번이라는 잠정 기술보고서가 나왔다. 나머지 여덟 번은 편집 명령이었다. 날짜도 모두 삼 년 전이 아니라 최근이었다.
“그럼 아무도 삼 년 전부터 저를 기다리지 않았던 겁니까?” 나는 세르나에게 물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확인한 건 이 이름표의 제작 경위뿐입니다. 당신이 여기에 온 다른 이유는 아직 모르죠.”
그녀의 말은 늘 정확해서 답답했다. 하지만 내가 믿을 수 있는 종류의 정확함이었다.
공청회장에는 기자도 있었다. 그들은 내게 짧은 답을 요구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왕국의 돈을 언제 되찾는지, 마왕이 배후인지. 내가 누구라고 한마디만 말하면 다음 날 모든 신문에 실릴 질문이었다.
“오늘 확인된 사실은 자료로 공개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결국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는 뜻인가요?”
“책임을 묻기 위해서 책임의 범위를 확인하는 겁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범인이라고 부르면 진짜 책임자가 숨기 더 쉬워질 수도 있습니다.”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이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내 기사가 재미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왕국의 영웅이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가 이곳에서 배워야 할 것은 칭찬받는 방법이 아니었다.
공청회 뒤쪽에는 아까 실종된 아들을 찾는 노인도 앉아 있었다. 그는 귀환 증서를 증거 봉투에 넣어 왔다. 손을 들고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귀환이란 말 때문에 돈을 냈소. 그때 누군가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거든. 지금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소.”
나는 서류를 살폈다. 원래 실종 신고서에는 가족 이름이 공개되어 있었다. 누구든 쉽게 볼 수 있는 자료에서 아들의 이름을 베껴 왔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사실을 노인에게 설명하자 그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 아들은 아직…….”
“아드님의 생사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습니다. 누군가 그 이름을 안다고 해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울지 않았다. 다만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공청회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라니아는 노인이 나간 뒤 민원 창구에 새로운 안내문을 붙였다. '귀환 증서 구매 여부와 실종자 조사 접수는 별개입니다.' 그녀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실종자 신고를 포기하지 않게 하겠다고 했다. 나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법원에서 받아 온 부친의 예전 보고서 번호를 내게 보여 주었다. 삼 년 전 사망자 명단을 처음 문제 삼은 감사 보고서였다. 표지에는 '계약과 사람을 구별할 것'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우리는 감정되지 않은 내용을 확정 사실로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원본의 보존 상태와 기록실 출납 경로를 조사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어떤 말을 하셨을까요?” 에리카가 물었다.
“그건 제가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정말 그런 말만 해요.”
“하지만 당신이 무얼 해야 할지 묻는다면 답할 수 있어요. 내일도 지금처럼 자료를 확인하는 겁니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 웃었다.
“그건 아버지도 동의하셨을 것 같네요.”
나는 굳이 그렇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새 보고서의 첫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것을 지켜봤다. 누구도 대신 서명하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해가 질 때 왕궁 기록실로 돌아왔다. 루카스는 오늘 공청회에서 낸 수정표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총 승인 칠백이십 금화, 확인된 출금 사백팔십, 조폐소 보전 이백육십. 그는 돈을 찾지 못한 이백이십 금화 앞에 굵은 물음표를 썼다. 하지만 나는 원장에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손실액을 적지 말라고 말했다. 미확인 지급처와 실제 횡령 피해는 달랐다.
“그럼 이 편이 끝나도 돈을 다 못 찾는 거예요?”
“그렇지. 하지만 어디까지 찾았는지는 말할 수 있잖아.”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만큼 사람 이름도 이어서 적었다. 생존 확인 네 명, 사망 사실 별도 확인 중 두 명, 소재 확인 필요 여섯 명. 그가 그 표를 들고 걸어갈 때 나는 왕국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날 공청회에서 가장 오래 박수를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서류상 죽은 사람으로 처리됐던 바넨이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 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그걸 증명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 누가 제 이름으로 돈을 받았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그는 말할 때 손을 떨었다. 라니아가 물을 건네자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박수가 바넨의 용기를 격려하는 것에 머물기를 바랐다. 그가 이제부터 왕국의 모든 부정행위를 대표해서 싸워야 하는 사람처럼 소비되지 않기를 바랐다.
공청회가 끝난 뒤 바넨이 내게 다가왔다.
“당신이 전부 해결해 줄 겁니까?”
“제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록을 고치는 절차가 계속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럼 당신이 고향으로 돌아가도요?”
나는 대답하기 전에 에리카와 라니아를 돌아봤다. 두 사람은 새로 접수된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자기 수첩을 펴서 빠진 번호를 찾고 있었다.
“그래야죠.”
그날 나는 비로소 이 왕국에서의 성공을 다른 방식으로 상상했다. 내가 떠나자마자 모든 일이 무너지는 나라가 아니라, 낯선 징수관 한 사람이 없어도 서로의 이름과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나라. 국고를 채우는 것만큼 그런 절차를 남기는 일도 중요한지 몰랐다.
바넨은 가볍게 내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나는 그가 내게 구원을 맡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권리를 다시 주장할 힘을 찾았을 뿐이었다.
기록실에서 에리카는 작은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급식소 메라가 남은 재료로 만든 빵이었다. 이번에는 공무원이 선물을 받아도 되는 범위인지 확인된 공식 간식이었다. 루카스가 먼저 세 조각으로 나눴다.
“저는 장부 검사를 도운 대가로 하나 가져가도 되죠?”
“공식 간식 지급 명부에 있으면.”
“정말 그런 걸 적어요?”
“농담이야.”
에리카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내 기억에서 사라질까 두려운 것이 한국에서의 과거만은 아니었다.
밤에 에리카는 내게 아버지의 수첩 한 장을 건넸다. 옛 보관고에서 발견된 문구를 풀이한 개인 기록이었다. 정식 계약서가 아니니 사실 여부는 확인해야 했다. 나는 그 점을 먼저 적고 읽었다.
'귀환 계정은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다. 그것은 돌아오지 못한 자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한 공란이다.'
그 아래에 에리카의 부친이 남긴 주석이 있었다.
'누군가 이 공란에 사람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계정이 아니라 덫이 되었다.'
나는 수첩을 내려놓았다. 이 구절이 사실이라면, 원래의 장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 그 장치를 이용해 기억을 값으로 매기고 귀환을 거래로 만들려 한 것일 수 있었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추정이었다. 그런데도 내 손목이 아주 약하게 떨렸다.
[검증자 후보 요청 갱신]
[본인 인증: 미완료]
[대체 승인 요청 접수]
나는 한 번도 인증을 누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누르지 않았다. 대신 보이는 문장을 수첩에 옮겨 적고 그 순간의 시간과 장소, 목격 가능한 신체 반응을 구분해 기록했다.
그리고 마지막 줄을 보았다.
[대체 승인 신청인: 에리카 벨란]
“에리카.”
그녀가 뒤돌아봤다.
“혹시 제 이름으로 무언가 승인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 있습니까?”
“없어요. 왜요?”
나는 수첩을 보여 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요청서에 올라왔습니다. 당신이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책상에 있던 아버지의 오래된 필통을 닫았다.
“그럼 내일은 제 이름이 누구 손에서 쓰였는지 찾으면 되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길을 찾는 일도, 이곳의 사람을 지키는 일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누군가 내 귀환을 팔고 있다면, 그 계약에 도장을 찍을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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