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을 잡은 군무청 장교 앞에서 내가 먼저 한 일은 뒷걸음질이 아니었다.
“서류를 읽어볼 시간을 주세요.”
나는 오히려 도장을 찍은 부분을 가리켰다. 명령서에 적힌 발효일과 서명 날짜를 비교했다. 불법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었다. 왕이 전날 지시하고 다음 날 발효할 수도 있으니까. 문제는 서명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이 문서는 폐하가 직접 승인하셨습니까?”
장교가 답했다. “군무차관께서 왕실 명령이라고 전하셨습니다.”
“직접 확인하신 건 아니군요.”
“그렇다고 제가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확인하려는 겁니다.”
장교는 생각보다 빨리 손을 검에서 뗐다. 그는 내가 명령을 찢거나 욕설을 퍼부을 거라 예상했던 것 같다. 나는 명령서를 복사해 두고, 내일부터 조사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적었다. 대신 오늘까지 확보한 기록의 보존을 요청하는 문서를 첨부했다.
“이제 됐습니까?”
“제가 드릴 말은 전달했습니다.”
장교가 떠나자 에리카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이 여기서 검을 뽑았으면 우리는 끝이었어요.”
“알아요. 그래서 싸우지 않은 겁니다.”
“그럼 어떻게 조사해요?”
“임명한 사람에게 물어봐야죠.”
“국왕 폐하를 만나겠다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 하나가 왕의 뜻을 사칭할 수 있는 나라라면, 서류의 진위를 확인하는 가장 빠른 길은 당사자에게 가는 것뿐이었다.
물론 왕궁의 문은 평범한 공무원에게 쉽게 열리지 않았다. 수행비서가 내 임명장을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폐하의 알현 일정은 사흘 뒤까지 가득 차 있습니다.”
“사흘 뒤면 왕국 채무 만기일입니다.”
“국가 일정은 그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재무보고만 접수해 주세요.”
나는 미리 준비한 한 장짜리 보고서를 내밀었다. 복잡한 숫자를 늘어놓지 않았다. 국고 17금화, 칠 일 뒤 갚을 돈 8,000금화, 군무청 보관금의 불일치와 왕실 명령서 진위 확인 요청.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었다.
‘왕실이 누구에게 세금을 걷는지보다, 그 세금을 누가 가져가는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비서는 종이를 훑더니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접수됐습니다. 답변을 기다리세요.”
“접수 번호는요?”
“뭐라고요?”
“나중에 이 문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접수 번호를 적어주었다. 나는 그 번호를 수첩에 기록하고 왕궁 밖으로 나왔다.
사흘을 기다리면 끝이다. 따라서 기다리는 동안 쓸 수 있는 절차가 필요했다.
우리는 왕실 법전을 뒤졌다. 국왕 알현 조항 옆에는 오래된 규정 하나가 있었다. ‘왕실 징수관은 국가 수입의 급박한 손실이 예상될 때, 왕실 회계 앞에서 공개 계산을 신청할 수 있다.’
“이게 뭡니까?”
로웬이 눈을 크게 떴다. “예전에는 매년 국왕 앞에서 세입과 세출을 읽었습니다. 오래전에 폐지된 관례예요.”
“폐지된 법입니까, 관례입니까?”
그가 법전의 개정 기록을 더듬었다. “관례만 없어졌습니다. 조항은 살아 있네요.”
“그럼 신청합시다.”
“공개 계산을요?”
“네. 공개된 자리에서 우리가 확인한 숫자만 말하면 됩니다. 누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필요도 없고요.”
다음 날 오전 왕궁 외정에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왕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세관 앞에서 동전을 환불받은 채소 농부가 다른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서쪽 성벽의 일꾼들도 일을 멈추고 왔다. 그들은 종이 위 숫자가 자기 식판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고 싶어 했다.
반대로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한 남자는 내가 지나갈 때 소리쳤다.
“천민 앞에서 왕국의 재정을 논하는 건 왕권 모독이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세금은 누구 돈입니까?”
“당연히 국왕의 것이지.”
“그 돈을 내는 사람이 왜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면 안 됩니까?”
남자는 얼굴을 붉혔다. 뒤에서 누군가 웃었다. 나는 그와 언쟁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공개 계산이 실제로 열리느냐는 것이었다.
정오가 되자 은색 망토를 두른 청년이 회랑 끝에 나타났다.
공개 계산을 시작하기 전에 루카스가 나를 붙잡았다. 소년의 얼굴이 창백했다.
“저 사람들이 다 저희를 보고 있어요.”
“응. 나도 보여.”
“숫자를 잘못 읽으면 어떡하죠?”
나는 그의 공책을 받아 펼쳤다. 페이지마다 계산 흔적이 빼곡했다. 같은 숫자를 두 번 확인한 자국도 있었다.
“잘못 읽으면 정정하면 돼. 계산을 틀렸다는 이유로 사람을 처벌하는 곳이라면, 그게 먼저 잘못된 거야.”
“하지만 저쪽 귀족들은 틀린 숫자 하나로 우리를 쫓아낼 수 있어요.”
“그래서 출처를 함께 읽는 거지. 내가 말을 잘못할 수도 있으니까, 에리카와 네가 확인해 줘.”
그 말을 듣자 소년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공개 계산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나는 외정 가운데에 서서 수입과 지출의 뜻부터 설명했다. 사람들은 거창한 재정 용어보다 자기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듣고 싶어 했다.
“왕실이 여러분에게 걷기로 한 돈이 있습니다. 그러나 장부에는 받았다고 적힌 금액과 실제 국고에 들어온 금액이 서로 다릅니다. 오늘 제가 말할 것은 누가 죄인이라는 판결이 아닙니다.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를 조사하겠다는 요청입니다.”
군중 앞쪽에 있던 노파가 손을 들었다. 북문에서 안전기금 영수증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우리 돈을 돌려받을 수 있습니까?”
“법적 근거 없이 걷힌 돈이라면 환급 대상이 됩니다. 다만 누가 얼마나 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수증이 없는 사람은요?”
“영수증이 없어서 불리한 건 납세자가 아니라 영수증을 발급해야 했던 관청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기록과 목격자 진술을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젊은 군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 부대는 급료가 두 달째 밀렸습니다. 저희 돈도 장부 어디엔가 있습니까?”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지급 예정액이 잡혀 있는지는 오늘 자료로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급되지 않은 이유는 추가 조사해야 합니다. 확답을 드릴 수 없는 건 확답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실망이 지나갔다. 나도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조사하겠다’는 말이 가장 값싼 약속이다. 하지만 지금 거짓말로 환호를 얻으면 며칠 뒤 더 큰 절망이 돌아올 것이다.
외정 뒤편에서 귀족 하나가 비웃었다. “그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군.”
나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확정하지 않고 돈을 가져가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말을 마쳤을 때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처음으로 내 수첩을 요청했다. 내 손끝에 묻은 잉크와 구겨진 신고서들을 한 장씩 보더니 직접 읽었다. 시종들이 종이를 빼앗아 정리하려 했지만 그는 손짓으로 막았다.
“국왕인 내가 이 종이를 처음 본다는 사실이 부끄럽군.”
그 말은 군중의 함성보다 조용했다. 하지만 내가 이 왕에게 처음 기대를 건 순간이기도 했다. 국왕 아델리온. 예상보다 젊었다. 스물일곱쯤 되었을까. 얇은 얼굴에 피곤이 내려앉았지만 눈빛은 맑았다.
“내가 임명한 징수관이 맞나?”
“강태준입니다, 폐하.”
“드래곤에게 세금을 걷겠다고 했다지.”
“아직은 주소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은 짧았다.
“좋다. 그 전에 우리 왕국이 왜 이렇게 가난한지부터 설명해 봐라.”
나는 숫자를 읽었다. 국고 수입 예정 12,400금화. 실제 수납액 221금화. 북문에서 받은 돈 96금화 중 36금화의 보관 장소 확인 필요. 군량미 75포대의 행방 미확인. 결산 담당관과 견습이 확보한 원장 사본, 납세자 진술, 운송 명세서가 각각 무엇을 증명하는지도 나눠 말했다.
국왕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모든 서류를 하나씩 받아 넘겼다.
공개 계산이 끝날 무렵, 나는 왕의 얼굴에 망설임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숫자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알고도 외면했던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왕이 젊다는 사실은 면죄부가 아니었다. 왕실의 서명 하나로 사람이 굶을 수도 있었으니까.
아델리온이 내게 물었다. “그대는 왕이 모든 장부를 직접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모든 장부를 읽을 수는 없겠지요. 다만 읽고자 할 때 막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고서가 너무 많다. 하루에 올라오는 문서만도 수백 장이야.”
“그렇다면 중요한 숫자 몇 개를 매일 보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들어온 돈, 지급하지 못한 임금, 당장 결제해야 할 돈. 숫자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요.”
“왕을 위한 표를 만들라는 건가?”
“왕과 납세자 모두를 위한 표입니다.”
국왕이 턱을 괴었다. “국왕이 가진 정보를 백성에게 나누면 귀족들이 반대할 텐데.”
“반대할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국가가 무슨 돈을 받아 어디에 썼는지가 비밀이어야 하는 경우는 제한적이어야 하니까요.”
그때 귀족석에서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벽 보수대의 군량을 공개하면 적국이 약점을 알게 된다며 크게 외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구체적인 병력 배치와 방어 취약점은 보안이 필요할 수 있다.
“그래서 전부 공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민감한 군사 내용은 감추되 총지출과 지급 여부는 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마저 숨기면 모든 유용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가려집니다.”
아델리온은 잠시 생각하더니 수행비서에게 지시했다. “내일부터 국고 현금과 미지급 급료 총액은 매주 공고하라. 군사기밀은 담당관이 검토해 필요한 부분만 가리도록.”
외정에서는 작은 박수가 났다. 엄청난 개혁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공개된 숫자를 누군가 비교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거짓 보고의 비용은 높아진다.
나는 수첩에 그 명령을 적었다. 나중에 이 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도 오늘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남는다.
“그렇다면 누가 훔쳤다고 생각하나?”
“아직 범인을 특정할 수 없습니다. 지금 확인된 건 서로 다른 문서의 숫자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런데도 나를 불러낸 건가?”
“폐하의 이름으로 군무청 조사를 금지한다는 명령서가 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명하셨습니까?”
나는 명령서 사본을 올렸다. 아델리온은 그것을 보는 순간 표정이 딱딱해졌다.
“나는 이 문서를 본 적도 없다.”
외정이 술렁였다. 군무청 장교는 멀리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는 손을 들어 군중을 진정시켰다.
“그럼 국왕의 인장은 어떻게 찍힌 겁니까?”
국왕은 신하들을 돌아봤다. “왕실 인장 보관실의 출입기록을 가져와라.”
잠시 뒤 젊은 시종이 출입기록을 가져왔다. 명령서에 찍힌 날짜에 보관실을 열었던 사람은 군무차관 레온하르트의 보좌관이었다. 기록상 목적은 ‘군수비 결산 인장 대여’.
“이제 사람을 체포할 수 있습니까?” 로웬이 속삭였다.
“아직요. 인장 사용 권한이 어디까지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국왕이 그 말을 들었다. “왜 그렇게까지 신중하지?”
“잘못된 사람을 잡아넣으면 진짜 서류를 만든 사람이 숨어버릴 테니까요.”
국왕은 한참 나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태준 징수관. 왕실 감사원을 다시 열겠다. 그대는 임시 감사권을 받아 국고와 군무청 회계를 대조하라.”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국왕이 덧붙였다.
“단, 죄가 입증되기 전엔 누구도 처벌하지 마라. 네가 말한 절차를 지켜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국왕은 새 명령서에 직접 서명했다. 에리카는 내 옆에서 숨을 삼켰다. 루카스는 손을 너무 세게 쥔 탓에 펜대를 부러뜨렸다.
그 순간 외정 반대편에서 비웃음이 들렸다.
“서명 한 장으로 돈이 생길 것 같나?”
청동색 지팡이를 쥔 노인이 걸어 나왔다. 청동왕관 상단 대표 마르켈이었다. 나는 게시판에 붙은 채무계약서에서 그의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만기는 이제 사흘 남았습니다. 8,000금화를 갚지 못하면 왕국의 조폐권은 우리에게 넘어옵니다. 감사원이 문을 열든 말든 계약은 유효하지요.”
아델리온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노인을 바라봤다. 그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파란 새는 곡물창고에서 본 인장과 같았다.
“대표님. 채권 회수도 좋지만, 군무청과 체결한 밀 매입 계약의 대금은 지급하셨습니까?”
마르켈의 미소가 사라졌다.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건가?”
“420포대, 금화 1,260닢짜리 계약이요.”
그는 답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반응한 건 마르켈이 아니라 국왕이었다.
“그 계약서에는 내 인장이 없어야 한다.”
“왜 그렇습니까?”
“그 밀은 판매한 적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나는 수첩을 닫았다. 첫 감사 대상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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