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소의 불을 끄고 돌아온 날, 왕국에서는 왕이 열쇠를 달라고 했다.
내가 아니라 보존고 관리인 오렐에게 한 말이었다. 아델리온 국왕은 왕궁 깊숙한 곳에 있는 오래된 기록장을 직접 열어 보겠다고 했다. 왕실 소유이니 당연히 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폐하.” 내가 끼어들었다. “조사 중인 보관함은 왕국 재산과 다른 사람의 권리가 섞여 있습니다.”
“내 궁전의 방인데도?”
“그렇습니다. 소유하는 건물과 안에 맡겨진 물건의 주인은 다를 수 있습니다.”
왕은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옆에서 로웬이 얼굴을 감쌌다. 왕에게 물건을 함부로 열 수 없다고 말하는 관리가 귀하다면, 그건 왕국의 자랑이 아니라 문제였다.
아델리온은 마침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럼 내가 무슨 권한으로 여기 있는 거지?”
“공공장부가 제대로 관리되도록 명령할 권한은 있습니다. 원본을 마음대로 고치지 않는 게 그 권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는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아직은 조금 무서웠다.
왕실 기록장의 열쇠는 세 개였다. 왕실 대표, 법원 대표, 보관 담당자가 각각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열렸다. 그런데 한 자리가 오래 비어 있었다. 삼 년 전 벨란 감사관이 화재 조사에 참여한 뒤 사망하면서, 독립 감시용 열쇠가 교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부터 왕실과 보관 담당자 둘만으로 문을 연 기록이 세 번 있었다.
“그 기록이 전부 잘못된 겁니까?” 로웬이 물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비상 개봉 조항이 있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이 없었다는 문제는 남아 있죠.”
아델리온은 국정 회의에서 독립 보존 담당자를 다시 임명하라고 명령했다. 친왕파도 반왕파도 아닌 법원 추천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자리를 만들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고, 끝내 짜증을 내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왕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게 뭡니까?”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는 법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그 다음은?”
“그 돈이 누구 것인지 확인하는 법입니다.”
왕이 크게 웃었다. 로웬은 웃지 않았다. 다행히 그 뒤에야 재무대신도 작게 웃었다.
왕의 면담이 끝난 뒤에는 제삼 결제소의 청동왕관 상단 관계자가 들어왔다. 마르켈이었다. 그는 과거 대출금 팔천 금화를 이미 상계했다는 법원 판단을 언급하지 않고, 새 계약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지금이라면 나라를 도울 수 있습니다. 이백육십 금화는 그대로 두고, 그 금고를 담보로 필요한 현금을 먼저 공급하죠.”
로웬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겨울용 밀과 경비병 급여를 걱정하는 대신에게 그런 제안은 유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약서에서 가장 작은 글씨를 먼저 읽었다. 만기가 지나면 담보 소유권이 상단에 자동 이전된다는 문구였다.
“그 돈이 누구 것인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법원에서 정하면 되지요. 그때까지는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겁니다.”
“판결이 나기 전에 관리하는 권한 자체가 문제입니다.”
마르켈은 입꼬리를 올렸다.
“늘 그렇게 말해서 왕국이 가난한 겁니다.”
“가난해서 남의 돈을 쓸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이군요.”
“아닙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나누겠다는 겁니다.”
나는 시장 허가 수입, 적법하게 수납된 거래세, 이미 승인된 지출의 집행 상황을 왕에게 보고했다. 지금의 왕국은 새로운 돈줄이 필요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현금을 장부에 적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아델리온은 마르켈의 제안을 받지 않았다. 상단 대표의 눈빛이 달라졌다.
“왕께서는 정말 저 낯선 징수관을 믿으십니까?”
왕은 대답 대신 계약서를 다시 밀어 놓았다.
“내가 믿는 건 법원의 보존 명령이다. 그 명령은 나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왕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복도로 나왔을 때 마르켈이 따라왔다.
“왕국을 살리고 싶다면서 왜 돈을 마다합니까?”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어떤 돈이든 괜찮다는 말은 다릅니다.”
“당신은 언젠가 후회할 거요. 이 세계는 영수증으로 움직이지 않소.”
“그렇죠. 하지만 영수증이 있어야 누가 누구의 돈을 가져갔는지 따질 수 있습니다.”
그는 답하지 않았다. 내가 이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단은 여전히 부자였고 왕국의 상인들은 빚을 갚느라 바빴다. 장기적으로 적법한 세입을 늘리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위험을 분산하지 않으면 국고는 다시 비게 된다. 나는 돌아와 별도의 재정 개혁 목록을 만들었다. 한 번의 계약 분쟁에서 승리하는 일과 나라를 운영하는 일은 다른 일이었다.
에리카가 내 책상 옆에 앉았다.
“당신이 처음 왔을 때는 금화 열일곱 닢만 있었습니다.”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모든 돈을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어느 돈을 쓸 수 없는지는 알게 됐죠.”
“듣고 보니 슬픈 발전이군요.”
“그래도 발전이에요. 예전에는 금고를 열기만 하면 왕국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나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소설 속 나라라면 금고에서 보물이나 신탁이 나와야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왕국에서는 금고를 봉인한 덕분에 지켜진 사람이 있었다. 투자자가 자기 권리를 주장할 시간을 얻었고, 상인들은 누군가의 돈을 담보로 빚을 더 지지 않을 수 있었다.
루카스가 창가에서 말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저 금화가 궁금해요.”
“나도.”
“언제 열어요?”
“이미 열어 실물은 확인했잖아. 소유를 확정할 때까지 쓰지 않는 거지.”
“그럼 금고가 이렇게 오래 열려 있어도 돈을 못 쓰는 건 처음 보네요.”
“나라 재정에서 중요한 건 잠긴 금고보다 누가 열 권리가 있느냐는 거야.”
루카스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나는 멋진 명언처럼 들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언젠가 관리자가 됐을 때 실제로 그 원칙을 지켜 주기를 바랐다.
우리가 보존 중인 조폐소 금화 이백육십 닢에 대한 이해관계 신고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제삼 결제소는 관리 비용을 주장했고, 투자증서 구매자들은 피해 회복 재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화를 물리적으로 발견했다고 곧바로 어느 쪽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왕실 승인 칠백이십 금화 가운데 확인된 출금은 사백팔십, 그중 실물 보관은 이백육십. 나머지 이백이십의 지급처와 미출금 이백사십을 뒤섞으면 장부는 순식간에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백육십이면 시장을 다시 살릴 수 있지 않소?” 로웬이 조심스레 물었다.
“소유권을 정하지 않고 쓰면 다른 사람의 돈으로 시장을 살리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깁니다.”
왕은 그날 금화 상자를 열지 않았다. 대신 시장 수입과 부가세 면제 범위를 다시 계산하라고 지시했다. 세금을 늘리지 않고 당장 지킬 수 있는 생계가 있는지 확인하자는 뜻이었다.
라니아는 급식소의 공급표를 들고 왔다. 지난번 승인된 식량비 두 금화는 실제로 지출됐고, 임금 여섯 금화는 스무 사람에게 은화 예순 닢으로 지급이 완료됐다. 하지만 전체 체불액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누군가 그 금액을 모두 해결한 것처럼 홍보물을 만들어 붙였다는 소식도 있었다.
“이 문구를 떼어도 될까요?” 라니아가 물었다.
“지급 완료한 부분은 유지하고, 남은 금액은 따로 쓰죠. 잘한 일까지 지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녀는 새로운 공고문을 붙였다. '확인된 스무 명에게 부분 임금 지급 완료. 나머지 체불 신고 계속 접수.' 나는 그것이 정치인 백 명의 연설보다 왕국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 질 무렵 법원은 귀환 수수료 관련 자료 제출명령을 내렸다. 제삼 결제소가 청구 권한의 근거와 수취 계좌를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리엔 모브는 서면으로 대응했다.
'당사는 귀환 계정 관리의 단독 승인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단독 승인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건 공동 승인이나 대행 권한을 주장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확답을 안 했네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법정에서 자기가 주장한 범위가 남았습니다. 그건 나중에 중요해요.”
로웬은 마르켈이 보관 금화 일부를 담보로 새 대출을 제안했다고 보고했다. 나는 곧바로 반대 의견을 냈다. 소유권 다툼 중인 돈을 다시 담보로 잡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척 새로운 문제를 만드는 일이었다. 왕은 제안을 보류했다.
오렐이 과거 개봉 기록을 가져오기 전에 나는 재무청 직원들과 작게 회의를 열었다. 왕실 보관고를 제대로 운영하는 문제는 검은 깃털 사건을 해결해도 남을 일이었다.
“이제부터 열쇠가 세 개가 되면 문을 열 때마다 세 명을 불러야 합니까?” 기록 담당자가 물었다.
“원칙은 그렇습니다. 긴급 구조나 화재 때는 따로 정해진 예외 절차가 필요하겠죠.”
“서류 하나 꺼내려고 이렇게 오래 기다리면 일이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서류를 같은 금고에 넣지 말아야죠. 업무용 사본과 민감한 원본을 나누고, 접근 기록을 남기면 됩니다.”
우리는 왕국에서 처음으로 보존 수준을 세 단계로 나눴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공개 회계 보고, 담당자의 출입이 필요한 세부 증빙, 법원 명령과 공동 입회가 필요한 봉인 원본. 모든 문서를 비밀로 만드는 것이 좋은 보안은 아니었다.
“그럼 급식소 밀가루 영수증은 어디에 넣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공개 보고에 집계하고, 개인 공급자의 개인정보는 보호해야지.”
“밀가루 한 포대에도 비밀이 있군요.”
“밀가루는 비밀이 없는데, 그걸 파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있잖아.”
루카스는 그 말을 기록했다. 에리카는 관리 표를 두 장 더 만들었다. 왕실 재정을 국민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내용과, 남용을 막기 위해 보호해야 하는 내용의 경계를 그었다.
저녁에 로웬이 말했다.
“이 모든 절차가 끝나면 왕국의 적자는 줄어듭니까?”
“바로 줄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같은 돈을 세 번 지출한 것으로 착각하는 일은 줄겠죠.”
“적어도 그건 필요하군.”
“그리고 누군가 돈을 빼내더라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 제도가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절차는 지켜지는 날보다 무시되는 날에 진짜 가치가 드러난다. 독립 열쇠를 다시 만든다고 해서 그걸 가진 사람이 항상 정직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남기는 기록에는 누가 열쇠를 가졌는지만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문을 열었는지도 있어야 했다.
회의실 문을 나설 때 아델리온 국왕이 나를 다시 불렀다.
“그대가 떠나면 이 왕국은 또 옛날로 돌아갈까?”
“제가 떠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절차를 제 이름으로만 유지하면 그렇게 되겠죠.”
“그럼 누구 이름으로 남겨야 하지?”
“그 일을 맡은 사람의 이름으로요. 권한도 책임도 함께 남도록.”
그는 빈 종이를 한 장 받아 새 보존 규정의 검토 지시를 적었다. 왕의 서명을 아무런 비용 없이 얻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규정을 만드는 데도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왕은 금고의 자물쇠 대신 기록을 고치는 일을 선택했다.
그날 밤 오렐이 세 번째 열쇠 자리의 과거 개봉 기록을 가져왔다. 삼 년 전 날짜 가운데 하나가 눈에 띄었다. 벨란 감사관의 사망 신고가 접수된 뒤, 그 이름으로 개봉 허가가 찍혀 있었다.
“고인이 서명했다는 겁니까?” 루카스가 숨을 삼켰다.
“그렇다고 단정하지 마. 날짜가 잘못 입력됐을 수도 있고, 뒤늦게 기록됐을 수도 있어.”
나는 감정과 원본 대조를 지시했다. 그러나 이 문서에도 네 개의 검은 깃털이 찍혀 있었다. 보존 담당자가 없어진 틈을 누군가 이용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불쾌한 점은 그날 개봉된 서랍의 이름이었다.
'외부 검증자 후보 명부.'
내 이름이 적힌 종이는 그 명부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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