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전 문서에 최근의 승인 인장이 찍혔다는 감정 결과가 나오자, 왕실 사람들은 일제히 누군가의 이름을 요구했다.
나는 그 말을 막았다. 같은 종류의 용액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최근에 도장을 찍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용액의 제조 기록과 유통 시기를 대조해야 했다. 오래된 문서에 새 인장이 찍힌 경위도 문서 보존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 있다.
“범인을 정해 놓고 수사하지 말자는 거죠.” 브란트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확인해야 할 경로가 아주 좁아졌습니다.”
왕실 인장 보관실에는 공인 용액 수령대장이 있었다. 최근 두 달 사이 같은 성분이 들어간 용액을 받은 부서는 네 곳. 그중 하나는 군무청 자금과였고 다른 하나는 재무청 기록실이었다. 에리카는 당장 재무청 직원들의 출입기록부터 제출하자고 했다. 자신들이 빠지면 조사 결과를 믿기 어렵다고 했다.
“당신도 의심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서 기록을 남기는 거예요. 아버지가 가르친 방식대로요.”
그 말이 좋았다. 공정한 절차는 상대만 묶기 위한 그물이 아니라 내 손도 묶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스윈은 그날 다시 찾아왔다. 그는 감정 결과를 보더니 이미 예상한 듯 창밖을 바라봤다.
“삼 년 전 내가 봤던 인장은 이것과 달랐소.”
“당시 표본이 있습니까?”
“없소. 다만 보증 관리인 대리가 쓰던 잉크는 물에 닿으면 푸르게 번졌지.”
“기억만으로 물증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알고 있소. 그래서 고백이 아니라 기록을 찾으러 왔소.”
그는 당시 자신이 인수했던 광산 변경서의 사본 발급 대장을 제시했다. 발급 번호를 정리한 누군가가 세 번째 깃털 인장을 찍은 다음 네 번째 칸을 비워 두었다. 오스윈은 서명을 보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왕실에는 이미 채굴 변경 허가가 승인된 것처럼 통지됐다고 했다.
“당신이 거절했는데 승인 통보가 나갔다면 왜 막지 않았습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막으려 했소. 하지만 나는 그때 재무대신 자리에서 물러나는 중이었고, 벨란은 화재로 죽었지.”
“그 사정이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오스윈은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이 적법한 소명이 되는지 판단할 기록부터 확보하기로 했다.
우리는 지하 정산실의 장치를 다시 검사했다. 네일은 구리 관에 연결된 작은 마력 톱니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법정이 허락한 것은 외부 측정뿐이었다. 기계의 일련번호를 겉에서 확인하자 이상한 사실이 나타났다. 삼 년 전 조폐소 부품 주문의 번호와 한 자리 차이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한꺼번에 주문한 장치를 서로 다른 장소에 썼을 수 있습니다.” 네일이 말했다.
“어떤 장소입니까?”
“조폐소와 왕실 정산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세르나는 그 세 번째 장치가 마계 국경에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옛 조약의 설계상 양측 장부를 동시에 대조하기 위해서는 최소 두 개 이상의 단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확인된 건 왕실과 조폐소 관련 흔적뿐이었다.
정산실 장치의 일련번호를 확인하던 날, 작은 사고가 있었다. 오래된 종루에 매달려 있던 구리 고리가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떨어진 위치는 서기가 기록을 정리하던 책상 바로 옆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누가 일부러 떨어뜨린 것 같습니다!” 경비병 하나가 소리쳤다.
나는 곧장 천장을 올려다봤다. 고리의 나사가 부식돼 있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부식된 것인지 누군가 느슨하게 만든 것인지는 현장 감정이 필요했다. 브란트는 안전선을 설치하고 출입을 제한했다.
“만약 방해라면 수사를 멈춰야 합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수사는 계속하되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는 지하 정산실의 실측 조사를 일시 중단하고 그동안 모은 문서의 대조 작업을 지상으로 옮겼다. 서류는 세르나와 리엔, 왕실 측이 서명한 인수표를 따라 옮겨졌다. 모든 짐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셋이 따로 계산했다. 구리 관을 다루던 기술자는 지상으로 올라온 뒤에야 손을 떨었다. 정말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급료를 더 받으려는 게 아닙니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면 안전 기준부터 바꿔 주세요.”
“당연합니다. 일할 권리에는 무사히 돌아올 권리도 포함됩니다.”
브란트는 헛기침했다. 장부를 조사하는 사람이 안전 기준까지 묻는다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망자로 잘못 처리된 노동자들을 추적하면서 그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후에는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넨과 함께 일했던 목수들이었다. 그들은 왕궁 방벽에 필요한 임시 지지대를 설치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먼저 견적서를 요청했다. 자원봉사로 해 주겠다고 했으나, 위험한 일을 공짜로 맡기고 아무 보상도 하지 않는 건 옳지 않다고 설명했다. 목수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청구해도 되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일한 만큼 받으셔야 합니다.”
“나라에 돈이 없다면서요?”
“그래서 더더욱 예산과 지급 책임을 적어야 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약속부터 어겨서는 안 되니까요.”
그들은 지지대 설치 작업의 범위를 줄이고, 왕실 수리 예산의 잔액이 확인되는 즉시 정식 계약을 맺기로 했다. 일단은 더 위험한 구역에 들어가지 않는 안전조치만 취했다.
그 사이 라니아는 임금 부분 지급 명부를 가져왔다. 스무 명에게 각 은화 세 닢을 지급했고, 그중 다섯 명이 추가 근무 기록을 제출했다. 바넨의 고용번호 정정 결정은 임금청구의 길을 열었지만 미지급 원금 전체가 즉시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법정에서 자신의 실제 근무일을 입증해야 했다.
“우리는 사람을 되살릴 수 없어요.” 라니아가 말했다.
“그렇죠.”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적어 놓은 종이는 고칠 수 있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손을 멈췄다. 종이 한 장 때문에 받아야 할 돈을 못 받는 일이 있었다. 그 종이를 고치는 일도 사람을 구하는 한 방식이었다.
법정 제출을 준비한 자리에서는 '검증 거절'의 효력에 관해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리엔의 변호인은 거절이 모든 거래를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동의했다. 잘못된 대조 결과를 확정하지 않는 것과 이미 적법하게 발생한 채무를 없애는 일은 달랐다.
“그럼 왜 검증이 필요합니까?” 담당 서기가 물었다.
“결제할 수 있는 부분과 다툼이 있는 부분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다툼이 있다고 모든 사람의 돈을 영원히 묶어 두면 또 다른 피해가 생깁니다.”
우리는 법정에 계약별 검증 결과를 분리 제출해 달라는 의견을 냈다. 적법한 권리자가 확인된 소액 계정은 다른 절차로 처리할 수 있도록 길을 열되, 소유권 다툼이 있는 260금화는 계속 봉인하기로 했다. 그 의견은 누가 이겼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다음 결정이 성급해지지 않도록 한 조치였다.
종이 한 장의 명분으로 왕관을 넘기려던 계약은 막혔다. 이제 우리는 그 계약 때문에 묶인 사람들의 돈을 어떻게 풀어 줄지, 누구에게는 돌려줘야 하고 누구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할지 시작하고 있었다.
오후 법정에서는 중재 등기소의 현재 법적 지위를 심리했다. 검은 깃털 표식이 존재한다고 해서 세금과 관문을 다룰 권한이 생기지 않는다는 앞선 판결은 유지됐다. 그러나 계약 당사자의 동의를 거친 기록 검증 절차 자체는 필요할 수 있었다. 마계와 왕실은 중립적 대조인이 서명하거나 보류할 경우 그 결과를 참조할 수 있다고 동의했다.
“그 사람이 강태준이어야 합니까?” 재판관이 물었다.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내 입에서 그 대답이 나왔을 때 장부가 잠깐 떨렸다. 나는 인증 요청을 열지 않았다. 사람의 자격은 눈앞에 뜨는 문구로 생기지 않는다.
하르마는 증인석에 앉았다. 그는 삼 년 전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자신은 일반 서기였으며, 사망 명단의 확인이 끝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에게도 증명도장을 넘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당신 이름으로 승인 표시가 찍혔습니다.” 재판관이 말했다.
“그것을 승인한 적은 없소.”
“사실관계와 책임은 계속 조사하겠습니다. 다만 현재 이 문서는 적법한 검증 완료의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리엔은 판결이 나온 뒤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불리한 결정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서류가 검증될 때까지 보전금 이동을 막는 데 동의했다. 투자자의 반환권은 여전히 남았고, 결제소의 수수료 정산도 추후 심리가 예정됐다. 아직 누구도 260금화를 국고로 옮기지 못했다.
그날 저녁 급식소 아이들은 새 밀가루로 만든 빵을 받았다. 임금 일부를 지급받은 노동자 스무 명의 영수증도 봉인된 상자에 정리됐다. 라니아는 드디어 지워진 이름을 되찾는 일이 시작됐다며 웃었다. 바넨은 자기가 죽었다고 적힌 고용기록의 정정 결정을 받았지만, 남은 임금은 계속 청구할 수 있었다.
나는 국왕에게 이번 달의 공개 재정표를 전달했다. 승인된 방벽 유지료 720, 실제 출금 확인 480, 마계 수령 확인 0, 출금액 중 실물 보전 확인 260. 각각 다른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140금화 등록비용과 80금화 운송대기 표기는 아직 실제 지급처가 확인되지 않았음을 함께 명시했다. 아델리온은 표를 읽고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국을 살리는 게 큰 금화 한 상자를 찾는 일인 줄 알았다.”
“그 금화가 누구 돈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은 무엇을 찾았나?”
“서명하지 않은 사람이 남긴 권리를 찾았습니다.”
국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을 나서며 루카스는 나를 붙잡았다.
“오늘 누군가 이긴 겁니까?”
“적어도 확인되지 않은 이름으로 사람을 죽었다고 확정하는 절차는 막혔지.”
“그럼 다음에는요?”
“그 이름으로 돈이 실제로 지급됐는지, 누가 지급했는지 찾아야 해. 네 번째 깃털이 끝이 아니야.”
루카스는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수첩에 기록했다. 그는 이제 '사건 해결'이라고 적는 대신 '확인된 사실'과 '남은 질문'을 나눴다. 나는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에리카는 별도로 아버지의 마지막 서명 감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진본으로 확정되지 않은 종이에 아버지의 글씨처럼 보이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문장을 손가락으로 따라 쓰지 않았다. 단지 다음 감정 절차를 신청했다. 상처를 지우는 대신 다룰 수 있는 일부터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말이 진짜라면, 꼭 제가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아요. 이제 혼자 하지 않으려고요.”
그날 밤 우리는 기록을 나눠 보관했다. 세르나는 마계의 원본 대조표를, 에리카는 왕국 사본을, 하르마는 자신의 자발적 진술 사본을 받았다. 어느 한 사람이 사라져도 기록이 통째로 사라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누군가를 안전하게 지킬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한 장의 종이를 둘러싼 권한이 한 사람에게만 몰리지 않게 할 수는 있었다.
밤에 나는 보존고를 나서다 하르마와 마주쳤다. 그는 작은 종이 한 장을 내게 건넸다. 삼 년 전 벨란 감사관이 하르마에게 남긴 짧은 기록의 뒷면이었다. 앞면의 '서명 보류'는 이미 감정에 들어갔지만 뒷면은 별도 조명 아래서야 글씨가 드러났다고 했다.
'정산실에는 두 종류의 이름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
그 아래 날짜가 적혀 있었다. 삼 년 전의 날짜였다. 그리고 낯선 발음대로 적힌 작은 글씨가 있었다.
'강 태 준. 검증자 후보로 인쇄 예정.'
나는 종이를 내려놓지 못했다.
삼 년 전 나는 한국에 있었다. 이 왕국에 오지도 않았고, 이 사람들을 알지도 못했다. 어떤 계약이 내 이름을 미리 알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나중에 누군가 그 오래된 종이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는가.
에리카가 뒤에서 물었다.
“지금 인증을 하실 겁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도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이름이 적혔다고 동의한 건 아니었다.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잊어야만 볼 수 있는 진실이라면, 적어도 다른 증거를 찾을 때까지 거절할 수 있어야 했다.
바로 그 순간 종루에서 낮은 울림이 한 번 들렸다. 이번에는 네 번도, 세 번도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오래된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였다.
나는 종이 뒷면을 다시 보았다. 가장 아래에 아주 작은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귀환 계정의 예치자는 납세자가 아니다.'
나는 처음으로 세금 장부가 사람의 기억까지 값으로 적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했다.
그리고 그 장부가 왜 나를 이 세계로 불렀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제4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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