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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39화
PAYLUA ORIGINAL · 제39화

39화. 기억을 담보로 삼지 않는 법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738자

오프라인 책장
하르마의 이름을 닮은 서명을 본 순간, 노인은 내가 아는 어떤 용보다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그날 나는 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 진술을 받아 적었고, 서명의 진위를 감정에 맡겼다. 분노가 증거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무시할 이유도 없었다. 문서에는 사망 보상금 지급 검토 대상 번호 일곱 개가 적혀 있었다. 우리가 별도로 조사 중인 열두 줄의 명단과 일부 번호가 겹쳤다. 그러나 그중 몇 사람이 실제 사망했는지는 여전히 독립 확인이 필요했다. 결재문 자체는 누가 사망했는지 증명하지 못했다. 리엔은 종이를 본 뒤 표정이 달라졌다. “제삼 결제소의 접수 번호가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발행됐습니까?” “옛 왕실 대조소입니다. 우리 결제소가 생기기 전의 인쇄 규칙이에요.” “그 규칙을 누가 가져와 썼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까?” “서류를 보관한 사람에게 물어야겠죠.” 세르나가 말했다. “마계에서 사망자는 더 이상 거래 서명자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절차의 종료다. 여기 누군가는 그 종료 상태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권한을 빌려 온 것 같군.” 나는 단어를 고쳤다. “빌렸다는 말은 아직 이릅니다. 무단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당신은 정말 단어를 비싸게 쓰는군.” “틀린 단어가 나라를 팔아먹는 걸 봤으니까요.” 오후에는 하르마의 필적 감정이 시작됐다. 에리카는 자신의 아버지 필적 감정과 이해충돌하지 않도록 별도의 감정인을 추천했다. 하르마는 기억을 더듬어 그날 일을 설명했다. 정산실의 검증자는 자신의 자리에 서명하는 대신 대조되지 않은 번호에 붉은 줄을 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쇄기에서 새 종이가 나온 뒤에는 승인 문구가 이미 인쇄돼 있었다. “누가 그런 명령을 넣었습니까?” “나는 몰랐소. 알아보려고 하니 출입증을 회수했지.” “회수한 사람은요?” “그날 얼굴을 가리고 있었소. 이름표가 아니라 부서만 보였지. 군무청 자금과.” 우리는 군무청 근무표와 증명도장 출납부를 요구했다. 레온하르트는 이번에도 일부를 제출했다. 빠진 기록이 있었으나 군사 기밀 때문에 빠졌는지, 실제로 없어진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임금 창구에서는 좋은 소식이 왔다. 어제 이름 오류로 지급이 보류된 노동자가 본인 확인 절차를 마쳤고, 잔여 은화 세 닢을 수령했다. 이제 승인된 금화 여섯 닢은 스무 명에게 은화 세 닢씩 모두 지급된 것이었다. 라니아는 지급 완료라고 표시하되 남은 체불 임금 원금은 여전히 미정산이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어려운 사건 중에도 돈은 제대로 주는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일을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마왕의 정체를 밝히는 일보다 한 사람의 실제 임금 영수증이 더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두 일을 뒤집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실물 보관된 260금화의 소유권 심리도 이어졌다. 결제소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보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실은 방벽 유지료의 일부일 수 있다고 반박했고, 마계는 원래 받을 돈인지 확인할 원본이 필요하다고 했다. 법정은 봉인을 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승인액은 720금화, 출금 확인액은 480금화, 중간 계정에서 실물 보전된 건 그중 260금화, 마계 측 입금 확인은 0금화입니다. 어느 숫자도 서로 더해서 새 돈을 만들 수 없습니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표는 왕국의 작은 상식이 되고 있었다. 마계 원본의 세 번째 조건을 읽고 난 뒤에도 나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자격을 타인의 기억으로 증명하지 않는 자.' 그 문장은 내게만 뜨는 장부가 어딘가 잘못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진실의 장부를 꼭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했다. 국고 누락 단서를 찾을 때, 제삼 금고를 확인할 때, 광산 수익을 좁혀 물을 때. 한 번 열면 일부 사실을 볼 수 있었지만, 대신 한국 시절 기억이 조금씩 사라졌다. 처음에는 커피 맛이나 동료의 말처럼 사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것의 합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이었다. “서류에는 증인 두 명이 필요한데, 내 기억에는 증인이 없네요.” 내가 중얼거렸다. 세르나는 놀랍게도 웃지 않았다. “내가 오래 일해 보니 인간은 기억이 정확해서 신뢰를 얻는 게 아니었다. 틀린 기억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더 신뢰를 얻더군.” 그녀는 왕국에서 일한 일을 기록한 수첩을 가리켰다. 내가 잊더라도 그 수첩이 모든 것을 돌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서 대조할 수는 있었다. “당신의 출신 세계에 관한 것은 우리가 증명할 수 없지. 대신 당신이 여기서 무엇을 했는지는 여러 사람이 확인할 수 있다.” 나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왕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줄만 알았는데, 누군가는 벌써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리카는 한국에서의 나를 자세히 묻지 않았다. 돌아갈 곳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설명할 때면 그녀는 내 선택을 대신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점이 고마웠다. “장부가 오늘도 뭘 보여 줬나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지난번 인증 요청 이후에는 자동 문구 몇 줄뿐이고, 정밀 열람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그럼 본 사람이 아니라 적은 것을 믿어야겠네요.” “그것도 무조건 믿으면 안 됩니다. 내 기록에도 틀린 날짜가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수첩에 '본 것', '다른 사람이 확인한 것', '추정' 세 칸을 만들었다. 한국의 집에 관한 문장은 첫 번째 칸에만 들어갔다. 왕국의 수납 영수증은 두 번째 칸을 채울 수 있었다. 마왕이 내 기억을 대가로 삼으려 한다는 생각은 아직 추정이었다. 세르나는 그 마지막 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이 그런 거래를 승인했다는 증거는 없으니까.” “맞아요. 마왕이 납부한 12금화는 확인된 거래였지만, 이 요청의 발신자는 아직 모릅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가벼워졌다. 모든 의심을 누군가에게 던져야만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루카스가 웃으며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는 스스로 조사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 줄은 '태준 님이 오늘도 자기 기억을 아끼셨다'였다. 나는 민망해하며 그 문장을 지우려고 했다. “왜요? 사실이잖아요.” “그걸 공문서에 쓰면 안 되지.” “공문서 아니에요. 제 일기인데요.” 나는 펜을 돌려주었다. 그 소년이 내게 기록을 배운 줄 알았는데, 나는 어쩌면 기록을 남기는 이유를 그에게 다시 배우고 있었다. 저녁에 세르나와 나는 마계 원본의 미세한 글자를 다시 읽었다. '검증자 자격' 아래 작은 문구가 있었다. '첫째, 거래 양측을 대리하지 않는 자. 둘째, 확인할 수 없는 사망을 확정하지 않는 자. 셋째, 자신의 자격을 타인의 기억으로 증명하지 않는 자.' 나는 세 번째 문장에서 멈췄다. “기억을 대가로 한 인증이 왜 나타난 거죠?” “그 문구가 모든 검증자에게 보이는 건 아니다. 조약 자체에는 기억을 바치라는 의무가 없다.” 세르나가 말했다. “그럼 누군가 덧붙인 거군요.” “그럴 수 있다. 다만 네 장부의 고유한 작동과 별개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나는 손목을 감쌌다. 내게만 뜨는 문구 때문에 사람들의 권리를 함부로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세르나와 에리카 앞에서 내가 본 문구를 수첩의 범위 안에서 설명했다. 정확히 어떤 기억을 잃을지 알 수 없으며, 법정 증거로 제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에리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이 기억을 잃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었군요.” “나도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늘도 쓰지 않았죠?” “네. 필요한 증거는 따로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내 수첩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제안을 했다. “당신이 잊기 전에, 당신이 지키고 싶은 걸 자기 말로 적어 놓으면 어떨까요? 사건 기록 말고요.” 그날 저녁 나는 국왕의 조언을 들으러 가지 않았다. 대신 급식소 구석에 앉아 메라가 만든 빵을 먹었다.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이 데일 뻔했다. 메라는 빵을 식혀 먹으라며 잔소리했다. “한국에서 먹던 빵도 이 맛이었나요?” 루카스가 물었다.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 “한국이 어디예요?”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 세계에 온 뒤 줄곧 그 질문을 피해 왔다. 내가 원래 세금 조사 일을 하던 곳이라는 설명만으로는 그곳이 어떤 세계인지 이해시킬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언젠가 내가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살던 곳이야. 여기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그곳 사람들도 세금을 내요?” “그럼.” “마왕도 있어요?” “적어도 세금 고지서를 받은 마왕은 본 적 없어.” 소년이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이 익숙한 한국의 작은 식당에서 들었던 웃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구의 웃음이었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메라는 빈 그릇을 치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가고 싶으세요?” “그렇죠.” “그런데 왜 계속 여기 일을 해요?”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국고가 비어 있고, 노동자들이 죽은 사람으로 처리돼 있고, 누군가 국경의 안전을 빌미로 세금을 빼앗으려 했기 때문일까. 그런 이유는 많았다. 하지만 오늘도 밥을 먹는 사람들 앞에서 내 선택의 이유를 거창하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요.” 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 끝나면 가요. 대신 가기 전에 밥 먹고.” 나는 웃었다. 그 말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장부가 기억을 가져가더라도 이런 문장은 수첩에 적어 둘 수 있으니까. 급식소에서 돌아온 뒤 나는 하르마의 진술서를 다시 읽었다. 자신의 이름이 쓰였다는 이유로 사람의 생사를 승인한 것으로 취급되는 일은 끔찍했다. 그와 내 상황은 어떤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고대 서식에 내 이름이 떠올랐다는 이유로 내가 이미 동의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거래가 아니라 강요였다. 나는 수첩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서명은 이름이 아니라 선택이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한국 집의 문 앞에 서 있던 나 자신을 적으려 했다. 하지만 현관의 색이 기억나지 않았다. 손은 펜을 쥐고 멈췄다. 바로 그때 보존고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하르마의 서명 감정 결과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는 것이다. 보존고에서는 잉크 시험도 여러 번 반복됐다. 서로 다른 기간에 지급된 동일 계열 인장 용액을 작은 표본지에 떨어뜨리고, 색이 바뀌는 속도와 성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했다. 법원 감정인은 유사한 성분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날 제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럼 최근에 찍은 게 아닐 수도 있습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가능성은 있지만, 삼 년 전 당시 공급된 제품과는 차이가 큽니다. 유통 대장 대조가 필요합니다.” 나는 그 말을 진술서의 맨 앞에 적었다. 범인을 빨리 찾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결론을 서두른다면, 나중에는 진짜 범인을 찾을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 증거가 강해질수록 더 천천히 말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필적은 달랐다. 서명 도장이 찍힌 종이의 제조 연대는 삼 년 전과 맞았다. 더 이상한 것은 잉크였다. 서명 도장의 잉크 성분이 최근 왕실에서 재발급한 공인 인장 용액과 같았다. 나는 그 추정을 사실처럼 공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인장 용액의 생산 연대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최근 도장 사용 가능성을 조사 중이라고만 적었다. 의혹을 알리는 말 한 줄이 실제 사람의 생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다. 누군가는 삼 년 전의 종이에 최근의 승인 표시를 찍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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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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