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란 가문의 구 곡물창고.
나는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한 번 더 읽었다. 에리카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장부 내용을 볼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내 표정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눈치챈 모양이었다.
“왜 그러시죠?”
“성 서쪽에 벨란 가문 곡물창고가 있습니까?”
잠깐, 그녀의 눈동자가 굳었다.
“있었습니다. 삼 년 전에 국가가 징발했어요. 지금은 군량미 보관 창고로 알고 있습니다.”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그곳에 가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벨란 가문 이름으로 부르지는 마세요. 저희 가족은 그 창고를 떠난 지 오래됐습니다.”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씨가 같다고 책임을 묻는 건 조사도, 추리도 아니었다.
로웬은 정식 조사권 신청서를 썼다. 북문 원장 사본과 상인들의 서명을 붙이고, 도난당한 반지의 인장 사용 기록도 추가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창고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아니었다. 공금 이송 서류의 원본 대조와 보관 확인이었다. 두 가지는 엄연히 다르다.
“왕실 군량 창고는 군무청이 관할합니다.” 로웬이 말했다. “허가가 나기까지 하루는 걸릴 거예요.”
“하루를 기다릴 형편은 아니죠.”
“법을 지키자더니 벌써 마음이 바뀐 겁니까?”
“아니요. 그때까지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뭔지 묻는 겁니다.”
에리카가 끼어들었다. “창고에 들어갈 수는 없어도, 출고된 군량이 어느 부대로 갔는지는 군무청 게시판에 공고됩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참 좋은 동료였다. 아직 나를 동료라고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향한 군무청 앞에는 낡은 나무 게시판이 세 개 세워져 있었다. 군량 배급량, 운송 계약, 주둔부대 수가 매주 공개되었다. 읽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 표면에는 먼지가 두꺼웠다.
나는 수첩을 펴고 숫자를 옮겼다. 서쪽 성벽 보수대에 지난달 배정된 밀 120포대. 실제 수령 확인은 45포대. 나머지 75포대는 운송 중 손실로 처리돼 있었다.
“도적에게 털렸답니까?”
“공문에는 습기와 쥐로 인한 훼손이라고 적혀 있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밀 75포대가 한꺼번에 쥐 먹이가 됐다고요?”
“의심스럽죠.”
“너무 의심스러워서 오히려 깔끔합니다.”
“쥐가 밀 75포대를 먹으려면 대체 몇 마리나 있어야 할까요?”
내 말에 루카스가 진지한 얼굴로 공책을 꺼냈다.
“쥐 한 마리가 하루에…….”
“계산하지 마.”
“이미 절반은 했는데요.”
“네가 계산을 좋아하는 건 알겠어. 나중에 군량 배급표나 다시 맞춰보자.”
루카스는 아쉬운 표정으로 연필을 넣었다. 나는 게시판 뒤편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군무청이 처분한 물품 목록이 따로 있었다. 부서진 수레바퀴, 낡은 군복, 곰팡이가 생긴 곡물. 그런데 곡물 폐기량은 75포대가 아니었다. 정확히 73포대였다.
“두 포대는 어디로 간 거죠?”
에리카가 눈을 크게 떴다. “수송 중 손실 75, 공식 폐기 73. 수치가 안 맞네요.”
“기록 실수일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양쪽 숫자가 어떻게 다른지 남기는 겁니다.”
군무청의 한 서기가 우리 말을 듣고 다가왔다. 그는 내 임명장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숫자 때문에 지난해 제가 징계를 받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락된 두 포대의 행방을 물었더니 보고서를 다시 쓰라고 하더군요. 쥐가 먹었다고 적으래요. 저는 쥐가 먹었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고요.”
“징계 사유는요?”
“상관 지시 불복종. 제 봉급도 한 달치 삭감됐습니다.”
나는 그에게 곧장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낡은 징계통지서가 남아 있는지 물었다. 그는 옷 안쪽에서 모서리가 닳은 종이를 꺼냈다. 서명란에는 군무차관 레온하르트의 보좌관 이름이 있었다. 바로 왕실 인장 보관실의 출입기록에 적혀 있던 그 이름이었다.
“이 서류를 복사해도 될까요? 원본은 계속 갖고 계세요.”
서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는 종이 가장자리에 날짜와 복사 시각을 적었다. 누군가의 경고가 단지 불만에 그치지 않고 문서로 남은 첫 순간이었다.
우리는 옆 게시판에서 군량 운송 계약도 찾았다. 주 운송업체는 ‘북서 수송조합’. 계약금액은 금화 340닢. 실제 운송 횟수는 열두 번. 그런데 세금 신고에는 운송 조합의 매출이 전혀 없었다.
“운송 조합도 탈세입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아직 몰라. 국가가 준 돈이 매출인지, 운송비를 대신 맡아 준 것인지 계약을 봐야 해. 숫자 하나만 보고 범인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네. 돈이 오고 간 이유를 먼저 확인한다.”
소년이 수첩에 적었다. 나는 그가 기록한 문장을 보며 혼자 생각했다. 학원도 없고 교과서도 부족한 나라에서, 이 작은 감사원 견습이 최소한의 회계 원칙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기뻤다.
오후 햇살이 게시판의 낡은 종이를 비췄다. 그중 한 공고문에 ‘왕실 채무 대응 특별 매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승인된 매각품은 낡은 목재와 망가진 병기였다. 곡물은 목록에 없었다.
“밀을 팔고 있었다면 정식 공고는 누락됐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아니면 군무청 이름을 빌린 누군가가 자기 물건처럼 팔았을 수도 있죠.”
나는 곡물의 수분 손실과 폐기 사유까지 기록하라고 했다. 곡물은 썩을 수 있다. 그러나 쥐는 서류에 서명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손실을 확정했다면 반드시 판단 근거가 있어야 했다. 근거가 없다면 그 책임 역시 사람에게 남는다.
마침 군무청 정문으로 보급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를 끄는 남자는 바퀴를 고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밀가루 자루를 붙잡아주다가 물었다.
“서쪽 보수대로 운송하십니까?”
“예. 그쪽 사람들은 늘 굶주려 있어요. 배정표엔 넉넉하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가면 죽 한 그릇에 네 명이 숟가락을 넣습니다.”
“운송 중 밀을 잃어버린 적은요?”
남자는 손을 멈췄다. “누가 그 말을 했습니까?”
“게시판에 적혀 있습니다.”
“그럼 게시판을 쓴 사람이 쥐인가 보죠.”
그는 농담처럼 웃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지금은 목격자를 보호할 방법부터 마련해야 했다.
보급 마차를 보낸 뒤 에리카가 말했다. “여기는 사람이 입을 열면 다음 날 배급을 못 받는 곳이에요. 왜 명단을 적지 않으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증언은 안전이 보장될 때 받아야죠.”
“그런 절차는 이 왕국에 없습니다.”
“그럼 만들어야겠네요.”
“입법권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최소한 조사 중에 이름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 규칙은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성하는 문서부터.”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수첩 한쪽을 접었다. 마치 그곳에 적힌 무언가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군무청 서기는 떠나기 전에 내게 한 가지를 더 알려주었다.
“창고 앞쪽에는 군량을 쌓고, 뒤쪽에는 장부에 없는 상자를 둡니다. 하지만 들어가 본 적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쪽 일을 묻지 않아요.”
“왜죠?”
“한 번 물어봤던 친구가 해고됐거든요. 그 사람은 다섯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어요.”
나는 서기의 말을 적었다. 증언의 직접 경험과 들은 이야기를 구분했다. 창고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보지 못했다. 따라서 상자의 존재를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사할 장소를 정하는 데는 충분했다.
루카스가 말했다. “이렇게 다 의심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 찾는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잘못된 결론으로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
“징수관님은 너무 느린 것 같아요.”
“맞아. 그래서 네가 빨리 계산해줘야 해.”
소년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공책을 펼쳤다. 군량미의 무게, 운송 회수, 마차 한 대에 실을 수 있는 포대 수. 십이 회 운송으로 총 420포대를 움직이려면 한 회당 삼십다섯 포대가 필요했다. 그런데 운송 계약에는 마차 세 대만 배정돼 있었다.
“한 대당 열두 포대 정도면 충분한데요?”
“그렇다면 운송량만 놓고 볼 때 불가능한 계약은 아니네. 다른 쪽을 보자.”
“다른 쪽이요?”
“수송비와 실제 움직인 거리. 거기에 재고가 맞아야죠.”
숫자를 따라가던 루카스가 결국 새로운 사실 하나를 찾아냈다. 마차 한 대가 같은 날짜 같은 시각에 두 곳에서 출발했다고 적혀 있었다. 서쪽 성벽과 북부 교역소. 둘 사이에는 산길로만 세 시간이 걸렸다.
“말이 두 마리였다면요?” 소년이 물었다.
“마차 번호는 하나잖아. 동일한 마차가 동시에 두 곳에 있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잡은 단서를 믿는 얼굴이 됐다. 나는 누가 실수했는지 단정하지 않고 기록의 충돌만 표시했다. 그곳에서 누군가 마차 번호를 잘못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의로 장부를 두 개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두 길을 모두 따라가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점심 무렵 우리는 창고 바깥까지 갔다. 회색 벽돌로 지어진 긴 건물은 왕성 서쪽 둔덕 아래에 있었다. 높은 담장 너머로 저장탑 여섯 개가 솟아 있었다. 출입문엔 군무청 인장이 붙어 있었고, 손에는 창을 든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방문 목적을 밝히시오.”
“재무청 소속입니다. 국고 이송 기록을 확인하려 합니다.”
병사는 허가서를 달라고 했다. 로웬의 신청서는 아직 심사 중이었다. 우리는 정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그때 한쪽 골목으로 곡물 자루를 실은 마차 두 대가 지나갔다. 자루에는 군무청 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 대신 낯선 파란 새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에리카가 속삭였다. “청동왕관 상단입니다.”
“왕실 채권자?”
“맞아요. 그 상단은 식량 유통도 합니다.”
“왕실 창고에서 나오는 밀을 사들인다는 거군요.”
“합법적인 매각일 수도 있어요.”
“맞습니다. 그러니 먼저 매각 공고부터 확인하죠.”
게시판에는 해당 매각이 없었다. 더 이상한 점은 마차가 한 대 돌아오면서 비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곡물이 아니라 길쭉한 철제 상자를 싣고 있었다. 상자 위에는 짙은 천이 덮여 있었다.
나는 두 번째 정밀 열람을 사용할까 고민했다. 권능은 거래의 연결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가가 있다. 첫 열람 이후 묘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마신 커피의 맛.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기억이 사라지는 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남발할 이유는 없었다.
“루카스, 저 마차 번호 적어.”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말 꼬리의 붉은 끈까지요?”
“네가 본 걸 전부.”
루카스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다는 얼굴이었지만 성실하게 기록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병사 둘이 창고 뒤편으로 달려갔다. 뒤이어 짧은 비명이 울렸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에리카가 먼저 움직였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허가 없이 들어가면 우리가 불리해집니다.”
“비명이 났잖아요.”
“그래서 더 조심해야죠. 문 앞의 병사에게 사람의 안전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는 정문으로 돌아갔다. 병사가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려던 순간, 안쪽에서 작은 문이 열렸다. 팔을 붕대로 감은 노동자 하나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우리를 보고 멈칫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자루가 떨어졌습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옷자락엔 피가 묻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진술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다친 사람이 치료를 받았는지만 알려주세요.”
노동자는 뒤를 돌아봤다. 병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창고에 있는 건 밀이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왕실에 없어졌다고 보고한 돈이요.”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골목으로 달아났다. 병사는 쫓지 않았다. 그저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이제 두 종류의 공금이 같은 창고로 연결됐다. 북문 통행세 96금화와 군량미 매각 대금. 우연의 일치라기엔 방향이 너무 같았다.
해가 넘어갈 때 우리는 재무청으로 복귀했다. 로웬은 군무청의 회신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조사 요청이 기각됐다는 내용이었다. 이유는 ‘전시 군량 보전’이었다.
“지금 전쟁 중입니까?” 나는 물었다.
“아닙니다.”
“그럼 전시 규정은 왜 적용하죠?”
로웬이 서류를 구겼다. “예전 왕이 발동한 비상명령이 아직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도 돈을 빌릴 때 만들었던 겁니까?”
그는 나를 보았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오늘의 증거를 정리했다. 열람을 거부당했다는 사실까지 증거로 남겼다. 조급해질수록 절차가 중요했다. 저들이 원하는 건 내 분노일 테니까.
그날 밤, 기록실 문틈으로 봉투 하나가 들어왔다. 안에는 낡은 매각 계약서의 반쪽과 작은 종잇조각이 있었다.
‘창고를 열려거든, 벨란이 왜 죽었는지부터 물어라.’
나는 종잇조각을 두 번 읽었다.
에리카의 아버지는 삼 년 전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창고는 국가에 징발되었다.
이제 창고의 주소뿐 아니라, 그 주소가 품고 있는 사람의 과거까지 장부에 얽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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