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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28화
PAYLUA ORIGINAL · 제28화

28화. 불길에서 나온 이름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984자

오프라인 책장
에리카는 아버지의 글씨를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서류철 표지에 ‘벨란 감사관 필적 확인’이라고 쓰지 않았다. “필적 감정부터 받아야 합니다.” “알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렇지만 이 문장은 아버지가 집에서도 쓰던 표현이에요. ‘내 서명을 쓰지 말 것.’ 누가 제 이름으로 숙제를 냈을 때도 그러셨거든요.” 에리카는 잠시 웃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증언 내용과 감정의 필요성을 나누어 적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흔적이었지만, 법정에는 여전히 비교할 서류가 필요했다. 원본 소방 기록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첫 번째 화재가 난 군무청 회계실과 두 번째 화재가 난 문서 보관동은 서로 다른 관할에 있었다. 당시 소방대장은 퇴직했고, 남은 대원 일부는 북부 국경으로 전출돼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의 기억만으로 사고 전체를 재구성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옛 소방대의 장비 수령 기록부터 살펴봤다. 당시에 사용된 마법 소화액은 두 종류였다. 한 가지는 종이가 타는 화재에 적합했고, 다른 한 가지는 마력석이 폭발했을 때 쓰는 약제였다. 첫 번째 화재에는 후자가 투입됐는데, 군무청 공식 보고서에는 마력석 사용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럼 일부러 마력석을 숨겼다는 건가요?” 루카스가 물었다. 사벨은 옛 소방대원들의 출동 배치를 그려 주었다. 불이 난 첫 번째 건물의 앞문과 뒷문에는 서로 다른 구조조가 들어갔다. 당시 왕궁 쪽에서 파견된 수습반은 소방대가 진화 중이던 공간으로 들어오려 했다. 사벨이 막자 그들은 ‘왕실 문서가 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불을 붙였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런 건 못 봤소. 다만 불이 꺼지기도 전에 서류를 가져가겠다고 했지.” 나는 그가 본 사실과 추측을 분리해 적었다. 사벨은 현장 기록을 제때 제출하지 못한 것도 후회했다. 하지만 그의 기록이 지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과장된 기억을 억지로 채워 넣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의 집을 나오며 에리카가 내게 물었다. “아버지가 불 속에서 서류를 지키셨다면 멍청한 일이었을까요?” “사람을 구하려 한 거라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그녀는 마당에 놓인 오래된 양동이를 보았다. 물통 하나로 화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했을 일과 하지 않았을 일을 마음속에서 셀 수 없이 되짚고 있는 듯했다. “저는 아버지가 용감한 분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그래도 됩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가 그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에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알아요. 그래서 제가 먼저 결론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조사 수첩을 닫았다. 이 세계에서 가장 힘든 일은 마왕에게 세금을 받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아직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키는 일이 더 어려웠다. “아직은 아닙니다. 오래된 재고가 있었다면 보고서가 틀렸을 수도 있고, 현장에서 다른 약제를 썼을 수도 있겠죠.” 우리는 당시 창고의 마력석 재고 목록과 소방대의 소모품 수불장을 대조했다. 수불장에는 소화액 두 병이 먼저 지급되고 한 병이 뒤늦게 반납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날짜가 맞았으나 장비 번호가 달랐다. 누군가 서류를 조작했다고 결론 내리기보다, 당시 혼란한 상황에서 기록이 어떻게 작성됐는지 알아야 했다. 현장 수습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다른 것을 기억했다. 한 사람은 불이 천장에서 내려왔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문틈에서 먼저 번졌다고 했다. 이셀은 문서 상자를 들었다는 사실만 정확히 기억했다. 누구도 전체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에리카는 이틀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조사에서 하루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 중요한 일이에요.” “그래서 더 쉬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의 자료는 다른 감사인도 볼 수 있게 남겨 두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화를 내는 듯했지만, 결국 업무 인계서에 서명했다. 일을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불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슬픔에 모든 증거를 매달아 놓으면 누군가 그 사람을 협박하는 순간 조사 전체가 멈춘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선 안 됐다. 퇴직한 소방대장 사벨은 우리의 면담 요청을 받자 문을 닫았다. “이제 와서 그날 일을 묻는 사람을 믿지 않소.” “그럴 수 있습니다. 자발적 면담입니다. 거절하셔도 됩니다.” 문이 닫힌 채로 한참이 지났다.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벨란의 딸이 왔다는 게 사실이오?” 에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네. 하지만 제가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닙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할 뿐이에요.” 사벨은 조금씩 문을 열었다. 그는 삼 년 전 출동 기록 사본을 남겨 두었다고 했다. 공식 원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적은 현장 메모였다. 첫 번째 경보는 밤 여덟 시 십분, 두 번째 경보는 밤 여덟 시 사십오분. 벨란 감사관이 발견된 곳은 첫 번째 화재가 난 방이 아니라 그 옆 복도였다. “그분이 불 속으로 들어갔습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그렇게 본 대원이 있소. 누군가를 데리고 나오려 했다는 말도 있었지.” “누구를요?” 사벨은 고개를 저었다. 사고 당시 구조 명단에는 벨란과 소방대원 두 명 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를 구하려 했다는 말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목격담이었다. 우리는 그 명단을 들고 생존한 소방대원을 찾았다. 그녀의 이름은 이셀. 지금은 국경 근처 목공소에서 일했다. 이셀은 우리를 보자 자신이 왜 그날 일을 그만뒀는지부터 말했다. “보고서를 쓰려는데 윗사람이 두 번째 화재는 착각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두 번째 화재를 직접 봤습니까?” “보관동 뒤쪽에서 연기가 나는 건 봤습니다. 누가 불을 붙였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 진술은 사벨의 개인 메모와 일치했다. 하지만 방화범을 특정하지는 못했다. 이셀은 이어서 한 가지를 더 말했다. “벨란 감사관은 복도에서 사람이 있는지 계속 확인했어요. 마지막에는 제 손에 문서 상자를 밀어줬습니다.” “상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현장 수습반에 넘겼어요. 인수증을 썼습니다.” 인수증 번호는 군무청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소방대 측에 남은 사본에는 담당자 이름이 ‘보증 관리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직책이 단순한 돈의 통로가 아니라 사고 현장에도 등장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날 오후 왕실 법정에서 보관 증거의 출처를 확인했다. 법정 감정인은 필적만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관련 문서들을 나란히 펼쳤다. 벨란 감사관이 죽기 전에 직접 작성한 예산 의견서, 에리카가 보관하던 가족 편지, 그리고 군무청 보관실에서 발견한 그을린 확인서였다. “비슷한 획이 보입니다. 하지만 불길로 종이가 변형돼 세부 판정은 제한적입니다.” 에리카는 예상했는지 차분히 들었다. 나는 오히려 질문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입니까?” “서명의 마지막 두 글자입니다. 마력 열기에 먹이 번지면서 일부 획이 뭉쳤습니다.” 그 대답은 불편했지만 유용했다. 증거에 빈틈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사하면 다른 자료를 찾을 수 있다. 없는 확신으로 누군가를 체포했다가 사건 전체가 무너지는 것보다 낫다. 재판관은 다음 단계로 당시 문서 인수증과 보관동 반출기록을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군무청은 상당수가 소실됐다고 주장했고, 소방대는 수습반 인수 명부가 별도로 보관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에리카가 법정 밖에서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이 누군가의 실수 때문인지, 고의 때문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게 가장 힘들어요.” “오늘은 모르는 부분 하나가 분명해졌어요. 인수한 사람이 누구인지, 서류가 어디로 갔는지를 보면 됩니다.” 그녀는 내게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다섯 줄짜리 조사표를 새로 만들어 왔다. 이름, 권한, 인수물, 시각, 확인자. 아버지의 규칙에 우리가 추가한 다섯 번째 칸이 들어 있었다. “이제 그 칸을 빼먹는 사람부터 찾아볼 거예요.” 그 말은 복수의 선언이 아니라 조사 계획이었다. 나는 그 차이를 믿기로 했다. 소방대 사본과 군무청 문서 번호가 이어지는지, 인수증이 실제 작성됐는지 감정해야 했다. 에리카는 중요한 질문을 하나 꺼냈다. “아버지가 문서를 지키려다 돌아가셨다면, 왜 누군가는 그 서명을 없애려고 했을까요?” “서명 자체보다 서명에 붙은 권한을 필요로 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손목에 저울 무늬가 나타났다. 나는 진실의 장부를 열 수 있었다. 범위를 좁혀 ‘벨란 감사관의 마지막 서명’을 묻는다면 어떤 문서든 단서가 나올지 몰랐다. 하지만 그날 아침 수첩을 펼쳤을 때 나는 한국에서 처음 맡았던 사건의 회사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첩에는 손글씨로 분명히 적혀 있었는데도 기억이 없었다. 열람할수록 뭔가를 잃는다는 사실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에리카가 물었다. “괜찮아요?” “조금 피곤하네요.” “무리하지 마세요. 아버지 일을 서두르다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나는 그 말을 수첩 가장자리에 적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잊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저녁에는 빵집 노인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를 받은 뒤 나는 재무청의 지출 기록에서 ‘사망 보상금’ 항목을 별도로 조회하도록 요청했다. 조사 범위를 삼 년 전 군무청 창고 근로자에 한정했다. 모든 유족의 명단을 긁어모으면 그 자체로 또 다른 피해를 만들 수 있었다. 로웬은 낡은 원장을 들고 와 한숨을 쉬었다. “사망 보상금 신청이 있었지만 지급이 끝났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네. 어떤 것은 선급금이고 어떤 것은 정산 예정금이군.” “신청과 실제 지급을 나눠 주세요. 그리고 유족에게 직접 돈이 들어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만 표시합시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어떻게 찾을 건가?” 라니아가 옆에서 손을 들었다. 그녀는 노동자 조합에 남은 연락망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유족에게 갑자기 찾아가 사망 보상금을 받았느냐고 묻는 것은 위험하다고도 했다. 우리는 공식 민원 안내를 먼저 공고하고 본인이 확인을 원할 때만 개인 기록에 접근하도록 했다. 세르나는 우리가 만든 서식을 훑어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계에는 사망자를 장부에서 지우는 규정이 있다. 그래야 어떤 계정도 유령의 이름으로 돈을 받지 못하니까.” “여기서는 반대로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을 지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죽음 자체를 거래에 사용했다는 뜻이군.” “가능성일 뿐입니다. 하지만 확인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에서 온 감사관과 인간 징수관이 처음으로 같은 종류의 두려움을 느꼈다. 사라진 돈보다 더 심각한 건 사라진 사람의 이름일 수 있었다. 그는 투자증서를 산 뒤 마르켈 상단이 아닌 제삼 결제소 명의로 배당금 두 차례를 받았다고 했다. 은화 몇 닢뿐이었지만 지급 영수증은 남아 있었다. 그 영수증의 일련번호는 조폐소 검인지와 연결됐다. “이 사람은 속기만 한 게 아니네요.” 루카스가 말했다. “실제 작은 돈을 받으니까 더 믿게 됐을 수 있어.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른다.” 우리는 투자금 원장을 법정에 추가로 요청했다. 리엔은 비밀 보호를 주장했지만, 민사 피해와 보증 계약의 연관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식 결정이 내려지면 제출하겠다고 했다. 밤이 되기 전 이셀이 찾아왔다. 그녀는 낮에는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다고 했다. 벨란 감사관이 화재 직전 자신에게 소리쳤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먼저 꺼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방 안에 사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무슨 말입니까?” “상자에 붙은 이름표에 사람 이름들이 적혀 있었어요. 모두 사망 처리된 노동자 이름이었죠.”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문서는 단순히 금화가 중복 계상됐다는 보고서가 아니었다. 죽지 않은 사람을 죽었다고 적은 기록이라면, 누군가의 임금을 없애고 사망 보상금까지 가로챌 수 있었다. 에리카의 아버지가 불길 속에서 지키려던 것은 장부가 아니라 그 장부 속 사람들이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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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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