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통행·과세 대리권.
다음 날 아침 내가 그 말을 칠판에 적자 로웬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리 왕국에 그런 권리는 없습니다.”
“권리가 없다는 것과 누군가 그런 이름으로 계약을 만들었다는 건 다릅니다.”
“과세권은 의회 동의 없이 양도할 수 없어!”
“바로 그 점을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는 몇 번이나 문장을 읽었다. 오래된 대출채무 8,000금화는 법정 상계로 소멸했다. 하지만 왕국의 국경 통행료를 거둘 권리가 그 채무에 연결돼 있었다면, 상계 사실을 모르는 제삼자가 여전히 권리를 주장할 위험이 있었다.
“상계됐으니 끝난 거 아닙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담보가 적법하게 붙었다면 주채무가 소멸하면서 담보도 어떻게 되는지 따져야지. 그런데 아예 담보 설정 권한이 없었다면 다른 문제가 생겨.”
에리카는 왕실 헌장과 옛 무역 협정의 번역문을 나란히 놓았다. 헌장 제사십이조에는 국가의 관문·조세 수납 권한을 사적으로 처분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었다. 예외는 의회가 재정 긴급상태를 선포하고 정해진 기간 내에 승인한 경우뿐이었다. 삼 년 전에는 전쟁 대비 명령이 있었지만 의회가 그런 승인을 했다는 기록이 없었다.
“그러면 무효라고 선언하면 되겠네요.” 루카스가 말했다.
“법정이 판단할 수 있게 기록을 모아야 해. 그리고 누군가는 이걸 유효하다고 믿고 돈을 냈을 수도 있잖아.”
우리는 의회 기록 보존실에 원본 열람을 신청했다.
왕실 헌장을 읽는 동안 루카스는 의외로 지루해하지 않았다. 그는 문장 끝마다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찾아내며 이상한 질문을 했다.
“과세권을 못 팔면, 왕이 다리 통행료를 받는 사람을 고용하는 건요?”
“그건 징수 업무를 위탁한 것일 수 있어. 정해진 세율과 권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고, 감독도 해야겠지.”
“그런데 그 사람이 요금을 자기 마음대로 올리면요?”
“그건 권한을 넘은 거고.”
“그럼 왕관을 담보로 잡았다는 말은 원래 일을 대신 시킨다는 뜻일 수도 있네요.”
나는 그의 말에 놀랐다. 어른들이 놓친 구분을 그가 붙잡았다. 계약서에 ‘대리권’이라고 적혀 있어도 그 대리인이 결정권까지 받았는지는 다시 살펴야 했다.
그때 로웬이 임시 예산안을 들고 들어왔다. 북부 국경 수리 청구는 여전히 12금화였고, 왕궁 부엌에서 보내온 일일 식량비 요청은 늘고 있었다. 왕은 금화 12닢을 어딘가에서 내라고 지시할 수는 있지만, 이미 정해진 급여와 구호비를 밀어낼 수는 없었다.
“이 계약이 무효라면 통행료 수입도 지키는 거겠지?” 로웬이 물었다.
“당장은 누구에게 통행료를 걷게 할지부터 지켜야 합니다. 그게 급식소의 현금으로 바로 바뀌지는 않아요.”
그는 망설이다 묻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삼 년 전 의회가 담보 승인을 거절했을 때 자신은 예산 공백이 무서워 그 결정을 원망했다고. 이제는 그때 승인이 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당시 사람이 어떤 위험을 보고 반대한 건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로웬에게 구체적인 회의록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기록은 죽은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남은 사람의 판단을 바로잡는 자료여야 했다. 그런데 의회 서기관은 왕실 조사관이 의회 문서를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에리카가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그의 대답은 같았다.
“국왕의 인장만으로는 안 됩니다.”
나는 오히려 안도했다. 모든 기관이 국왕 한마디에 서류를 내어주면 가짜 국왕 명령 한 장으로 나라 전체를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공식 자료제출요구서를 보내겠습니다. 원본은 여기서 열람하고, 대조 사본의 범위만 허가받죠.”
서기관은 경계하던 눈을 풀었다.
“조사관이 그렇게 말하니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그가 안내한 회의록에는 재정 긴급상태 승인안이 의제에 올라왔으나 표결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수십 명의 의원이 방벽 공사 비용부터 공개하라고 요구해 회의가 중단됐다는 것이다. 그때의 반대 의견 중 하나는 유난히 날카로웠다.
‘장래 왕실 수입을 저당 잡는 일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납세자에게 빚을 떠넘기는 일이다.’
서명자는 에리카의 아버지였다. 그는 의원이 아니라 재정 자문인으로 의견서를 냈다.
에리카는 글자를 오래 쓰다듬었다. 나는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글을 처음 읽는 순간만큼은 사건을 서둘러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원래 말씀이 없었어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그런데 숫자 앞에서는 무섭도록 고집이 세셨죠.”
“그 고집이 지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에리카는 눈을 훔치고 바로 사본 증명 문구를 작성했다. 아버지의 의견이 옳았다는 감정보다 그 의견이 언제 어디에 제출됐는지 증명하는 일부터 했다.
한편 왕은 어제의 면담 내용을 공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가 유리한 부분만 발췌하려는 건 아닌지 먼저 물었다.
“아니. 내가 회의에 없었다는 사실이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명령한 건 나니까.”
왕은 국왕 명의로 대출 심의를 지시했고, 회의 승인과 담보 약정까지 허용한 적은 없다고 공식 진술했다. 그와 함께 자신이 기억하는 발언도 적었다. 관리인 대리는 ‘왕실 신용을 지킬 수단’을 언급했지만 조세권 양도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고 했다.
진술은 상대에게 반박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법정에 제출했다. 국왕의 기억도 다른 사람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검증 대상이었다.
낮에 마르켈이 변호인 두 명과 함께 찾아왔다.
마르켈을 만나기 전 재무청 직원 하나가 나를 말렸다. 그와 따로 만나면 매수됐다는 소문이 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공개 출입기록이 남는 접견실을 잡고 에리카를 동석시켰다. 면담 목적과 제출자료 목록도 미리 적었다. 상대가 적이라 해도 무조건 문을 닫아걸 수는 없었다.
마르켈은 들어오자마자 자기가 왕실에 8,000금화를 빌려준 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그 대출이 왕국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 돈으로 곡물과 무기를 샀소.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면 그 값은 아깝지 않았겠지.”
“자금이 실제로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전부 흘러간 거야. 정부의 명령을 따라서.”
“계약에 따라 상환받을 권리와 국경의 세금을 걷을 권리는 다른 겁니다.”
그는 내 말을 싫어했다. 하지만 대출금 상계가 이루어졌다는 판결을 직접 공격하지는 못했다. 대신 자신이 받은 ‘담보 예정 증서’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의 상단이 실제로 국가의 통행료를 징수할 수 있다는 주장의 시작점이었다.
에리카는 그에게 세 가지를 물었다. 누가 계약서를 썼는지, 승인자는 누구인지, 어떤 재원으로 이자를 지급할 생각이었는지. 마르켈은 앞의 두 개에는 대답했고, 마지막에는 침묵했다.
“그럼 상단 수익이 아니라 미래의 통행료 수입을 바라본 거군요.”
“우리 상단이 왕국 경제를 살린 것과 무엇이 다르지?”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경제를 살린 사람이 그 나라의 세금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접견이 끝났을 때 우리는 서로 악수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낸 종이에 접수번호를 찍어 돌려주었다. 그에게서 얻은 것은 자백이 아니라 주장과 자료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국왕 진술 사본을 요구했다. 공개 법정 기록이라 제공할 수 있다고 하자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자네는 내게도 증거를 주는군.”
“당신이 반박할 자료를 숨기고 이기면 나중에 판결이 무너집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 제공하지.”
마르켈이 내민 것은 상단 내부 대출심사표였다. 담보 항목에는 ‘왕실 신용권’이라고 적혀 있었고, 평가액은 무려 2만 금화였다.
“팔 수도 없는 권리가 어떻게 값을 매깁니까?”
“거래가 중단됐을 때의 통행료 수입을 할인한 거지.”
“상단이 그 권리를 실제로 갖는다고 판단한 근거는요?”
마르켈은 잠시 침묵했다. 그가 보여준 금액이 대출한 돈보다 많았다. 권리를 취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회수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로 권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면 그 숫자로 다른 투자자를 속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는 담보를 받은 게 아니다.” 그가 말했다. “담보를 받을 예정이라는 보증을 받았을 뿐이다.”
“누구에게요?”
그가 검은 깃털 문양을 짚었다.
“관리인 대리. 그자는 왕과 마왕 양쪽의 허락을 얻었다고 했다.”
나는 상단에 그 주장의 근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마르켈은 당장 주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강제로 책상을 뒤지지 않았다. 대신 기한과 미제출 시 법정에 신청할 절차를 통지했다.
저녁 무렵, 루카스가 흥분해서 달려왔다. 상단이 왕실 담보권을 ‘예정 자산’으로 삼아 소액 투자 증서를 팔았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마르켈의 변호인이 제출한 내부 심사표와 투자 안내문에 같은 평가액이 적혀 있었다.
“그럼 백성들도 왕위에 투자했어요?”
“그렇게 광고했을 수 있지. 아직 실제 판매 여부부터 확인하자.”
우리는 투자 안내문을 읽었다. 맨 위에는 ‘국경 통행 수익 보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작은 글씨로 ‘원금 손실 가능’이 표시돼 있었지만 담보가 승인 전이라는 사실은 보이지 않았다.
라니아가 옆에서 말했다.
“우리 동네 빵집 주인이 이것에 돈을 넣었다고 했어요. 안전한 왕실 증서라면서.”
나는 그녀에게 사람을 직접 조사해 오라고 시키지 않았다. 자발적 신고 창구를 안내하게 했다. 피해자와 증인이 같은 종이를 봤는지, 돈을 누구에게 건넸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날 밤 첫 신고자가 찾아왔다.
신고 접수를 앞두고 우리는 민원인과 법정 증인을 구분하는 짧은 안내문을 만들었다. 일부 투자자는 돈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수익을 기대했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왕실이 원금을 보증한다’는 설명을 듣고 예금을 옮겼을 수도 있었다. 둘을 섞으면 부정한 판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다.
라니아는 안내문을 읽고 한 문장을 수정했다.
“‘귀하는 위험을 감수하였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겁먹어요. ‘판매자로부터 어떤 설명을 들으셨습니까’라고 쓰세요.”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조사하는 문장 하나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현장에서 듣는 사람의 눈으로 읽어 보니 달랐다.
민원 창구에는 금화가 아닌 밀가루 포대를 맡긴 사람도 있었다. 상단 직원이 투자증서 대금을 현물로 받을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대 수량과 당시 시세를 분리해 기록했다. 시장 가격이 달라졌으니 곧바로 현금 금액을 확정할 수 없었다.
노파 하나는 자신이 가진 증서 한 장을 동그랗게 말아 왔다. 구겨진 종이 안에는 ‘왕실 안전 증서’라는 문구가 보였다.
“이걸 사면 국경이 안전해진다고 했어요. 제 손자도 저쪽에 살거든요.”
그녀는 이익보다 방벽이 튼튼해질 거라는 말에 돈을 냈다고 했다. 나는 누구에게 얼마를 냈는지 적고 서명하기 전에 그녀에게 다시 읽어 주었다. 원본은 돌려드리고 대조용 사진과 사본만 보관했다.
밤이 깊자 민원인들 사이에서 작은 논쟁이 벌어졌다. ‘돈이 들어갔을 테니 방벽 수리를 했을 것’이라는 쪽과 ‘애초부터 사기였을 것’이라는 쪽이 맞섰다. 나는 끼어들어 말했다.
“누가 어디에 돈을 넣었는지 아직 모릅니다. 수리비를 실제로 지급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답답해했지만, 적어도 서로에게 화를 내는 일은 멈췄다. 그날 수거한 기록은 여덟 건뿐이었다. 그러나 그중 다섯 건이 같은 수취 계좌 이름을 가리켰다. 제삼 보증 결제소. 이 이름을 피해자들 스스로 모아 준 것이다.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노인이었다. 그는 마르켈의 증서 세 장과 납입 영수증을 내밀었다. 증서에는 경고 문구가 없었고, 발행자 칸에 생소한 이름이 찍혀 있었다.
‘제삼 보증 결제소.’
옛 조폐소에 있던 중간 계정과 같은 문구였다. 사람들은 왕실의 이름을 믿고 돈을 냈다. 그런데 그 돈을 받은 곳은 왕실도 상단도 아닌, 이름만 남은 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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