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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21화
PAYLUA ORIGINAL · 제21화

21화. 왕위를 맡겼다는 영수증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897자

오프라인 책장
왕위. 마왕이 보내온 편지에서 그 단어를 읽은 뒤, 나는 한동안 창문을 열지 못했다. 밖에서는 국경세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들은 상인들이 재무청 앞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환급을 요구했고, 누군가는 정말 안전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편지를 받은 날에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일의 통행료였다. “왕께 바로 보여 드릴 겁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보여 드려야죠. 다만 편지를 판결문처럼 들고 가면 안 됩니다.” 나는 봉투의 봉인 상태를 기록한 뒤 사본을 만들었다. 봉투가 놓인 책상에는 다른 종류의 서류가 쌓여 있었다. 전날 접수된 체불 임금 청구서, 제삼 금고에 보전된 북문 세관 수납금 관련 조사서, 청동왕관 상단의 360금화 사용료 잔액 이의신청. 겉으로는 모두 돈에 관한 문서였지만, 누군가는 주인이 있고 누군가는 아직 없었다. 에리카는 편지를 보자 세르나의 필적부터 물었다. 나는 마왕이 직접 쓴 편지인지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세르나는 공식 전달인으로 봉인을 확인했으나 본문을 누가 썼는지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추후 마계 보관고의 발신기록을 받아야 했다. “마왕의 편지가 진짜라면 누가 왕위를 가져갑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그 말을 먼저 하면 우리도 모르는 일에 이야기만 보탤 거야.” 나는 구멍이 난 종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옛 조약을 보면 ‘왕실’은 국왕 개인, 왕조의 재산, 국가기관을 각기 다른 글자로 나타낸다. 그런데 300년 전 글씨를 새 왕국어로 번역한 사본들은 이 셋을 자주 한 단어로 뭉뚱그렸다. “예를 들어 ‘왕실 수입’이 세금을 뜻할 수도 있고 왕의 사유지 임대료를 뜻할 수도 있는 거네요.” 에리카가 정리했다. “맞아요. 돈이 같은 왕궁으로 들어온다고 같은 권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아는 대한민국의 제도와 이 세계의 법을 그대로 같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왕국 헌장을 먼저 찾아 읽기로 했다. 세금의 목적이 무엇이든, 조세권을 넘길 수 있는지는 이 나라가 결정한 규칙에 달려 있었다. 정오 무렵 라니아가 구호 신청서 한 장을 들고 왔다. 제목은 ‘국왕의 빚 탕감 축하금 지급 요청’이었다. 그녀는 나를 노려봤다. “누가 이런 걸 써서 붙였는지 아세요? 이미 나라에 돈이 생겼으니 급여를 늦게 주면 횡령이라고 하더라고요.”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법정에서 상계한 8,000금화는 갚아야 할 빚이 줄어든 것이지 금고에 8,000금화가 들어온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설명한 공고를 붙였는데도 사람들은 숫자의 크기만 보았다. “임금은 반드시 따로 지급해야 합니다. 상계액을 현금 수입이라고 설명한 사람이 있으면 수정할게요.” “수정이 아니라 임금이 필요한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다. 라니아는 나를 책망한 뒤 오히려 다른 노동자들의 청구서 정리에 협조했다. 그날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우아한 설명이 아니라 다음 주에 빵을 사 줄 돈이었다. 나는 재무청에 급식소와 일용직 임금의 우선 처리 가능액을 계산해 달라고 요청했다. 편지를 받은 뒤에도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서신에는 왕위라는 단어만 있을 뿐, 담보를 제공한 주체와 시기, 채무의 범위가 빠져 있었다. 마왕의 말이 사실이라도 우리 법이 왕위를 물건처럼 넘길 수 있게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루카스가 물었다. “왕위도 금화처럼 맡길 수 있나요?” “왕관을 빌려줄 수는 있어도 왕이 될 권리를 마음대로 파는 건 별개의 문제야.” “그러면 마왕이 사기를 당한 거예요?” “그럴 수도 있고, 마왕도 우리가 모르는 계약을 알고 있을 수도 있어. 오늘 할 일은 모르는 부분을 표시하는 거야.” 나는 종이 위에 세 칸을 그렸다. 확인된 사실, 상대의 주장, 아직 없는 증거. 세르나가 직접 건넨 편지는 둘째 칸에 놓았다. 마왕이 지난달 약초방 거래세 12금화를 낸 영수증은 첫째 칸이었다. 그 둘을 한데 묶어 ‘마왕이 왕국의 채권자’라고 쓰는 사람은 아직 없어야 했다. 알현실에서 아델리온 왕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삼 년 전 나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누구에게서요?” “검은 깃털을 단 관리인 대리에게. 대출이 갚히지 않으면 왕실의 신용을 보증할 새로운 방식을 적용할 거라고 했다. 나는 왕위를 담보로 내놓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왕은 삼 년 전의 회의록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로웬은 회의 출석자 명단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날의 기록에는 군무차관 레온하르트, 전임 재무대신 오스윈, 청동왕관 상단 대표 마르켈의 이름이 있었다. 국왕의 이름 옆에는 불참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폐하께서는 불참하셨군요.” “회의를 열라고는 했다. 전쟁 물자 가격만 먼저 조정하라고.” “그 지시를 문서로 남기셨습니까?” “남겼을 것이다.” ‘남겼을 것이다’는 법정에서 가장 비싼 문장 중 하나다. 문서를 찾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우리는 왕실 보존고에 열람을 신청했다. 오렐 문지기는 세 개의 출입 인장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어 주었다. 왕이라 해도 기록 보존 절차를 건너뛰면 열람 사실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고집이었다. “직무를 지나치게 성실하게 수행하시는군요.” 내가 말했다. “이곳에 잠든 종이들 중에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있습니다. 제가 대신 입을 다물어 줘야 하지요.” 루카스는 소리 죽여 웃었다. 우리는 삼 년 전 청동왕관 대출 관련 부속 목록을 찾았다. 회의록은 있었고, 실제 대출 원본도 있었다. 하지만 ‘왕실 신용 보전 약정’이라는 제목의 부속서에는 빈 공간만 남았다. 목록표에는 분명 세 번째 서류로 기재돼 있었다. “누가 가져갔습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오렐은 출입 대장을 가리켰다. “반출이라면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출이 아니라 ‘보관 위치 정정’으로 적혀 있군요.” 정정 담당자 칸에 이름 대신 검은 깃털 인장이 눌려 있었다. 정정일은 왕실 대출 계약일보다 이틀 뒤. 세르나가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했던 바로 그 대리 인장이었다. “이 인장이 법적 권한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당시에는 보관고가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오렐이 말했다. “저도 그 판단이 맞았는지 다시 묻고 싶습니다.” 그는 최근의 정정 절차와 과거 절차를 비교할 수 있도록 원본 서식까지 건넸다. 오렐은 우리에게 왕실 장서 관리 규칙도 보여 주었다. 서류가 이동할 때는 원본 두 장에 각각 관리인의 손도장을 남겨야 했다. 삼 년 전 목록표에는 한쪽 도장만 있었고, 다른 칸에는 문자 대신 은색 점 세 개가 찍혀 있었다. “혹시 마계에서 쓰는 표식입니까?” 에리카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때는 군무청 보관 담당자가 와서 ‘긴급 재정 문서라 예외’라고 했어요.” “예외를 승인한 사람 이름이 있습니까?” “그걸 찾고 있습니다.” 오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는 삼 년 전 담당자를 따로 탓하지 않았다. 자신이 왜 표식을 의심하지 않았는지도 명확하게 인정했다. 왕실에서 공인한 인장 보관실의 도장이 있었으므로 정식 문서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열람을 끝내고 나오는데 에리카가 작은 종이 조각을 떨어뜨렸다. 나는 주워서 돌려주려다 그 위의 글씨를 보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배웠다는 계산법이었다. 지출은 언제, 누가,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지급했는지를 넷으로 나눠 기록한다는 규칙. “아버지가 이걸 쓰셨나요?” “아버지는 아무리 급해도 네 칸을 빼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나는 빈 칸 하나를 더 그렸다. “그럼 다섯째도 넣어야겠네요. 그 서류를 볼 권한은 누가 줬는지.” 에리카는 한참 종이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다섯 가지를 이번 조사표의 기본 항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거창한 마법으로 진실을 드러내지 않아도 사건을 좁혀 가는 방법은 있었다. 오렐이 우리 편이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지킨 규칙이 누군가에게 악용됐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었다. 오후에 세르나가 재무청으로 왔다. 그가 오기 전 나는 왕에게 전달할 보고서 초안을 한 번 더 읽었다. ‘왕위 담보 계약 발견’이라고 썼던 제목을 지우고 ‘왕실 과세 대리권 관련 계약 목록 발견’으로 바꿨다. 사람들은 제목을 읽고 본문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결론을 적으면 그 결론이 사실처럼 퍼진다. 로웬은 제목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걸 신문사에 보여주면 다들 우리가 조세권을 빼앗겼다고 쓰겠지.” “자료가 공개 가능한 단계가 되면 원문과 확인 범위를 함께 설명해야 합니다.” “그 전에 소문이 퍼지면?” “소문 때문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뒤 왕성 바깥에 실제로 ‘마왕이 왕관을 샀다’는 전단이 붙었다. 전단 한 장에는 드래곤까지 마왕에게 금을 빌렸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나는 루카스에게 전단을 떼어 오라고 하지 않았다.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에리카는 전단의 인쇄상태를 살폈다. 같은 판에서 찍은 종이 여러 장이 한꺼번에 배포된 듯했다. 왕국에서 가장 큰 인쇄소는 청동왕관 상단과 거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인쇄소의 종이라는 이유로 상단이 소문의 배후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전단을 보관하고 정정 공고를 게시했다. 라니아가 공고문을 읽더니 말했다. “사람들이 왕관을 팔았다고 떠들 때 우리는 줄 서서 월급을 달라고 해야겠네요.” “그 둘은 별개 사건이지만, 같은 예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습니다.” “또 별개라네요.” 그녀는 툴툴대며 다음 민원인을 불렀다. 민원인들은 전단보다 자기가 낸 영수증을 더 오래 들여다봤다. 나는 그들의 관심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라의 위기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단위는 대개 한 가족의 생활비였다. 그는 밤의 약초방 영수증 사본을 펼쳐 보더니 이상한 말을 했다. “폐하께서 이 영수증을 보고 웃으셨다.” “마왕도 세금을 내고 기분이 좋았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정확히는 납부 범위를 적은 단서 조항을 보고. 누구도 폐하의 이름을 빌려 다른 채무를 인정했다고 주장할 수 없게 해 놓았더군.” 나는 편지 이야기를 꺼냈다. 세르나는 왕위라는 단어가 고대 마계어에서 ‘왕관의 자리’와 같은 단어로 쓰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왕위 계승권뿐 아니라 왕실이 세금과 통행을 허가하는 공식 좌석을 가리킬 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위가 아니라 징세권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번역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원문과 부속 계약을 보아야 한다.” “마왕께서 원본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분에게 있는 것은 당사자 통지서다. 왕국 측 원본과 중간 보증인의 대조본이 빠져 있다.” 나는 불편한 사실을 발견했다. 서로 다른 세 곳에 있어야 할 원본 세트 중 두 곳의 서류가 비어 있었다. 이건 누군가가 문서를 훔쳤다는 증명이 아니었다. 다만 의도적으로 확인 가능성을 줄인 사람에게는 유리한 구조였다. 저녁에는 민원 창구가 닫히지 않았다. 불법 방벽세 피해자 스물세 명이 손글씨 영수증과 목패를 들고 찾아왔다. 라니아는 그들에게 접수번호를 나눠 주고, 환급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반복했다. “돈을 돌려준다는 말은 못 하겠는데, 접수했다는 말은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정확했다. 나는 라니아에게 내일 더 많은 사람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손바닥의 잉크를 털며 대답했다.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아도 줄을 서는 건 처음이거든요. 그러니 더 오게 하세요.” 그날 밤 왕실 보존고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 오렐이 보관 위치 정정표의 뒷면에서 마른 풀잎 하나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일반 종이가 아니라 옛 조폐소에서 사용하던 내화 기록지 조각이었다. 그 표면에는 계약 번호의 마지막 다섯 자리가 눌려 있었다. 우리는 그 번호를 대출 원장에 대조했다. 대출 계약이 아니었다. ‘왕실 통행·과세 대리권 예치 계약.’ 나는 펜을 멈췄다. 왕관을 빼앗지 않고도 왕국의 돈줄을 쥘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누군가 삼 년 전 그 방법을 종이에 적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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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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