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회의에 오른 문서는 불에 탄 검은 장부도, 왕실 인장이 찍힌 조세 명령도 아니었다. 한 장의 사무실 사용 설명서였다. 표제는 ‘최종 열람 신청서 자동 입력 및 서명 면제 절차’. 문서청의 젊은 관리인 엘다르가 책상 위에 놓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잠시 말을 잃었다.
“이건 일반 민원용 임시 서식입니다. 동의한 사람의 이름을 반복해서 적지 않게 해 주는 기능이죠.”
“누가 동의했는지는 어디에 남습니까?” 내가 물었다.
“원본 접수창에 있어야 합니다.”
“그 원본이 없는 경우에는요?”
그는 천천히 설명서를 뒤집었다. 공용 전송함을 사용할 때 ‘이전 수신자 자동 채움’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누군가 이 기능을 ‘직전 신청인 자동 승계’로 바꿔 놓았다면, 수신자의 이름이 신청인의 자리에 복사될 수 있었다. 엘다르는 그 기능을 시험용 판형에서는 재현할 수 있다고 했다. 재현 가능한 오류와 실제 사건에 사용된 오류는 다른 증거가 필요했다. 우리는 관련 장치의 봉인을 유지하고 작업 이력을 받아 보기로 했다.
사일라는 190화의 접힌 원본을 보존관실 창 아래로 가져왔다. 한쪽 끝이 물에 불었다가 말라 비틀려 있었다. 고대 문구의 선은 현미경을 통해 보아도 일부만 읽혔다. 그런데 붉은 선 아래에는 완전히 다른 결의 자국이 있었다. 인쇄판을 세게 눌렀을 때만 생기는 직사각형 압흔이었다. 삼우 문서대행이 사용하는 현대 판형과 폭이 가까웠다.
“그러면 누가 고대 원본을 고쳐 쓴 겁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감정인이 고개를 저었다. “같은 봉투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과 원본 위에 직접 인쇄했다는 사실도 아직 구분해야 합니다. 얇은 덧종이가 누르며 남긴 자국일 수 있습니다.”
나는 루카스를 데리고 실물을 다시 보았다. 그는 예전 같았으면 자국 하나로 범인을 찾았다며 들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의심이 증거가 되려면 어떤 고리가 필요한지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서기는 천재적인 추리보다 성실한 구분으로 시민을 보호할 수 있었다.
에리카가 제2권의 접힌 문장을 펼쳤다. ‘제12단위 미수령 시 관리기한 기산 불가.’ 불에 그을린 부분의 판독은 이미 예비 감정이 끝났다. 그 아래 누군가 최근 붙인 종이는 ‘기산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 글자가 빠진 듯했지만 그것으로 누군가가 얼마를 벌었다고 계산할 수는 없었다. 가짜 기산일로 청구한 금액이 실제 수납됐는지, 누구 계정으로 갔는지 따로 확인해야 했다.
“서식의 빈칸이 수익이 된 겁니다.” 내가 말했다.
에리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지키려던 것도 빈칸이었군요. 제2권은 아직 받지 않은 것을 받았다고 쓰지 않기 위한 책이었을 거예요.”
“맞습니다. 다만 그분이 왜 죽었는지는 그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사실을 아끼는 일이 사람의 슬픔을 줄이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틀린 확신으로 위로를 만들면, 그 확신이 무너질 때 남는 상처가 더 깊었다.
점심 뒤 장인 로흐가 편지 한 통을 전달했다. 붉은 절벽의 드래곤 카르디온이 보낸 것이었다. 그 용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된 보전 평가액 340금화를 실제 세금으로 계산한 광고지를 발견했다고 했다. 편지 끝에는 단호한 문장이 있었다.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내 금고를 타인의 상상으로 채우지는 말라.’
“카르디온 님도 이제 세무조사관처럼 말씀하시네요.” 루카스가 웃었다.
“원래 자기 재산과 타인의 재산을 구분하는 데는 누구보다 엄격한 분이야.”
우리는 340금화를 ‘드워프 후손 신탁 보전 요청의 과거 평가액’으로 다시 표시해 모든 공개 보고서에 넣었다. 돈이 봉인돼 있다는 사실과 실제 금화가 오갔다는 사실도 다르게 적었다. 부정확한 숫자는 소문보다 오래 산다. 한번 장부에 잘못 넣으면 다음 장부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엘다르에게 자동 채움 오류를 시험하던 날의 상황을 더 물었다. 그는 연습판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가 다음 작업자의 신청서에 이름이 남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웃어넘길 만한 실수였다. 그러나 현행 조세나 보관권에 연결되면 한 사람의 작은 클릭이 다른 사람에게 청구서가 되는 문제였다. 엘다르가 자신의 과실을 먼저 인정하자 회의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증언은 변명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기계에 경고창을 만들면 될까요?” 그가 물었다.
“경고창이 있다는 사실을 법적 동의로 보지 않는다면 도움이 되겠죠. 더 중요한 건 경고를 무시한 사람의 기록보다 실제 당사자의 의사입니다.”
그는 당장 시제품을 고쳐 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법원 보존 장치에 손대지 말라고 했다. 증거가 된 기계는 완성도가 낮아도 그대로 두어야 했다. 새 기능은 별도 시험판에서 검증하고, 기존 장치는 봉인을 풀기 전 원래 상태를 사진과 점검표로 기록하도록 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사람들에게 증거 보존이라는 조건은 번거로웠다. 그렇지만 그 번거로움이 없으면 이후 어떤 점검도 믿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재무청 일반 접수대에서도 시험했다. 루카스가 ‘가상의 상인’을 적고 금액을 비워 두자 장치는 이전 거래액을 친절하게 제안했다. 상인은 그 금액을 실제로 벌지 않았는데, 화면은 이미 채워진 숫자를 진실처럼 보이게 했다. 나는 루카스에게 영수증을 가져오지 않은 거래를 그대로 확정해 보라고 했다. 그는 손을 뗐다. “이걸 확정하면 없는 거래에 세금이 붙겠네요.”
“그래. 잘못된 숫자를 기계가 만들어 냈다고 해도, 그것을 승인한 기관의 책임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 장면을 본 기록실 직원은 장치를 폐기하자는 의견을 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자동 계산은 시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단, 계산이 어떤 자료에 기초하고 누가 확인했는지 보여야 했다. 우리는 시험판 화면 아래에 ‘입력된 값은 증빙 확인 전 임시 표시’라는 문구를 넣었다. 그 작은 문장은 숫자가 권위가 되는 순간을 늦췄다.
나는 한국에서 처음 배웠던 세무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그 프로그램 역시 아무리 똑똑해도 손에 쥔 영수증을 대신할 수 없었다. 세계가 달라져도 장부의 문제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내가 아는 기술을 여기서 영웅의 능력으로 과장하고 싶지 않았다. 잘못 사용하면 똑같이 사람을 다치게 할 테니까.
저녁이 다가오자 보호기관에서 메라의 서면 답변을 보내 왔다. 메라는 자신의 거절 의사를 공개 명부로 옮기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의사가 법원에서 효력을 가진다는 설명을 받았고, 필요할 때 보호된 경로로 확인하겠다고 했다. 마이렌은 소환장을 보내지 말고 질의서를 통해 필요한 사실만 묻기를 원했다. 둘은 서로를 대신해 결정하지 않았다.
엘다르는 자동 입력 장치의 사용 이력을 추가로 제출했다. 며칠 전 ‘신청인 서명 면제’ 상자가 수신자 이름 자동 채움과 묶여 실행된 작업이 있었다. 접속 위치는 조합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공용 회선. 작업 이름은 ‘완료 검증’. 실제 손이 누구 것이었는지는 아직 화면 밖에 있었다.
“그럼 수사를 어디로 옮깁니까?” 사일라가 물었다.
“완료 검증을 돈으로 바꾼 계약을 찾아야죠. 기계는 동전 주머니를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나는 삼우의 판형 비용 청구서와 조합의 민간 광고비 명세를 함께 읽었다. 서로 다른 회사 이름 아래에 같은 주문번호 꼬리가 보였다. 우연인지 공동 조달인지 확인할 자료가 필요했다. 끝번호 네 자리를 두 번 세었다. 한 번은 인쇄판 주문서에서, 한 번은 주민에게 건넨 ‘권리 연장’ 안내지에서.
창밖으로 왕도 저녁 종이 울렸다. 한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 번째 울림과 소환의 비밀을 떠올렸다. 이날은 달랐다. 기계가 잘못 쓰인 자리에 누가 비용을 승인했는지 묻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납부 의무는 주문서에서 생기지 않는다. 사람의 운명도 남이 체크한 작은 칸에서 정해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확인한 구형 문구의 현대적인 뜻이었다.
제19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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