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회계 법정의 보존실에서는 함부로 ‘처음’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최초의 증인, 최초의 계약자, 최초의 수령자. 그런 표현이 붙는 순간 사람들은 첫 번째 이름만 찾으면 모든 문제가 끝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번 보관 장소를 옮긴 물건에 최초라는 말이 붙으려면 적어도 무엇을, 누구에게, 언제 건넸는지를 따로 증명해야 했다.
170화 마지막에 발견된 금속함은 아직 열리지 않은 채 감정대 위에 놓였다. 폭은 내 팔뚝 정도였고, 네 귀퉁이에 닳은 흔적이 있었다. 시설 관리인은 열두 번째 의자 아래에 쇠고리를 빼내다가 함을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나는 발견 경위를 그가 본 순서대로 적었다. 의자 아래에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그러나 의자 제작 때부터 있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금속함을 숨겨 놓은 누군가가 ‘과거의 비밀’이라는 제목을 미리 붙이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일라 감정관은 함의 뚜껑을 돌려 보지 않았다. 먼저 작업대의 수평을 확인했고, 봉인 번호와 전날 촬영된 사진의 나사 위치를 대조했다. 나사 두 개는 검게 산화됐지만 세 번째 나사의 홈에는 최근 공구 자국처럼 보이는 밝은 선이 있었다. 드워프 장인 로흐가 확대경을 들이대자 에리카가 물었다. “그럼 누가 최근에 열었다는 뜻인가요?” 로흐는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긁혔을 수 있다는 뜻이지. 공구의 종류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아직 모른다.”
나는 세 개의 범주를 기록했다. 확인된 외형, 감정이 필요한 흔적, 그리고 우리가 추측하고 싶은 이야기. 이 셋을 한 문장에 담으면 누군가는 나중에 그 문장을 판결문처럼 인용한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민간 조합이 수령증 한 장으로 영업권과 보관료를 팔아 온 경우에는 더 조심해야 했다.
“열기 전에 확인할 게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상자 안에 개인의 비공개 증언이나 생존 정정 기록이 있다면 누가 보게 됩니까?”
법원 보존관 오렐이 준비한 열람표를 내밀었다. 감정관 두 명, 법원 지정 기록인 한 명, 실물 보관 경위를 확인할 공무원 한 명. 에리카는 본인 명의의 신청서와 직접 관계된 부분에만 참관하고, 마이렌과 메라의 자료가 나오면 보호기관 담당자가 공개 범위를 정하기 전까지 이름을 가리는 절차였다. 나는 태준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 표에서 특별한 권한을 얻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이름이 쓰인 서한이 수사 대상이므로 나는 증거 보존과 수사 의견 제출 역할에 머물렀다.
에리카는 손을 비볐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검은 장부는 두 권이었다. 실제로 인계된 물건을 기록한 제1권과, 인계할 예정이라고 주장하는 제2권. 같은 물건이 두 권에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어느 쪽이 아버지의 손글씨인지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죽음을 설명하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살아 있는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 데 사용했다면 밝혀 주세요”라고 했다.
함을 흔들지 않고 외부 두께를 측정하던 사일라가 눈을 좁혔다. 뚜껑 가장자리에는 두 종류의 판금이 포개져 있었다. 아래쪽 금속의 이음매는 거칠고, 위쪽 띠는 규격이 비교적 일정했다. 서로 다른 시기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빨랐지만, 하나의 장인이 한 번에 만든 완전한 한 벌로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는 함과 쇠고리, 의자 바닥의 설치 흔적을 별도 시료로 관리하기로 했다.
법원의 비파괴 검사 허가가 떨어진 뒤 로흐는 함에 약한 빛을 통과시켰다. 내부에는 얇은 판 모양의 물체 두 개와 접힌 종이 비슷한 물체 하나가 있었다. 그러나 겹쳐 보이는 그림자만으로 재질은 알 수 없었다. “사람의 이름은 보입니까?” 누군가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멈추게 했다. 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이름부터 찾아서는 안 됐다.
그날 개봉 절차가 지연되는 동안 기록실에서는 뜻밖의 논쟁이 일어났다. 한 관리인이 금속함이 궁전 내부에 있으니 당연히 왕실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로흐는 곧바로 반문했다. “드워프의 보관품을 왕국 성벽 안에 잠깐 맡기면 왕이 주인이 되나?” 관리인은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논쟁을 끝내기 위해 보관 위치와 법적 귀속을 적는 양식 두 장을 가져왔다. 소유권을 판단할 만큼 자료가 없다면 그 칸을 비워 두면 됐다. 빈칸을 남기는 일은 무능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존중이었다.
루카스는 민간 상인들의 질문을 따로 정리했다. 금속함이 열리면 보관료를 내야 하는지, 이미 낸 돈을 왕실에서 돌려주는지, 오래된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모두 법정에 나와야 하는지 물었다고 했다. 나는 셋 모두 그렇다고 확인된 바 없다고 답하고 공고문에 적었다. 우리가 금속함을 발견한 뒤 새 세금을 만들지도 않았고, 민간 돈을 국고에 모으지도 않았으며, 누구의 출석 의무도 발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서류 위에 작은 글씨로 썼을 때는 밋밋했지만, 시장에서는 그 공고 하나 때문에 가게 문을 닫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었다.
오렐이 개봉 작업대를 정리하며 나에게 시험용 봉인 종이를 건넸다. 실제 증거가 아닌 빈 종이였다. 내가 번호를 적자 그는 또 하나의 칸을 가리켰다. ‘개봉 입회자 이름.’ 나는 내 이름을 적고 한동안 바라봤다. 누군가는 나중에 이 이름을 보고 내가 함의 내용을 승인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옆에 내가 실제로 한 일을 썼다. ‘외형 확인 절차에 입회함. 내용과 권리 관계는 확인하지 않음.’ 오렐은 잠시 그 문장을 살피더니 앞으로 쓸 표준 서식에 넣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좋다고 했다. 사람들이 증언의 범위를 명확히 적게 된다면 적어도 다음 사건은 조금 줄어들 것이다.
그때 문서청에서 온 루카스가 오래된 수령 대장의 목록을 보여 주었다. 같은 함 번호가 적힌 종이가 셋이었다. 첫 번째에는 ‘보전함’, 두 번째에는 ‘대리 인계 대기함’, 세 번째에는 ‘최초 수령자 확인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잉크색, 종이의 두께, 필체가 달랐다. 루카스는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며, 장부 표제는 추후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면 최초 수령자라는 이름도 누군가 나중에 붙였을 수 있네요.” 에리카가 말했다.
“맞습니다. 중요한 건 표제를 믿느냐가 아니라 표제가 언제 붙었는지입니다.”
나는 한때 한국에서 조사하던 회사의 출고 명세를 떠올렸다. 영수증을 못 찾은 회사는 물건이 사라졌다고 주장했고, 물건이 발견되자 이번에는 애초에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로 반대되는 주장인데 근거는 똑같은 빈칸이었다. 빈칸에 자신에게 유리한 말을 적는 사람은 흔했다. 여기서는 그 빈칸에 사람이 앉았다는 기록까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봉인 개봉 시각이 다가오자 법원 서기관이 최종 범위를 다시 읽었다. 재질의 안전성 확인, 내부 목록 작성, 적법 보존. 소유권 및 오래된 협약의 해석은 그다음 심리로 넘긴다. 현재 어느 누구도 금속함을 근거로 대리 승인하거나 보관료를 청구할 수 없다. 재판관의 명령이 내려온 뒤에야 사일라가 첫 번째 잠금 고리에 공구를 걸었다.
상자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오래된 걸쇠를 억지로 꺾으면 내부의 종이도 손상될 수 있었다. 로흐는 그 자리에서 작업을 멈추고 구조 도면을 다시 그렸다. 오후 내내 공구 소리 대신 연필 긁히는 소리만 들렸다. 방청석에서 기대하던 극적인 개봉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 지연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누군가의 권리가 안에 있다면 성급한 호기심이 그것을 찢어서는 안 됐다.
저녁에 임시 작업 허가가 재발급됐다. 고리의 홈을 따로 지지하고 아주 조금만 움직이자 덮개가 손가락 두께만큼 들렸다. 사일라는 내부를 건드리지 않은 채 사진을 찍었다. 그 아래에 접힌 얇은 판이 보였다. 판의 가장 윗줄은 먼지에 가려졌고 그 밑에 쓰인 문장만 드러났다.
‘수령되었다고 적힌 것은 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거절을 보전하라는 부탁이다.’
나는 문장을 그대로 수첩에 옮겼다. 그 글이 오래됐는지, 정말 원본에 속하는지는 아직 몰랐다. 그래도 오늘 처음으로 질문이 달라졌다. 우리가 찾던 최초 수령자는 어떤 재산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거절을 받은 사람일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 뒤에 누가 그 부탁을 소유권으로 바꾸었느냐였다.
제17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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