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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17화
PAYLUA ORIGINAL · 제17화

17화. 검은 깃털의 보증인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5,986자

오프라인 책장
국왕은 검은 깃털이라는 말을 듣고 잔을 놓쳤다. 은잔이 바닥에 떨어져 소리를 냈다. 알현실의 대신들이 일제히 굳었다. 나는 왕이 왜 놀랐는지 물어보려다 잠시 멈췄다. 국왕이 아는 것을 감추고 있었다면, 사람들 앞에서 몰아붙이는 건 올바른 조사가 아니었다. 대신 공식 비공개 면담을 신청했다. 아델리온 왕은 대신들을 물리고 로웬과 나만 남겼다. 창문 틈으로 오후 햇빛이 들었다. 왕은 오래된 나무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내 아버지는 내가 열다섯 살 때 이 상자를 보이셨다. 검은 깃털을 가진 자가 찾아오면 서명을 요구할 테니 결코 혼자 결정하지 말라고.” 상자에는 세 갈래 깃털이 새겨진 쇠패가 있었다. 뒷면은 마모되어 있었다. 왕은 어린 시절 그 설명을 미신으로 여겼다고 했다. 삼 년 전 마르켈이 왕실에 대출을 제안할 때 옆에 서 있던 인물이 비슷한 쇠패를 달고 있었다는 것이다. “누구였습니까?” “얼굴을 가렸어. 명함에는 ‘조약의 보증인’이라고 적혀 있었지.” “폐하께서 그때 직접 서명하셨습니까?” 왕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군수품 대금을 급하게 마련해야 했다. 마르켈이 팔천 금화를 빌려주고, 그자가 마계 거래의 정산을 보증한다고 했어.” “보증인의 임기가 이미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몰랐다.” 내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는지 왕이 먼저 말했다. “나도 속았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다. 재가한 문서가 있다면 책임져야겠지.” 나는 왕의 말을 그대로 기록했다. 국왕의 무지가 면책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알고 의도적으로 가짜 서류를 만들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당시 서명 원본과 보좌했던 사람의 진술입니다.” 왕은 상자 밑에서 대출 협상 참석자 명단을 꺼냈다. 오스윈, 마르켈, 레온하르트, 셀딘. 그리고 이름 없이 ‘관리인 대리’라고 적힌 인물 하나. 참석자 서명 칸에는 세 갈래 깃털 문양만 있었다. “이 사람이 모든 회의에 참석했습니까?” “첫날과 마지막 날에만.”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마계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끼리 계산하면 된다고 했어.” 나는 그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세르나의 장부에는 마계가 방벽 유지료를 받지 못했다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왕실에 ‘마계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해 놓고, 매달 마계 유지료 명목으로 돈을 이체하게 했다면 모순이었다. 왕은 상자를 닫고 말했다. “강태준. 그대는 나를 조사할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결재 경위는 조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폐하가 죄를 지었다고 결론 낸 건 아닙니다.” “겁나지 않나?” “겁납니다. 하지만 더 겁나는 건 왕이 결재한 문서라는 이유로 아무도 보지 않는 겁니다.” 왕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식 기록으로 남겨라.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몰랐는지.”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이 나라가 조금은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현실을 나온 뒤 에리카는 한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왜 침묵하는지 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누구를 조사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아직 다 알아낸 건 아닙니다.” “그래도요. 이 사람들이 같은 방에 있었군요.” 그녀는 서명 명단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오스윈, 마르켈, 레온하르트. 삼 년 전 창고 화재와 연결되는 이름이 이미 셋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겹친다고 공모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한 번 더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회의 참석 사실 다음의 기록입니다. 어떤 지시를 했는지, 돈을 어디로 보냈는지.” “알아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런데 가끔은 그다음 기록이 영영 안 나올까 봐 무서워요.” “그럼 지금 남아 있는 걸 잘 보관해야죠.” 나는 그녀와 함께 국왕의 진술을 두 부 작성했다. 하나는 감사원, 하나는 법정 서고. 왕실 측에서 원본을 바꾸었다고 의심받지 않도록 중립 서기에게 인증을 받았다. 알현실 바깥에서는 또 다른 작은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실 관리들이 신임 감사원의 예산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부서라 펜과 인주도 부족했다. 그런데 어느 대신은 은도금 명패를 먼저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사원이 다시 열렸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 상징물이 필요합니다.” “그 상징물이 서류를 읽어줍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강태준 징수관. 체면이란 게 있습니다.” “물론이죠. 그래서 명패보다 먼저 시민의 민원을 받을 창구가 필요합니다. 접수번호가 찍히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의 청원이 어디 갔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대신은 은으로 도금한 글자를 가리키며 기어코 품격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게 장부를 보여주었다. 잉크 두 통과 인주 하나, 시민용 공개 게시판과 감사원 직원 둘의 체불 수당. 현재 예산으로 은도금 명패를 주문하면 그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다. “그럼 동판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정말 좋은 생각이네.” 대신이 뿔난 얼굴을 했다. “왕실 감사원에 값싼 동판이라니!” “이제 나라 빚도 상계로 겨우 없앴습니다. 체면은 결산이 끝난 뒤 사도 늦지 않습니다.” 에리카가 조용히 덧붙였다. “기존 감사원 명패가 창고에 남아 있습니다. 먼지를 닦으면 됩니다.” 그 말에 대신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래된 황동 명패를 닦아 현관에 다시 걸었다. 손때가 묻은 글씨가 은도금보다 훨씬 근사했다. 잠시 뒤 왕궁 관리인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징수관님, 그 명패의 제작 연도를 기록해야 합니다. 전임 감사원장이 계셨을 때 만든 물건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번에 새로 만든 것처럼 홍보하지 마세요.” “왜요? 얼마 전에 다시 열었는데.” “기관을 재개한 것과 새 금속을 만든 건 서로 다른 일입니다.” 루카스가 비죽 웃었다. “징수관님은 숫자뿐 아니라 명패에도 엄격하시네요.” “명패에 과도한 예산을 쓰는 순간 국고가 울기 시작하지.” 에리카가 낡은 명패를 두드렸다. “아버지도 이걸 보셨을까요?” “아마 보셨겠죠. 이 기록들이 사라지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그녀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위로할 말을 찾는 사이, 복도 끝에서 사람들이 갑자기 양쪽으로 갈라졌다. 경비병이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짐승이…… 아니, 손님이 왔습니다. 뿔이 두 개 있고 몸에서 열이 납니다!” “열병 환자라면 치료사를 불러야죠.”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문서 하나를 들고 왕실에 들어오겠다고 합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세계 최고의 위협 중 하나가 결국 또 서류 한 장을 들고 왔다니. 그때 모퉁이에서 붉은 머리 남자가 여유롭게 걸어 나왔다. 그는 첫날의 거대한 용보다 훨씬 작았지만 표정은 똑같이 거만했다. 그리고 한손에는 잘 접은 영수증을 들고 있었다. 그때 뜻밖의 손님이 왔다. 드래곤 카르디온이었다. 정확히는 사람 크기로 줄어든 붉은 머리 남자였다. 뿔 두 개가 머리 위에서 작게 빛났다. 경비병들은 당황했지만 그는 손에 어제 발급받은 수납증을 흔들었다. “나는 합법적인 납세자다. 길을 비켜라.” 루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 이름을 쓰던 놈들 때문에 동굴 앞에 손님이 많아졌다. 내 금을 빌려 달라는 인간들이 줄을 섰지.” “신탁 재산이라 빌려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겠군요.” “맞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용은 작은 동전 하나를 꺼냈다. 한쪽 면에는 사람 왕의 얼굴이, 다른 쪽에는 검은 깃털 세 개가 새겨져 있었다. “오스윈이 삼 년 전 내게 가져왔던 대가다. 내 서명을 대신했다며 기념품이라고 던져놓더군.” 나는 동전을 즉시 만지지 않았다. 먼저 사진 대신 탁본을 만들고, 소유자 카르디온의 진술을 적었다. 용은 그런 절차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아느냐?” “일단 출처가 중요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건넸는지가요.” “인간들이란.” 그가 코웃음을 쳤지만 끝까지 협조했다. 탁본을 뜨자 동전의 작은 문자 하나가 드러났다. ‘보증인 위임 인장 제육호.’ 제팔 봉인실 문서에 있던 문구와 비슷했다. 세르나에게 탁본을 보내자 답이 왔다. 그것은 정식 보증 관리인의 인장이 아니라, 과거에 퇴출된 관리인의 위임 인장이었다. 백 년 전 갱신 심사에서 사라졌어야 할 문양이라고 했다. “왜 퇴출됐습니까?” 내가 물었다. “계약 상대의 돈을 담보로 자기 채무를 갚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삼 년 전 상단의 광산 사용료를 왕실 채무와 얽어 놓은 일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러나 같은 방식이라고 해서 같은 범인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옛 사기를 흉내 낸 사람일 수도 있었다. 나는 동전의 금속 구성과 제작 시기를 감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르디온은 잔을 들었다 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인간. 마왕에게는 왜 아직 세금을 안 받았느냐?” “누가 내야 하는지 아직 확인 중입니다.” “네 입으로는 모든 거래에 세금이 있다지 않았나?” “법에 정한 거래에는요. 마왕의 것이 아닌 거래에 마왕 이름을 붙이는 건 안 됩니다. 용께도 그렇게 했고요.” 카르디온은 한참 날 보더니 크게 웃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다. 내 금을 가져갈 수도 있었는데 안 가져갔지.” 그는 떠나기 전 내 손에 붉은 돌 하나를 놓았다. 용의 체온이 남은 작은 돌이었다. “내 이름으로 또 누군가 서류를 만들면 이 돌을 깨라. 나는 증인으로 다시 오겠다. 다만 내가 돈을 대신 내주진 않을 것이다.” “그런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용이 나간 자리에는 따뜻한 기운이 한동안 남았다. 에리카는 책상에 남은 그을음을 손가락으로 건드리지 않았다. “저분은 자기가 낸 돈이 왜 다른 비용을 없애주지 않는지 정말 모르시는 걸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면서도 한번 우겨본 것 같아요. 세금 납부자도 가끔은 흥정을 하니까요.” 잠시 뒤 에리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이 나라에 온 뒤 처음 듣는 그녀의 편한 웃음이었다. 카르디온이 돌아간 뒤 루카스는 벽에 붙은 세계 지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왕도 저렇게 와서 세금을 내면 좋겠어요.” “그러게.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먼저 정확한 납부 의무를 밝혀주는 거야.” 저녁에 인장 감정사가 결과를 보내왔다. 동전의 금속은 삼 년 전에 주조된 것이었고, 공식 왕실 주조소에서 만든 흔적은 없었다. 위임 인장을 흉내 낸 복제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오스윈이 용에게 보였던 권한도 처음부터 가짜일 수 있었다. 늦은 오후 카르디온은 뜻밖에도 내게 초대장을 한 장 요구했다. 인간의 재판에 출석할 때마다 병사들이 창을 들고 몰려드는 게 성가시다는 것이었다. “용에게도 증인 출석 통지를 보냅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필요하면 보내지. 다만 출석할 장소와 시간이 지정돼 있어야 해.” 용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언제든 법정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판관은 사건 당사자에게 질문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나중에 정식 증인으로 필요할 때 소환 절차를 밟겠다고 설명했다. “그럼 나는 언제 부르느냐?” 카르디온이 말했다. “인장 감정과 출처 확인이 끝난 뒤요.” “인간들은 정말로 천천히 싸우는군.” “대신 억울한 사람을 덜 만들려고요.” 용은 잠시 침묵하더니 인간 모습의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툭 쳤다. 나무가 새까맣게 그을렸다. 루카스가 기겁하자 그는 황급히 손을 숨겼다. “실수다.” 나는 그을린 책상을 바라봤다. “왕실 재산 수리비는 별도로 정산하겠습니다.” 카르디온이 눈을 부릅떴다. “내가 세금도 냈는데!” “세금과 물건을 망가뜨린 책임은 별개죠.” 에리카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용은 투덜거리면서도 수리비 견적서를 받아갔다. 괴물에게도 회계 구분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루카스가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었다. “징수관님. 셀딘이 군무청에 출근하지 않았대요. 사흘째요.” “출장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재무청에 서류 하나를 보냈대요.” 나는 봉투를 받았다. 그 안에는 짧은 문장이 있었다. ‘나를 찾으려면 군무청을 뒤지지 마십시오. 제 이름으로 위조한 사람부터 찾으십시오.’ 하단에는 셀딘이라는 서명과 낯익은 검은 깃털 세 개의 인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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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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