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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164화
PAYLUA ORIGINAL · 제164화

164화. 서명을 그리는 기계

마왕도 세금은 내야 합니다 · 3,868자

오프라인 책장
왕실 문서청의 제이 인쇄실에는 사람들이 잊은 소리가 모여 있었다. 활자를 맞추는 소리, 잉크를 긁어내는 소리, 인쇄판이 내려앉을 때마다 짧게 울리는 둔탁한 쇳소리. 하엘은 그곳에서 가장 어린 견습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손에 쥔 종이를 뒤로 감추려다 멈췄다. “이번에는 숨기러 온 게 아닙니다. 잘못 인쇄된 걸 바로잡으려고 했어요.” 하엘이 내민 것은 에리카 명의 입회 신청서의 견본이었다. 실제 봉투의 원본과 글자 모양은 비슷했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신청서에 적힌 서명은 손으로 쓴 글씨처럼 보였다. 그러나 확대경으로 보면 획의 시작과 끝에 잉크가 모이는 위치가 동일했다. 손으로 쓴 두 서명은 비슷할 수 있어도 모든 압력 흔적까지 같을 수는 없다. 인쇄판에서 복제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고 누가 복제했는지가 바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리엔은 얇은 투명판을 가져왔다. 그 위에 검은 선이 여러 겹 그려져 있었다. 원래 기계는 방문자에게 보낼 안내문 제목을 인쇄하는 데 쓰였고, 서명이나 승인인을 만들어 내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데 바르크 인쇄판에서 가져온 판형을 시험하니 빈 서명란 아래에 ‘본인 확인 형식 적합’이라는 글자가 자동으로 붙었다. 다른 시험에서는 마치 도장을 찍은 듯한 테두리가 추가됐다. 그는 즉시 전원을 끄고 작업 로그를 복제했다. “기계가 서명을 한 겁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기계가 모양을 그린 겁니다.” 내가 답했다. “서명했다는 건 사람이 의사를 표시했다는 뜻이니까요.” 하엘은 자신의 이전 진술을 다시 확인했다. 밤에 어떤 이가 날짜판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고, 붉은 끈이 달린 표지를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번 에리카 신청서를 만든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나는 그가 연결하고 싶어 하는 기억을 가로막았다. 같은 장소에서 비슷한 물건을 봤다는 이유로 서로 다른 날의 일을 하나로 묶으면, 진짜 범인을 찾는 대신 그럴듯한 이야기만 완성한다. 그때 에리카의 독립 감정관이 도착했다. 그녀가 최근에 직접 쓴 공개 가능한 서명 표본과 문제의 인쇄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비 의견을 냈다. 감정관은 특히 '벨란' 마지막 획의 굵기가 신청서 두 장에서 완전히 같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표본이 제한적이므로 진짜 서명을 재현한 기계인지, 옛 인쇄판의 흔한 서체를 썼는지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에리카의 부인과 감정은 서로 보완하지만 어느 하나가 모든 사실을 대신하진 않았다. 나는 새로운 작업 지시서를 들여다봤다. ‘정식 신청서 형식에 맞추어 이름 표기 통일.’ 처음에는 별것 아닌 문구였다. 하지만 붙임표의 두 번째 페이지에 문제가 있었다. ‘신청자 미출석 시 제12석 대리 도달 기록을 먼저 생성.’ 신청자가 없으면 신청을 보류해야 하는 절차를, 신청자가 없을 때 새로운 기록을 만드는 절차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건 기계의 오타가 아니라 업무 규칙에 관한 지시였다. 지시서에는 ‘경계 권리 복구 조합 행정 지원’이라는 표제가 있었지만 발주권자의 실제 서명은 없었다. 조합 명의의 종이를 누가 발행했는지는 계속 조사해야 했다. 나는 신청서의 조립 순서, 의자 이름표 작업 순서, 출력 견본의 제작 시간을 각각 적었다. 시계가 서로 달라 정확한 앞뒤를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입회록을 인쇄하려는 구상이 실제 신청서 접수보다 앞서 존재했다. 하엘은 도망치듯 말문을 열었다. “저는 빈칸에 이름이 들어가면 좋다고 생각했어요. 손으로 쓰면 매번 틀리니까요. 한 사람의 이름만 바르게 적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람은 어때야 하죠?” “직접 와서 확인해야죠.” “그 부분이 빠지면?” 그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냥 글자만 정확한 겁니다.” 나는 그 대답을 회의록에 옮겨 적지 않았다. 그의 자발적인 진술 전체를 먼저 기록하고, 필요한 부분을 확인한 뒤 독립 입회자와 함께 서명하게 했다. 하엘의 죄책감이 누군가의 편리한 자백으로 소비되는 일은 막고 싶었다. 지시를 따라 인쇄판을 다룬 일이 어떤 책임으로 이어지는지는 작업 당시의 인식과 선택을 조사해야 했다. 오후에는 인쇄실 밖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조합 관계자라고 밝힌 남자가 기술 자료 공개가 영업 비밀 침해라고 항의했다. 그는 회계 법정의 보전 명령을 보여 주자 더 이상 자료를 가져가려 하지 않았지만, 문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천 명의 거래를 처리하려면 사람마다 직접 확인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수천 명이라면 더 중요합니다.” 나는 답했다. “틀린 이름 하나가 수천 번 복제될 수 있으니까요.” 남자는 이해하지 못한 듯 웃었다. “그럼 효율은 포기하라는 겁니까?” “동의를 효율로 대신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가 떠난 뒤 하엘은 남자가 남긴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조합의 직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등록된 책임자 명단에는 같은 이름이 없었다. 나는 명함을 위조의 증거라고 쓰지 않았다. 다만 그 남자가 어떤 자격으로 인쇄실에 나타났는지 확인하기로 했다. 해가 지기 직전 사일라가 오래된 장갑의 안감에서 찾은 접힌 띠의 감정 결과를 일부 보냈다. 띠의 천 섬유는 오래된 종류였지만, 그 위의 작은 숫자 두 획 가운데 하나는 최근 인쇄기에서 쓰는 안료와 성분이 비슷했다. 원본 위에 누군가 새로운 구분 표시를 더한 것인지, 보존 과정의 오염인지 미확정이었다. 나는 오래된 물건과 최근 물건이 닮았다는 사실만으로 삼백 년 전의 비밀을 풀었다고 떠들지 않았다. 인쇄판의 경로를 따라가 보니 문제가 되는 글꼴은 짙은 잉크 하나로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얇은 판을 두 번 찍어야 완성되는 모양이었다. 첫 판에는 이름이, 두 번째 판에는 접수 완료를 연상시키는 테두리가 있었다. 인쇄 기술자들은 이를 비용을 아끼기 위한 표준 공정이라고 설명했다. 표준 공정이라는 설명이 악용의 고의를 증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두 판의 주문번호와 출고 시간을 따로 보관하면 누가 어떤 결과물을 주문했는지 좁힐 수 있었다. 하엘은 손에 묻은 잉크를 닦으며 말했다. “전에는 모양이 같으면 같은 문서인 줄 알았어요.” 나는 한때 한국의 회사에서 본 서류들을 떠올렸다. 같은 양식으로 만든 결재서도 하나는 의견 요청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승인된 계약이었다. 글씨가 읽기 좋다고 법률 효과까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서식은 생각을 대신할 수 없었다. 라니아는 인쇄실 밖에서 작은 약초 보따리를 건네며 기술자의 손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연기가 났던 가열판 사고 뒤로 직원들이 화상을 숨기고 출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 소문을 근거로 최근 화재 사고의 책임자를 특정하지 않았다. 대신 안전 담당자에게 실제 산업재해 신고와 치료 여부를 확인하라고 했다. 증거 보전이 노동자의 치료를 늦춰서는 안 됐다. 물리적인 흉터와 사건의 증거는 서로 겹칠 수 있어도 같은 말이 아니었다. 작업장 문에 붙은 생산 안내에는 '서명'과 '서명 모양'을 구분한 작은 주의 사항이 있었다. 새로 붙인 종이인지 오래전부터 있던 종이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엘은 자신이 견습을 시작했을 때도 비슷한 안내를 봤다고 했다. 이 대답 역시 정확한 날짜를 확정해 주지 못했다. 그래도 기술자들이 둘의 차이를 전혀 몰랐다는 변명에는 의문이 생겼다. 그 대신 인쇄실의 작업 장부 맨 아래에서 발견한 문장을 곱씹었다. ‘열두 번째는 빈 상태로 출력할 것. 이름은 출력 후 부착.’ 앞서 시설 장부에 적힌 ‘열두 번째는 비워 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으나 방향이 닮았다. 사람을 앉히기 위해 준비한 자리 같으면서도, 정작 자리를 비워 두라는 지시가 두 군데에서 발견된 것이다. 누가 의자를 비우려고 했고 누가 에리카의 이름을 붙이려고 했는가. 두 사람일 수도, 한 사람이 서로 모순된 지시를 낸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낡은 책에 ‘빈자리’라는 단어를 동그라미 쳤다. 그 안에 누군가의 권리가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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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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