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0은 처음 보는 이름이 아니었다. 오래된 공동 보관 장갑의 교대번호에도 비슷한 표기가 있었다. 그렇다고 방금 발견한 전송 부호가 그 직책의 현직자를 가리킨다는 뜻은 아니었다. 기록에는 장갑이 남지만 손은 남지 않는 법이다.
“그 이름이 범인입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사람인지 계정인지부터 확인하자.”
법원은 삼우 문서대행의 공용 전송함 접속 기록 가운데 제12단위·거절 변경과 관련된 부분을 한정해 열람하도록 허가했다. 관리자와 외주 기술자가 입회했다. 나는 접속 이름을 먼저 보지 않았다. 기계의 시간과 작업 주문서를 먼저 맞췄다. 왕궁 시계탑 계수판은 수량을 표시할 수도 있어서, 화면에 찍힌 숫자만으로 날짜를 확정하면 지난번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었다.
기술자는 전송 대장에 두 가지 시간이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주문을 예약한 시각과 실제 인쇄물이 출력된 시각. 전날 작성한 주문이 다음 날 새벽에 인쇄될 수 있었고, 공용 단말기에서 여러 명의 계정이 차례로 연결될 수도 있었다. 같은 기계를 썼다는 사실은 동일한 사람이 모든 일을 했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거절을 미응답으로 바꿨잖아요.” 에리카가 말했다.
“바꾼 명령 자체는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명령을 입력한 사람과 명령을 승인한 사람을 분리해야 합니다.” 기술자가 답했다.
명령 이력에는 기능을 끈 흔적이 있었다. ‘거절 보존: 사용 안 함.’ 적용된 날짜는 열하루 전 판형 교체보다 며칠 빨랐다. 예전에는 거절 통지의 문구를 그대로 보관한 뒤 원본 확인을 요청하도록 되어 있었다. 새 설정은 거절 표기가 전송 단계에서 빠져도 오류가 나지 않게 바꿨다. 기술자는 그것이 악의적 조작인지 업무 편의를 위한 부주의였는지는 설정 파일만으로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날 점심, 삼우 문서대행 관리자는 세 개의 계정 장부를 내놓았다. 첫째는 인쇄 주문, 둘째는 민간 광고, 셋째는 보관 전송이다. 같은 단말기를 이용했지만 업무별 회계 코드는 달랐다. 우리는 계정 명의, 주문을 결제한 사람, 실제 접속자, 종이를 수령한 사람을 각각 다른 표로 정리했다. 삼우의 수익과 제삼 결제소의 수익도 섞지 않았다.
한 장의 열전사지에 ‘장갑 0’이 표시되어 있었다. 바로 아래에는 실제 접속 명의가 아니라 ‘작업 묶음 이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누군가 이 명칭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름이 고대 직책과 같아서 더 불길했을 뿐, 법적 권한은 생기지 않았다.
작업 예약은 밤 열한 시였다. 실제 출력은 다음 날 새벽. 그런데 그 사이 문서청에서 원본 자료의 접수를 보류한 공문이 내려왔다. 정상적인 전송이라면 예약 출력이 멈추거나 적어도 경고가 붙어야 했다. 그러나 장치는 공문이 오기 전에 설정된 예약이라는 이유로 새 판형의 예비 인계 문서를 계속 출력했다.
나는 기술자에게 물었다. “그럼 보류 명령이 오고도 왜 멈추지 않았습니까?”
“이 장치는 접수 보류 공문을 직접 확인하지 않습니다. 공용 전송함의 운영자가 매일 보류 목록을 반영해야 합니다.”
문제가 드러났다. 기계를 탓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었다. 누군가는 목록을 반영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도 출력물을 팔았다. 하지만 어느 사람이 어떤 책임을 졌는지는 추가 기록이 필요했다.
인쇄 견습 하엘이 자발적으로 찾아왔다. 그는 열하루 전 밤 붉은 끈이 달린 표지 묶음을 보았다고 말했다. “제게 옮기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얼굴은 잘 못 봤습니다. 어두웠고, 저는 판을 들고 있었어요.”
“누가 시켰는지 몰라도 괜찮아. 본 걸 그대로 말해 줘.” 내가 말했다.
“장갑이라는 말은 들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장갑을 꼈다는 말인지 주문명이 장갑이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의 대답은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 가치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특정 인물을 고르게 하거나 자신이 보지 못한 얼굴을 떠올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보호 요청에 따라 이름과 근무 주소는 공개 기록에서 가렸다.
외주 전송실은 예상과 달리 깨끗했다. 바닥에는 회색 벽돌이 깔려 있었고, 기계 위에는 먼지가 거의 없었다. 아마 내가 상상했던 지하 비밀실은 너무 낡은 소설의 장치였을 것이다. 실제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밝은 공간에서 정상적인 근무표를 따라 이루어지기도 한다.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해 봉투를 묶고 점심에 식사를 한 뒤 다시 돌아왔다.
그곳에서 나는 예약 작업의 위험을 직접 보았다. 관리자가 일곱 번 반복 출력을 시험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출력은 서로 다른 날짜에 나왔지만 접수 표시에는 같은 주문 번호가 찍혔다. 관리자가 전원을 끄고 켜자 작업이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됐다. 루카스는 “누가 몰래 새로 보낸 것처럼 보이겠군요”라고 말했다. 기술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 일부러 다시 보낸 것도 기계만으론 구별할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예약 작업이 보류 목록을 반영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법원의 실제 사건 명령을 사용하지 않고 시험용 번호를 넣었다. 관리자 계정에서 보류를 등록하자 새 주문은 멈췄다. 그러나 이미 예약된 작업은 별도의 정지 절차가 필요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기계 결함이란 말 뒤에 숨은 사람의 업무를 떠올렸다. 고의로 정지를 빼먹었을 수도 있고, 책임자가 둘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둘 모두 원인을 조사해야 했지만 법적 책임은 같지 않을 수 있었다.
작업실 직원 중 하나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희는 출력이 완료되면 모두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 종이를 받은 사람이 실제로 어디에 썼는지 알지 못했어요.” 나는 그가 접수를 한 직원인지, 승인 권한이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업무의 한계를 설명했다. 서류를 봉투에 넣는 것이 그의 일이고 내용 심사는 맡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일단 진술로 기록했다. 마치 모든 직원이 공모한 것처럼 말해서는 실제로 필요한 책임 구분이 사라졌다.
에리카는 기계에 걸린 시험 종이를 천천히 꺼냈다. 거기에는 ‘거절’이라는 단어가 인쇄되지 않았다. 빈칸 옆에 작은 점만 남았다. 종이의 글자를 못 보는 사람은 그 점이 거절인지, 단순한 인쇄 오류인지 구별할 길이 없었다. 나는 시험 장면을 법원 제출용으로 기록하면서 실제 사건의 원본과 혼동되지 않도록 모든 페이지에 ‘모형’이라고 적었다. 정확한 시험이라도 실제 사건의 증거물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기술관이 내게 작은 황동 부품을 건넸다. 인쇄판을 바꿀 때 쓰는 교체 핀이었다. 크기는 새끼손톱만 했지만 핀이 빠지면 전체 명령이 예전 규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나의 못 같은 물건이 사람의 동의 여부를 가르는 문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니 기묘했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물었다. “누가 교체했는지 기록이 남나요?” 관리자는 표를 내밀었다. 작업 일시는 있었지만 사람 이름은 외주 계정으로 갈음돼 있었다.
우리는 외주 인력의 실명 기록과 현장 출입표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 표를 허가받아 대조하되, 인쇄 업무와 무관한 직원의 출입 내역은 가렸다. 조회한 시간에 해당 근무자 세 명이 있었지만 기계를 손댄 사람을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세 사람 모두에게 자발적 사실확인 기회를 주도록 했다. 익명의 공용 계정이 실명을 가린 문제를 해결하려다 세 사람을 한꺼번에 범인으로 만드는 실수를 피해야 했다.
일과를 마칠 무렵 에리카가 작은 거래표를 발견했다. 인쇄 장비 수리비에 대한 지급 승인서였다. 받는 계정은 삼우 외주 협력사였지만 실제 지급을 나타내는 수납 확인란은 비어 있었다. 그 승인서에 새겨진 주문 번호와 보존실에서 연기를 냈던 압인 가열판의 포장 번호가 앞부분에서 일치했다. 동일한 묶음 계약일 수 있다는 것뿐이지 같은 사람이 가열판을 보존함에 넣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 일들이 서로 대화는 하고 있었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계정과 물건이 대화한 거야. 누가 그 말을 듣고 실행했는지 찾아야 해.”
기술자가 최종으로 넘긴 설정 변경 요청서에는 담당자 서명란이 없었다. 대신 외주 요청 메모가 있었다. ‘거절 복구 시 보관 지연 발생. 임시로 미응답 통합 처리 요청.’ 문장이 이상했다. 거절은 복구되어야 할 오류가 아닌데 복구라고 불렀다. 나는 메모의 사본을 별도로 봉인했다.
문서 끝에는 다음 작업 예약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다. 이틀 뒤, 제삼 결제소 외부 대조실. 작업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장갑 0 작업 묶음 폐기.’
제15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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