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서명한 종이는 남아도 서명하지 않은 순간은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바로 그 순간을 돈으로 바꾸고 있었다.
법원은 미응답 자동 이전 서식의 사용을 임시로 중지한 상태였다. 그러나 중지 명령만으로 과거에 발급된 모든 종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떤 서류가 이미 거래에 쓰였는지, 누가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지 찾아야 했다.
삼우 문서대행의 공용 전송함 접속 기록을 확인할 범위가 법원에서 정해졌다. 세 계정의 접속 시각과 사용 기기 식별자만 먼저 비교했다. 사적인 업무 문서의 내용까지 무제한으로 열어 보지 않았다. 접속 대장에는 놀라운 점이 있었다. 서로 다른 명의의 세 계정이 같은 날, 같은 짧은 시간 안에 같은 출력 장치를 호출한 것이다.
“같은 사람이 세 계정을 쓴 겁니다.” 루카스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공용 단말이 자동으로 번갈아 실행했을 수도 있어.”
기술관이 시험했다. 실제로 이 장치는 예약 인쇄를 걸어 놓으면 계정별로 작업을 나눠 실행했다. 세 계정 접속은 한 사람이 누른 버튼의 결과일 수도 있고, 세 사람이 각각 예약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접속 기록만으로 사용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더 중요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예약 작업 목록에는 ‘거절 보존’ 기능을 해제한 설정 변경이 한 번 있었다. 작업 시각은 열하루 전 보존실 목록 수정과 가까웠다. 그 변경이 즉시 모든 문서에 적용됐는지는 아직 확인해야 했지만, 적어도 누군가 또는 자동 프로그램이 거절 표시를 무시하도록 설정했다는 점은 확인됐다.
티르센은 설정 파일을 감정했다. 수정 명령은 ‘대기 상태의 빈칸을 자동 진행 상태로 전환’이라고 쓰여 있었다. 법률상의 동의를 뜻하는 문구는 아니었다. 그런데 출력 결과에는 ‘예비 수령 가능’이 붙었다. 별개 절차 사이를 잇는 설명이 빠져 있었다.
에리카가 말했다. “처음에는 기계가 멋대로 한 것처럼 보였어요. 이제 누군가 그 기계가 그렇게 일하도록 설정했는지 묻는 단계가 됐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설정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고, 누가 이 출력을 법적 승인으로 팔았는지도 나눠 봐야 합니다.”
조합의 광고와 이름 반송료 청구서가 같은 계정을 사용한 사실은 점차 굳어졌다. 그러나 외주업체가 맡은 통상 작업인지 조합이 지시한 위법한 사용인지도 살펴야 했다. 잘못된 기계 설정과 그 결과를 의도적으로 돈으로 바꾼 사람 사이에는 아직 한 단계의 증거가 더 필요했다.
오후에 리엔 모브가 심리에 나왔다. 그는 결제소가 미확인 보관료를 직접 강제징수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수납 기록과 계약을 대조해야 한다며 그 주장을 확정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진술과 민간 피해 접수 건수를 뒤섞지 않았다. 결제소에 이익이 돌아갔다는 의심과 실제 현금 수취는 다른 문제였다.
“그럼 우리에게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겁니까?” 리엔이 물었다.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책임을 확인하자는 겁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을 의심하면서 아무도 잡지 않는군요.”
“모든 사람을 의심한다기보다, 서류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재판장이 대화를 끊었다. 리엔은 변호인에게 조언을 받고 추가 자료 제출 기한을 요청했다. 법원은 정해진 조건에서 그 기한을 허가했다. 그가 내 질문을 싫어한다고 해서 방어권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마이렌의 보호 담당자도 제한된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는 당시 서명하지 않았다는 본인의 말이 다시 ‘정식 거절 제출’로 바뀌지 않도록 주의를 요청했다. 법원이 선택한 표현은 간단했다. ‘증인은 당시 서명하지 않았다고 진술함. 별도의 법적 거절 접수 여부는 심리 중.’
나는 그 문장에 긴 설명보다 큰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보다 큰 말은 당장은 편하지만, 나중에는 당사자를 다치게 한다.
기술관은 원격 예약 장치의 작은 결함도 보고했다. 수리 도중 대기 목록이 두 번 실행되면 같은 문서가 서로 다른 발송번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세 기관의 동의’처럼 이해한 출력이 사실은 한 번의 기계 작업을 중복 기록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의심도 다 사라지나요?” 루카스가 물었다.
“아니. 중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조작을 부정하는 것도, 증명하는 것도 아니야. 어떤 기록이 중복됐는지 하나씩 대조해야 해.”
그는 장부를 펴고 증빙 번호 옆에 작은 세모를 붙였다. 이제까지의 기록은 날짜순으로만 정렬되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실제 사람의 접수, 자동 출력, 법원 대조, 민간 징수 네 종류의 표시를 더했다. 같은 시각에 여러 줄이 나타나도 곧바로 같은 사건으로 합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때 라니아가 환급 안내문 수정을 청했다. 피해자가 비용을 냈다는 사실을 직접 증언할 때는 자신의 가족과 주소를 공개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나는 즉시 문구를 바꿨다. 보호된 확인 절차와 공개된 회계 보고는 구분되어야 했다. 접수자는 사건번호를 가질 수 있고, 이름은 별도의 보호 기록에 남길 수 있었다.
오렐은 그 변경을 보며 말했다. “문구 하나가 이렇게 중요했군요.”
“나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우리는 인쇄기의 오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습관도 오류를 만들었다. 확인되지 않은 것을 채워 넣고, 말하지 않은 사람의 의사를 추측하고, 남의 이름을 공개해야 절차가 빨라진다고 생각하는 습관이었다.
보존실 복도 끝에서 에리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부친의 장부에 남은 빈줄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숫자 대신 작은 빗금이 있었다. 그것이 ‘아직 받지 못했다’는 뜻인지, ‘받았다는 주장을 거절한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빗금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오늘 새로 배운 일이었다. 뜻을 모르는 표시는 틀렸다고 고치는 대신, 모른다는 상태로 남겨 둘 수 있다.
해 질 무렵 바르크가 원판 수정 내역을 자발적으로 제출했다. 작은 ‘거절’ 글자를 생략한 이유와 일시를 명시했고, 그 뒤 들어온 일부 수정 요청에 자신이 응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든 조사받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문서가 사실인지 감정할 계획을 세웠다. 잘못을 인정한 부분만 기록하고 확인되지 않은 지시는 남겨 두었다.
한편 로웬 대신은 국고 회수액을 다시 물었다. 나는 여전히 영이라고 답했다. 민간 노인의 구리화 두 닢 반환은 실제로 확인했지만 그 돈은 국가로 간 게 아니었다. 마이렌의 이미 인정된 임금 지급도 이번 사건에서 새로 회수한 국고 수입이 아니었다.
“보고서에 좋은 숫자 하나는 없나?” 대신이 물었다.
“있습니다. 자동 승인 처리된 문서 중 본인 동의가 확인되지 않은 건수는 따로 보전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한 명이라도 불법적인 서류로 권리를 잃지 않게 만드는 숫자죠.”
그는 그것도 성과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보고서에 ‘예방 조치’라고 적었다.
밤에 티르센이 최종 대조 결과 일부를 가져왔다. 보존실 종이 조각의 ‘강태준’ 글씨와 최근 외주 전송판의 같은 이름은 동일한 활자에서 인쇄된 부분이 있었다. 적어도 그 부분은 삼 년 전 화재 당시에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었다는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그러나 옛 종이에 최근 활자를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결과를 보고 오래 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 이름이 삼 년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무서운 가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고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가 밝혀진 것도 아니었다.
감정서 맨 아래에는 작은 주의문이 붙어 있었다. ‘후보 표기와 본인 승인의 구분 유지. 빈칸에는 법률상 추정 동의를 기입하지 말 것.’
나는 그 문장을 재무청 복도에도 붙이자고 했다. 서류를 작성하는 사람은 많고, 빈칸을 자기 뜻대로 읽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제14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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