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명란의 빈칸을 의심하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보통 빈칸은 누군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표시다. 그런데 요즘 왕도에서는 그 빈칸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티르센은 북문 인쇄소와 제삼 결제소에서 법원 감독 아래 제공한 판본을 나란히 놓았다. 구형 서식의 ‘본인 승인’은 손으로 이름을 적는 넓은 칸이었다. 열하루 전의 전사본은 얇은 사각형이었다. 더 최근의 출력물에서는 사각형 옆에 ‘사전 대조’라는 작은 글씨가 새로 붙었다.
“본인 서명 없이도 사전 대조를 받을 수 있게 만든 셈이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사전 대조는 서류 존재를 확인하는 기능일 수 있어. 문제는 그 결과를 누가 ‘승인’으로 부르느냐야.”
바르크는 새 판의 제작 견본을 가져왔다. 그가 만든 것은 인쇄용 테두리뿐이었다고 했다. 가운데 문구는 다른 곳에서 보내 준 얇은 전송판에 찍혔다. 그는 중앙 문구를 수정할 수 없었다. 제작업자의 책임 범위와 주문자의 책임 범위가 달라 보였다.
에리카는 전송판을 뒤집어 살폈다. 가장자리에는 작은 절단 자국 세 개가 있었다. 화재 수거 종이 조각의 봉투 구멍과 일정 부분 닮았다. 그러나 구멍 하나와 자국 셋이 정확히 맞는지는 아직 측정해야 했다. 나 역시 그럴듯한 그림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더 조심했다.
법원 감정인은 두 판의 쇠침 간격을 측정했다. 일치하는 구간이 있었지만 그 규격은 북문에서 널리 사용됐다. ‘같은 계열의 기계’라는 판정만 나왔다. 그것으로 범인을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요청한 문서는 세 가지였다. 전송판의 최초 생성 기록, 주문 승인의 계정, 실제 납품의 수령 확인. 결제소가 발주자라고 쓰인 주문서가 있어도 돈을 낸 회사와 문구를 만든 사람이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일단 돈의 흐름을 추적하기로 했다.
재무청의 국고 대장에는 이 주문 비용이 없었다. 그러므로 왕실 재무청이 지출했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왕실 기관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군무청과 법원 문서청은 별도 지출 장부를 갖고 있었다.
로웬 대신이 툭 말했다. “나는 우리 돈이 아니어서 기쁘지만, 누가 그 문구를 만들었는지는 더 궁금하네.”
“그걸 알려면 남의 돈을 우리 돈처럼 세면 안 됩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국고 숫자를 맞추던 내 고집이 이제는 문서 제작비를 조사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오후에는 삼우 문서대행의 관리자가 법원 보호 아래 참고인으로 왔다. 그는 지난달 계약서 전송을 처리했지만 ‘외부 책임자 후보’라는 이름의 새 양식은 공식 표준 목록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 업체의 고객은 제삼 결제소뿐 아니라 왕실 감사원과 민간 창고업자도 있었다. 그 어느 한 고객의 이름만으로 공범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누가 그 파일을 올렸습니까?”
“공용 전송함에서 받았습니다. 접근 권한이 있는 계정 세 개가 있습니다.”
“사용자를 특정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접속대장의 원본을 봐야 합니다. 저희 직원이 올린 건 아닐 수도 있어요.”
세 계정은 결제소 담당, 외주 인쇄 관리자, 과거 법원 대조관의 계정이었다. 나는 이름부터 공개하지 말자고 했다. 계정 명의가 실제 사용자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수없이 봤다. 보안이 허술했던 공용함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루카스가 포기한 듯 말했다. “그럼 아무것도 찾지 못한 건가요?”
“우리가 찾은 건 여러 사람이 한 서식을 만졌다는 사실이지. 범인이 하나라는 가설부터 의심하게 됐고.”
나는 그의 견습 수첩을 펼쳐 네 칸을 그렸다. 원문 작성, 외주 전송, 인쇄, 최종 사용. 각 칸 아래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적었다. 그제야 사건이 조금 보였다. 한 사람이 모두 했을 수는 있다. 반대로 각각 별개 업무에서 약점을 방치했을 수도 있었다. 확정하려면 이어진 증거가 필요했다.
나는 삼우 문서대행의 운영 규정을 따로 읽었다. 외주업체 직원은 인쇄 의뢰인의 지시를 기계에 입력하지만, 원문의 법률적 의미를 고치거나 인증하는 자격은 없다고 적혀 있었다. 규정대로라면 잘못된 의미를 발견했을 때 고객에게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그 규정을 교육받았는지, 실제 현장에서 지킬 수 있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관리자는 자신의 계약서에 ‘재인쇄 요청은 건당 별도 비용’이 있다고 보여 주었다. 그 항목을 보고 나는 돈의 흐름이 왜 중요한지 깨달았다. 승인란의 폭을 줄였다가 다시 늘려도, 거절 표시를 없앴다가 붙여도, 이 업체에는 수정 주문으로 잡힐 수 있었다. 어떤 고객에게는 문구를 바꾸는 일이 단순한 청구 금액이었다.
루카스는 수리 요청서의 필적을 감정받자고 했지만 나는 순서를 바꾸었다. 먼저 수정 주문이 실제로 접수됐는지, 그 대금이 지출됐는지, 납품한 판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야 했다. 누가 펜을 잡았는지부터 알아내도 그 사람이 문구의 의미를 알고 바꿨는지는 증명되지 않는다.
관리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의 주문 조회에 협조했다. 다만 고객 정보 전체를 건네줄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법원의 허가 범위 안에서 그 주장에 동의했다. 누군가의 위조를 조사하려다 모든 무관한 고객의 기록을 들춰 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같은 잘못을 시작한 셈이었다.
에리카가 뜻밖에 종이값을 물었다. 같은 크기의 구형 판과 최근 판의 견적 차이는 거의 없었다. 추가 비용은 글자를 지우고 상태를 합치는 기능에 붙어 있었다. 나는 견적서의 그 줄에 밑줄을 쳤다. 누군가가 비용을 낸 것은 빈칸 그 자체가 아니라 빈칸의 의미를 바꿀 수 있는 작업이었다.
그때 바르크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원래 문구에 ‘거절’이라는 작은 글자가 있었어요. 인쇄판을 만들면서 빠졌습니다.”
“누가 빼라고 했습니까?”
“의뢰서에는 없었습니다. 작은 글자는 기계가 잘 못 찍어서, 읽히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생략한 부분이라고 인정했다. 그것이 고의적인 위조인지, 안전상 중대한 업무상 과실인지, 단순한 견본 제작 오류인지는 별도 조사였다. 하지만 빠진 한 단어의 영향은 분명했다. ‘승인 또는 거절을 기록’하던 서식이 ‘승인을 기록’하는 서식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에리카가 바로 종이 한 장을 빼냈다. ‘거절’이 지워진 문서 사본과 남아 있는 원본을 색연필로 구분했다. “이런 차이를 사람들은 사소한 오타라고 생각하겠죠.”
“사람의 선택지를 없애는 오타는 작지 않아요.”
바르크는 정식 진술에 응하겠다고 했다. 변호인과 동행할 권리를 알렸고, 원판은 독립 보전 절차로 넘겼다. 그를 당장 구금해 달라고 청하지는 않았다. 고의나 지시를 입증할 자료 없이 기술적 오류를 범행으로 확정하면, 진짜 문구를 바꿔 쓴 사람이 숨어 버릴 수도 있다.
그날 저녁 사일라는 공동 보관함에서 오래된 서식의 양면 사진을 보내 왔다. 옛것에는 ‘동의/거절/미응답’이 서로 다른 줄에 표시돼 있었다. 새 전송판의 뒷면에는 그 세 줄을 하나로 합친 표시가 있었다.
세르나가 보고 중얼거렸다. “마계에서 저렇게 세 줄을 하나로 합치면 세금이나 벌금 중 하나가 반드시 잘못 나와.”
“여긴 사람의 증언이 걸려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실제로 누구의 승인이 잘못 처리됐는지는 문서별로 확인해야 했다. 마이렌이 그날 서명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있었지만 모든 기록을 대신 설명해 주지 않았다. 메라의 보호된 선택도 아직 남아 있었다.
밤늦게 법원 감정관이 작은 시연 결과를 보냈다. 원래 ‘거절’이 있던 기호 칸을 빈 상태로 두고 전송하면, 낡은 인쇄기에서는 ‘미응답’ 점이 찍혔다. 그런데 새로운 대조 장치는 그 점을 읽을 때 ‘대기 중’이 아니라 ‘예비 인계 가능’이라고 표기했다.
하나의 칸이 두 개의 뜻을 가졌다. 그리고 누군가 그 틈에 ‘본인 승인’이라는 이름표를 걸어 놓았다.
나는 서류 끝에 적었다. 서식 오류는 확인. 악용자의 신원은 미확인. 이미 만들어진 피해의 규모도 미확인.
그런데 다음 줄에 추가할 문장은 더 무거웠다.
‘오류가 계속 유지되도록 비용을 낸 사람이 있다.’
제14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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