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카는 아버지의 글씨를 알아보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집에 돌아와서도 공적인 기록을 함부로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식탁에서 항상 같은 말을 했다고 했다. ‘어떤 장부든 첫 줄에는 세어야 할 것을, 두 번째 줄에는 아직 세지 못한 것을 적어라.’
우리가 찾은 검은 장부 두 권도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까.
법원 감정실은 제1권과 제2권의 물리적 구성 비교를 허락했다. 원본은 담당 보존관이 넘겼고 우리는 복제 영상으로 글씨를 읽었다. 부친의 유품이라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도록 에리카는 개인적 소회를 조서에 쓰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왜 그 경계를 지키려 하는지 알고 있었다.
티르센은 제1권 앞부분과 제2권 앞부분의 표지 천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 같은 날 제본했다고 증명할 수 없었다. 한 권은 열과 그을음의 흔적이 있고 다른 권의 뒤쪽에는 최근 인쇄기의 압흔에 가까운 자국이 있었다. 중요한 건 책이 한 번에 만들어졌는지보다 어떤 장이 언제 끼워졌는지였다.
“이 줄을 보세요.” 에리카가 제2권의 복제본을 가리켰다.
‘수령 간주. 확인 불필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같은 장의 뒷부분에는 다른 글씨로 ‘실제 수령은 별도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앞 문장이 원래 있고 뒤가 나중에 추가됐을 수도, 반대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감정 결과 없이 순서를 확정하지 않았다. 다만 문서 한 장 안에 두 판단이 충돌한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루카스가 두 문장을 읽고 물었다. “한쪽은 받았다고 하고 다른 쪽은 안 받았다고 하네요?”
“정확히는 받았다고 간주한다는 것과 실제 받은 것을 확인해야 한다는 거야.” 내가 말했다. “그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이기도 해.”
제12단위의 물품이 법적으로 보관됐는지, 열두 번째 사람이 증언에 동의했는지, 누군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서명했는지는 서로 다른 문제였다. 제삼 결제소는 오래전부터 이 세 가지를 하나의 ‘확인’이라는 단어로 묶어 왔다. 에리카의 부친이 남긴 기록은 오히려 분리하기 위한 원장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점심에는 사벨 전 소방대장이 찾아왔다. 그는 삼 년 전 화재 조사 당시의 개인 메모를 법원에 다시 제출하려 한다고 했다. 첫 불길과 두 번째 불길의 발생 시각에 차이가 있었지만, 원인과 방화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증언을 강요하지 않았다. 사벨은 먼저 원본의 보관 경로를 설명한 뒤 감정인이 보는 앞에서 작은 수첩을 펼쳤다.
“두 번째 불이 났을 때 누군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사벨이 말했다. “이셀도 그 장면을 기억하죠. 하지만 누구 것인지는 그때 몰랐습니다.”
“벨란 감사관의 상자라고 지금 판단하는 근거가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나중에 출입 기록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직접 표지를 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과 추정을 구분했다. 나는 그 분리야말로 오래된 사건을 재조사할 때 가장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에리카는 그의 진술을 듣고도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단정하려 하지 않았다.
사벨의 메모에는 화재 현장 바닥에서 발견한 발자국과 고무 장갑 비슷한 물품의 그림이 있었다. 장갑 하나를 뒤집어 낀 사람의 그림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실제 동일한 장갑인지 알 수 없었다. 보존 목록에 적힌 ‘뒤집어 낀 장갑 하나’와 연결할 수는 있어도 둘의 동일성을 확정하려면 실물이 필요했다.
티르센은 제2권 마지막 장에 붙은 날짜 계산표의 접착제 분석 결과를 설명했다. 일부 접착제는 최근 재제본에 흔히 쓰이는 계열과 닮아 있었고, 다른 장은 오래된 제본 흔적을 보였다. 결제소가 제2권의 내용을 나중에 고쳤다는 의혹을 뒷받침할 수 있었지만 제작자와 구체적인 시점은 아직 미확정이었다.
“그럼 아버지가 이 장부를 쓴 게 아니군요.” 에리카가 낮게 말했다.
“일부는 작성했을 수 있어요. 전체를 누구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선 안 됩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바라는 마음이 곧 단정을 향한 권리는 아니었다.
검은 장부의 뒤표지에는 작은 종이 주머니가 붙어 있었다. 예전에 개봉할 때 발견했지만 오염 우려로 그대로 봉인했던 부분이었다. 오늘은 법원의 별도 허가 아래 전문 보존관이 주머니를 열었다. 안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힌 종이와, 빈칸이 유난히 넓은 대조표가 있었다.
‘제삼자에게 제삼자의 말을 맡기지 말 것.’
에리카의 숨소리가 멎었다. 나는 그 문장을 부친의 유언으로 읽지 않았다. 작성자의 필적과 삽입 시기는 추가 감정이 필요했다. 다만 그 말이 사건의 본질과 너무도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대조표의 첫 칸에는 ‘보관 주장’, 두 번째에는 ‘동의 확인’, 세 번째에는 ‘거절 여부’가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빈칸이 있었다. 제목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이 칸은 무엇입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티르센이 확대경을 들었다. 아래쪽에서 겨우 읽을 수 있는 두 글자가 나타났다. ‘반송’.
“이 문서를 누군가 잘못된 처리로부터 되돌리려고 만들었을 수도 있군요.” 에리카가 말했다.
“그럴 가능성은 있어요. 그런데 반송된 것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전날 확인한 반송료 영수증을 떠올렸다. 누군가 보관 기록의 잘못된 승인을 되돌리는 용어를 상품처럼 만들어 팔았다. 실제 문서 복구 업무가 존재했다면 그 비용을 받을 합법적 경로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의 권리를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이름값을 걷는 행위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 네일이 30호 계수판의 최근 납품 대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설치 지시를 내린 사람의 이름은 여전히 없었다. 대신 ‘기존 보관원장과 대조 없이 자동 표기 적용’이라는 기술 조건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조건이 누가 서명했는지보다 먼저 정해졌을 가능성을 주목했다. 원본을 보지도 않고 승인을 찍게 하려면 누군가는 불확실성을 의도적으로 지워야 했다.
법원 보존관은 날짜표의 세 번째 페이지에서 낡은 연필 자국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현행 법원 확인 전 자동 실행 금지’라는 주석이 있었다. 주석이 부친의 것인지는 아직 몰랐다. 그러나 결제소의 최근 계약서에서는 정확히 반대되는 문장이 법률 조항처럼 쓰이고 있었다.
나는 에리카에게 그 사실을 말하려다가 멈췄다. 어떤 사안은 기쁜 발견일수록 차갑게 다뤄야 한다. 아버지의 뜻을 입증할 문서가 나왔다는 감정이 앞서면, 누군가 그 감정을 이용해 또 다른 가짜 기록을 끼워 넣을 수 있었다.
에리카가 먼저 말했다. “아버지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에요. 아버지가 틀렸다면 그 부분도 기록해야겠죠.”
“그래야 우리가 찾은 옳은 부분도 남습니다.”
그녀는 검은 장부의 두 권을 천천히 덮었다. 감정관은 접착제 표본과 원래 위치를 기록했고, 사벨은 수첩을 다시 법원 보존함에 넣었다. 누구도 그 자리에서 화재의 범인을 선언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한국에서 처음 세무조사에 나갔던 때를 떠올렸다. 한 회사의 대표가 엉터리 장부를 들이밀며 직원 이름을 외우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직원들의 실제 급여 명세와 은행 기록을 찾았다. 기억은 여전히 일부 흐렸지만 적어도 그 일의 교훈은 분명했다. 사람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보다 그 사람의 말을 증명할 수 있게 남겨 둔 기록이 중요했다.
잠시 눈앞에 진실의 장부의 검은 선이 어른거렸다. 나는 정밀 열람을 선택하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 가며 답을 얻는 대신, 아직 내게 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믿고 확인하기로 했다.
문밖에서 에리카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대조표 네 번째 칸에 남은 작은 글자를 다시 살펴봤다고 했다.
‘반송 책임자: 미지정.’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틀린 승인을 되돌릴 책임자가 애초에 지정되지 않았다면, 누군가 새로운 책임자를 만들어 세울 유인이 생긴다. 그리고 그 책임자 자리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131호 통지는 누군가 나를 감사관으로 임명했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하지만 왜 내 이름을 필요로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이제 훨씬 더 구체적이 되었다.
제13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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