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장부를 처음 본 건 에리카의 손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장부가 아니었다. 검은 천으로 덮은 두꺼운 상자였고, 앞면에는 오래전 벨란 감사관의 문서 번호가 찍혀 있었다.
오렐은 보존 신청이 접수되자 상자를 법원 감정실로 옮겼다. 개봉에는 에리카 대신 독립 보관관이 입회했다. 그는 부친의 유품을 직접 꺼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복도에서 기다렸다. 나는 그런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봉인을 열자 낡은 검은 표지의 책이 나왔다. 첫 장에는 불에 그을린 부분이 있었고 두 번째 장에는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뒤쪽 몇 장은 지나치게 깨끗했다. 삼 년 전 화재 현장에 있던 물건이 맞는지, 아니면 나중에 끼워 넣은 종이인지 구분해야 했다.
“장부가 두 권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티르센은 표지 안쪽의 접힌 종이를 보여 주었다. ‘제1권: 인계된 것. 제2권: 인계됐다고 주장된 것.’ 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두 권이 돈을 기록하는 장부가 아니라, 사실과 주장 사이의 차이를 적는 감사 원장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책 첫머리에는 익숙한 숫자들이 나타났다. 방벽 유지료 승인 720금화, 증빙상 출금 480금화. 조폐소에 보전된 260금화와 아직 수령처를 입증하지 못한 140, 80금화의 항목도 있었다. 이 숫자들은 최근 조사와 같은 범주에 있었지만 책의 금액과 각 항목이 실제로 동일 거래인지 감정이 필요했다. 오래된 숫자가 나온다고 해서 빠진 돈이 바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루카스는 두 권의 차이를 표로 옮겼다. 제1권에는 실제 서명과 현물 인수 여부가 구분돼 있었고 제2권에는 ‘간주 수령’, ‘임시 동의’, ‘후속 확인 예정’ 같은 문구가 많았다. 후대에 고친 것인지 처음부터 서로 다른 목적의 책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누군가 제2권의 문장을 제1권의 확정 기록처럼 사용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에리카는 독립 참관인의 허락을 받아 한 장의 사본만 읽었다. 그곳에는 부친의 필체와 비슷한 메모가 남아 있었다.
‘두 번째 종은 첫 번째 구조를 취소하지 않는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버지는 그날… 사람을 살리려고 했던 걸까요?”
“그럴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한 문장으로 마지막 행동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서류를 덮었다. “알아요. 그래서 더 답답하네요.”
그날 저녁 법원은 두 권의 장부를 고대 서식과 최근 제삼 결제소 신청서의 근거 문서와 대조하기로 했다. 또 책이 보관된 상자의 최근 봉인에 관한 출입 기록을 요구했다. 봉인 자체는 새것일 수 있지만, 누가 왜 다시 봉했는지 밝혀야 한다.
네일은 인쇄판 번호에 집중했다. 제2권의 일부 표에는 왕궁 제이 인쇄실에서 쓰던 새 글꼴이 있었다. 글꼴이 같다는 이유로 위조를 단정할 수 없지만, 두 권이 삼 년 전 같은 날 완성됐다는 주장에는 의문이 생겼다. 책 맨 뒤에 삽입된 작은 영수증의 먹물도 최근의 것으로 보였다.
검은 장부의 표지를 보고 에리카가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면 책상을 정리하면서 두 종류의 숫자를 말하곤 했다고 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건넨 돈과 건넸다고 믿는 돈. 그는 어린 에리카에게 작은 동전을 하나 주고 장부에 두 줄을 쓰게 했다. 첫 줄은 ‘아버지에게 받음’, 둘째 줄은 ‘아버지가 준다고 약속함’. “둘 다 아버지가 말한 건데 왜 다르게 적어요?” 어린 에리카가 묻자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고 했다. “네 주머니에 들어온 것만 네 것이니까.” 그 기억은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감정서에 넣지 않았다. 추억은 사실을 추적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어도 문서의 진위를 증명하지는 못한다.
법원은 장부의 장마다 별도의 표식을 붙였다. 첫 장과 둘째 장에 물 자국이 생긴 순서를 대조하고, 표지의 못을 뽑지 않고도 안쪽 종이가 나중에 끼워졌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찾았다. 티르센은 고대 봉인 기술을 쓰는 호른델에게 자문했다. 호른델은 쇠고리의 녹이 생긴 순서를 볼 수는 있지만 누가 그 고리를 만졌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마계 감사관 세르나는 일부 글자가 마계 협약의 옛 문구와 비슷하다고 하면서도 공식 번역은 아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자기 능력의 경계를 말할 줄 알 때 더 믿을 만해진다.
나는 장부의 숫자들을 옮기는 루카스를 도왔다. 그는 금화 720과 480을 나란히 놓고 “240이 사라졌다는 뜻이군요”라고 말했다. “승인한 금액에서 출금 확인액을 뺀 240은 집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 내가 답했다. “그 차액을 누가 훔쳤다고 적지 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전된 260은 이미 출금 480 안에 포함돼 있었다. 누군가 260을 별도 회수금으로 더하면 왕국 국고가 갑자기 부풀어 보일 것이다. 또 140과 80은 출금 경로를 따로 추적해야 하는 금액이지, 이미 확인한 손실액이 아니었다. 숫자는 누군가를 처벌하기 전에도 다뤄야 하지만, 처벌하려고 숫자를 바꾸는 순간 더 큰 빚이 생긴다.
장부를 펼쳐 놓은 저녁, 마이렌의 보호담당자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마이렌이 삼 년 전 검은 책 표지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직접 책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미 기억으로 확인 가능한 특징만 말하겠다고 했다. 표지는 검정이었고 모서리에 가느다란 흰 선이 있었으며, 책을 든 사람은 검은 장갑이 아니라 맨손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본 사람이 벨란인지 다른 누구인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진술을 독립 보관한 뒤 장부 감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자료로 쓸지 법원의 판단을 구했다. 진술을 수집한다고 곧바로 물건을 증인에게 들이대는 건 조심해야 했다.
에리카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벽에 기대었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너무 알고 싶어요.” 나는 그의 옆에 섰다. “그 답은 결국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나를 보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남은 일을 멈출 이유는 없어요.” 에리카는 눈가를 문질렀다. “알아요. 제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대신해 결론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 기록을 정확히 남기는 일이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브란트가 와서 장부 보관실 앞의 낯선 발자국을 보고했다. 우리는 보안 인력을 늘리되 모든 직원을 용의자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출입대장과 보관실 열쇠의 인계 상태를 확인했고, 새로 붙은 봉인에는 관리자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 장갑이라는 직책만으로 담당자 이름을 대신할 수 없도록 했다. 이 작은 변화가 사건 해결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미 한 번 사람이 직책 번호 속에서 사라졌던 일을 기억하라고 답하고 싶었다.
그날 밤 장부를 덮기 전, 티르센은 뒤쪽 장에 아직 펼치지 않은 종이가 붙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떼지 않았다. 보존실의 온도와 조명을 맞추고 접힌 방향을 기록한 뒤 끝 장을 열기로 했다. 아무리 사소한 종이라도 처음 떨어진 자리와 손을 댄 순서를 잃으면 나중에는 누군가 바꿔 놓았다고 해도 반박하기 어렵다. 나는 오늘 발견한 장부의 내용을 정리하며 오래된 물건에 새 기록이 끼어들었는지 확인할 차례라는 말을 적었다.
장부 뒤쪽의 날짜표를 보기 전, 나는 에리카에게 부친의 유품을 공개 기록과 사적인 기억으로 구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 메모를 사건 서류에 넣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부친이 정식 조사 기간에 사용한 감사 기록은 법원이 증거로 보존할 수 있었다. 그 경계는 에리카에게 가혹했지만 필요했다. “제가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원본이 제 것은 아니군요.” 그가 말했다. “반대로 국가가 조사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사생활을 모두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내가 답하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서로 반대처럼 보이는 두 원칙이 함께 성립할 수 있었다.
그는 장부 표지의 오른쪽 아래에 작은 손때가 묻은 부분을 가리켰다. 아버지가 책장을 넘길 때 자주 잡던 자리라고 했다. 감정관은 그 손때가 실제로 벨란의 것인지 검사 없이 확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에리카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알아요. 다만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어서요.” 나는 그의 말을 기록에서 뺐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기억이 모두 법정의 증거일 필요는 없다.
밤에 법원 인쇄소에서는 두 권을 비교하는 공개 대조표를 만들었다. 원본 글자는 그대로 베끼고 추정되는 글자에는 괄호를 썼다. 루카스는 괄호가 많아서 읽기 힘들다고 했지만, 나는 불확실성을 감추려고 괄호를 지우지 말라고 했다. 그날 가장 큰 진전은 새로운 범인의 이름이 아니라 ‘수령 간주’가 별도 계산표에서 나온 표현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표현이 고대 계약의 원문인지 최근 사람의 편의인지 구분된다면, 마지막 증인을 압박하는 근거 하나가 무너질 것이다.
한편 브란트는 결제소에서 오래 일한 관리인이 갑자기 휴가를 낸 사실을 알려 왔다. 그가 도망간다고 단정하지 않았고 법원은 관련 업무 서류가 소실되지 않도록 보존 요구를 전달했다. 나는 사적인 가족의 행선지를 묻는 대신 인계대장과 업무 승인 체계를 조사하기로 했다. 직책 번호 ‘장갑’ 속에 숨어 있는 사람을 찾으려면 지금도 누가 그 직책을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시 사람을 서류의 칸으로 밀어 넣지 않는 방식으로.
서류의 빈칸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중요했다. 일부는 원래 비워 두어야 하는 자리였고 일부는 누군가 지운 흔적이었다. 우리는 그 둘의 표시까지 구분했다.
나는 제2권의 마지막 쪽을 넘겼다. 거기에는 본래 없던 것처럼 보이는 날짜 계산표가 붙어 있었다. 시작일과 종료일을 적는 두 칸. 그리고 누군가 빨간 선으로 연결한 도표.
‘공동 증언 미수령 상태 유지: 유리.’
‘수령 간주 처리: 특정 조건 발생 시 실행.’
결제소가 소유권을 가졌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 미수령 상태를 지속시키는 일 자체를 유리하게 여겼다는 정황이었다.
책을 닫으려는데 가장자리에서 작은 영수증 한 장이 떨어졌다. 종이 위에 금액은 없고 접수 시각과 교체 부품 번호만 적혀 있었다.
‘계수판 30호, 설치 후 정상 작동 확인.’
영수증의 서명란에는 두 글자가 있었다. ‘장갑’. 실명은 없었다.
그 아래에는 빈 줄이 있었다. 날이 바뀌는 시각을 누가 승인했는지 적어야 하는 칸이었다.
나는 그 칸을 오래 바라봤다. 누군가 계약 기한을 없앤 게 아니다. 시작 버튼의 주인을 바꿔 놓았을지도 모른다.
제12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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