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 명령이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왕국의 행정 기관들은 수십 가지 상황을 대비한 표준 서식을 미리 인쇄했다. 홍수 뒤 통행 재개, 전염병 뒤 시장 재개, 화재 뒤 조사 재개. 도장이 찍히지 않은 빈 양식은 서랍에서 몇 년씩 잠들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식의 인쇄 시점과 실제 명령이 효력을 얻은 시점을 나눠 기록했다.
에리카는 부친 벨란 감사관의 마지막 업무표를 가져왔다. 그에게 화재 사건은 단순한 재고 조사 건이 아니었다. 화재가 발생하기 직전 급식실에서 작업자 명단의 일부가 바뀌었고, 그 변경에 대한 조사 개시가 예정되어 있었다. 조사 중단과 재개는 누가 무엇을 숨길 시간을 가졌는지 가늠하는 문제였다.
“아버지는 재개 명령을 받지 못하셨어요.” 에리카가 말했다.
“기록으로 확인됐나요?”
“그 시기 수령대장에 아버지 서명이 없어요. 다만 수령대장이 불탄 곳도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명이 없다는 것만으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확정하지 않기로 했다. 조사관이었던 한국 시절,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기록이 있었던 증거로 뒤집는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
우리는 오렐에게 법원 보관실 출입기록을 요청했다. 옛 재개 명령의 사본은 최근 제출된 것이었다. 제출자는 제삼 결제소의 하급 서기였고, 제출 경위에는 ‘대외 공표용 참고 서식’이라고 적혔다. 정작 그 서기가 원본을 어디서 받았는지는 비어 있었다. 공백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가 범인은 아니었다. 그는 문서 전달의 마지막 고리였을 뿐이다.
그날 정오, 북쪽 초소에서 구조 경보가 울렸다. 이번에는 실제로 수문 옆 나무다리에서 아이가 미끄러졌다는 신고가 있었다. 경비대는 바로 구조 인원을 보냈고, 사고 기록은 구조용 대장에만 남겼다. 지난번처럼 출석 인증 장치로 넘어가지 않도록 감응선을 차단해 둔 덕분이었다.
“구조 경보를 끊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연결된 가짜 인증 장치를 끊어야지, 사람 살리는 종을 끊으면 안 되지.”
다리에서 구조된 아이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근로자들의 말에 따르면 다리 아래 고정핀 하나가 빠져 있었다. 사고인지 고의인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브란트는 현장을 보호하고 목격자 진술을 받았다. 나는 구조 비용이 재난 대응 예산으로 집행될 수 있는지 확인했다. 오늘 구한 사람의 비용을 어제의 부정 증서와 섞어 버리면 또 다른 잘못이 시작된다.
오후, 네일이 인쇄실에서 발견한 문서 두 장을 가져왔다. 하나는 재개 명령의 빈 판, 다른 하나는 나중에 작성한 작업자 메모였다. 메모의 작성자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종이 가장자리에 특이한 기름 자국이 있었다. 보딘은 시계탑에서 쓰는 윤활유와 달라 보인다고 했다. 티르센은 성분이 일치하는지 실험 없이 말할 수 없다며 말을 잘랐다.
“감정관님은 재미있는 걸 모두 재미없게 만드십니다.”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그것이 내 직업이네.” 티르센이 말했다.
그는 종이를 빛에 비췄다. 두 장의 압흔이 일부 맞물렸지만 한 장은 글자가 앞으로, 다른 장은 뒤로 밀려 있었다. 종이를 한꺼번에 눌렀다가 나중에 다시 인쇄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시간 순서는 종이의 마모 흔적과 먹물층을 더 봐야 했다.
나는 재개 명령의 하단에 작은 날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화재가 나기 전날의 날짜였다. 하지만 ‘재개’라는 단어가 인쇄된 판은 그보다 훨씬 새것으로 보였다. 누군가 옛날 날짜가 적힌 기록 위에 최근의 문구를 올렸을지도 모른다.
테오른을 법원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감정 결과를 보여 주지 않았다. 대신 정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당신 측이 주장하는 삼십 일은 어느 문서의 어느 효력에서 시작합니까?”
그는 대답했다. “마지막 증언을 보관하는 의무를 이행할 기회를 얻은 때입니다.”
“그 말은 규약의 ‘적법한 수령 완료’와 다릅니다.”
“법정에서 다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때 원본을 갖고 오세요.”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웃었다. “징수관님은 날짜를 너무 사랑하시는군요.”
나는 대답했다. “사람의 임금 지급일과 계약의 만료일을 같은 펜으로 쓰니까요.”
에리카가 가져온 책상 서류가 눈앞에 놓이기 전, 나는 국경 다리 사고에 관해 브란트와 두 번 더 이야기했다. 첫 번째 대화에서는 복구에 필요한 재료만 들었다. 두 번째 대화에서는 그 재료를 누가 신청했는지 물었다. 다리 고정핀 한 개가 없어졌는데도 관리 대장에는 부품 교체가 끝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작업반장은 다른 다리의 보수 내역과 혼동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설명이 사실인지 별도 검증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작업반장을 제삼 결제소의 공범이라고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한 개의 부품을 잃어버린 일과 왕국의 세입 권한을 탈취하려는 일이 같은 사람에게서 시작됐다는 근거는 없었다.
사고를 당한 아이의 어머니는 내게 물었다. “이런 위험을 막으려고 세금을 내는 거 아닙니까?” 나는 대답을 바로 할 수 없었다. 그렇다. 적어도 세금은 길을 고치고 물을 공급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써야 한다. 그러나 세금을 내는 일이 모든 사고를 막아 주지는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고가 났을 때 누가 책임지고 어떤 돈으로 복구했는지 감추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교 보수비와 북문 출입세 수입을 따로 적었다. 사고 피해 보상은 보험과 공공 배상 규정에 따라 판단되어야 했다. 두 돈을 합쳐 ‘사람을 지키는 세금’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회계적으로는 위험했다.
브란트는 내가 너무 작게 말한다고 했다. “백성에게 당당히 약속해도 됩니다. 다음 다리는 안전할 거라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점검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보수 전에는 통행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다시는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 브란트는 한참 침묵하더니 현장에 안전 표지판을 세우러 갔다. 나는 그가 직접 말을 바꾸는 사람이라는 걸 존중했다. 말뿐인 명령 대신 나무판에 화살표를 그리는 군인이라면 믿을 만했다.
오후에는 에리카가 부친의 마지막 결산표를 다시 대조했다. 검은 장부 두 권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필체가 남은 오래된 메모가 자꾸 눈에 걸렸다. 벨란 감사관은 같은 금액을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검정은 실제 지급 확인, 붉은색은 청구 또는 추정, 푸른색은 증언으로 확인된 행동. 에리카는 어린 시절 아버지 책상에서 그 색연필을 몰래 가지고 놀았다고 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던 건 파란색이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파란색을 가장 조심해서 쓰셨죠.”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사람이 말했다는 건 그 사람이 본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다시 메라의 진술을 읽었다. 그녀는 두 번째 종소리 뒤 벨란이 들어왔다고 했다. 불 속에서 나왔다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옷에 재가 묻어 있었다고 했다. 두 표현은 다르다. 벨란이 처음 불을 보았는지, 어느 통로에서 재를 뒤집어썼는지, 그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었는지. 우리는 메라에게 추가 질문을 보내기 전 보호기관과 상담했다. 반복해서 같은 기억을 요구하면 증인이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하나로 줄였다. ‘당시 감사관의 오른손과 왼손에 무엇이 있었는지 구분하여 기억하십니까?’ 메라는 다음날 답하기로 했다.
네일은 재개 명령의 빈 판과 작업 메모에서 발견된 기름 자국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다. 인쇄판에는 마찰을 줄이기 위해 여러 종류의 기름을 쓴다. 왕궁 제이 인쇄실이 쓰는 기름과 북문 수리소가 쓰는 기름은 공급처가 일부 겹쳤다. “같은 기름이 나왔다고 같은 작업장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감정 신청서 첫머리에 적었다. 티르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증거에 원하는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중에 같은 증거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잠시 왕궁 뜰을 걸었다. 아델리온 국왕이 혼자 있었다. 그는 예전에도 금화 열일곱 닢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했던 시절을 돌아보며 웃곤 했다. 오늘은 웃지 않았다. “한 나라의 왕이 날짜 하나를 다투고 있으니 우습군.” 나는 대답했다. “폐하, 날짜 하나 때문에 임금을 못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스운 일은 아닙니다.” 왕은 잠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날짜를 바로잡아 주시오. 내가 왕관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그대가 해야겠지.” 나는 왕관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날은 하지 않았다.
티르센은 오래된 규정판에 최근 글자가 올려진 것이 사실로 확인되더라도, 그 자체로 화재의 원인까지 설명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화재는 불이 어떻게 붙었는지, 어느 출구가 막혔는지, 사람들이 언제 이동했는지를 따로 조사해야 한다. 문서 조작은 그 진실을 숨기는 도구일 수 있지만 반드시 같은 범인이 한 일일 필요는 없다. 이 차이를 지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범인 하나만 찾으면 모든 기록이 깔끔하게 정리될 듯했으니까. 그러나 현실의 장부도 소설보다 더 무질서하게 틀어지는 일이 많았다.
다리 사고에서 살아난 아이가 에리카에게 작은 나무 조각을 전해 왔다. 부러진 다리 끝에서 주웠다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바로 화재 증거로 취급하지 않았다. 브란트에게 넘겨 사고 현장의 위치와 연결되는지 조사하도록 했다. 아이에게는 무섭지 않게 설명했다. “중요한 걸 주워 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제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언제 다리를 다시 건널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안전 점검이 끝났을 때라고 대답했다. 그는 실망했지만 곧 어머니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나는 이 조사의 끝에서 화재가 정말 두 번 났는지도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종이 두 번 울린 사실과 불이 두 번 시작됐다는 주장은 달랐다. 문서보다 먼저 불길의 방향을 보아야 했다.
그날 밤 에리카가 부친의 빈 서류철을 들고 찾아왔다. 종이 사이에 얇은 실 한 가닥이 끼어 있었다. 메라의 푸른 실과 색이 닮았지만, 실은 어디서든 살 수 있었다.
“이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쓰신 책상에서 나왔습니다.”
실의 끝에는 조그만 종이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그 위에 희미한 글자가 보였다.
‘두 번째 장부를 열지 마라. 첫 번째 장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이 협박인지 경고인지 몰랐다. 다만 누군가 날짜 하나를 바꾸려던 사건이, 다시 장부 두 권의 이야기로 돌아왔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제12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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