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서른을 본 사람은 누구나 기한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는 사벨의 쪽지를 분쟁 문서 곁에 놓지 않았다.
사벨이 직접 제출한 쪽지도 아니었다. 아내의 손을 거쳐 전달받은 종이였으므로 진술의 출처를 확보하려면 따로 확인해야 했다. 법원 보호담당자는 사벨이 안전하게 의견을 전할 수 있는 연락 창구를 마련했다. 그동안 우리는 인쇄실의 수리 발주 목록을 읽었다.
서른은 날짜가 아니라 부품 번호일 수도 있었다. 작업표에는 ‘30호 맞물림 고리’라는 항목이 있었고, 지난달 구매한 고리의 실제 수량은 둘이었다. 인쇄실 소모품 비용은 금화 단위가 아니라 은화와 구리화로 나뉘어 있었다. 누군가 서른을 서른 날로 읽는 순간 부품비를 보관료로 바꿔 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 누가 부품 번호를 기한으로 착각하겠습니까?” 루카스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숫자부터 보거든. 나도 그랬고.”
에리카가 한 장을 더 꺼냈다. 수리 주문서 원본에 서른이라는 숫자는 없었다. 숫자가 찍힌 것은 사본이었다. 원본과 사본 사이에서 무엇이 추가됐는지 확인해야 했다. 티르센은 두 기록의 문장 배열이 조금 다르다고 설명했다. 사본은 최근 판으로 재출력한 것이고, 재출력은 그 자체로 위조가 아니었다. 공용 규정을 현장 직원이 쉽게 읽도록 고치는 일은 흔했다.
오후에 사벨이 보호기관을 통해 진술하겠다고 연락했다. 그는 폐기 계수판의 열쇠를 관리한 적이 있지만 실제 손잡이를 돌리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제삼 결제소에서 온 발주 담당자가 ‘서른 번째 칸을 맞춰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합니까?” 보호담당자가 물었다.
“얼굴을 봤지만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왼손 장갑 끝에 검은 실이 있었습니다.”
장갑이라는 말에 루카스가 자세를 고쳤다. 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검은 실이 있다고 해서 장갑 0호일 수는 없다. 장갑은 왕궁에서도 시장에서도 흔했다.
“그 사람의 장갑을 보고 직책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없습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건 그가 출입증을 보여 줬다는 사실뿐입니다.”
출입증 번호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좋은 증언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했으니까.
티르센은 사본의 압흔을 검토하다가 실험 조건을 제안했다. 날짜판을 수동 초기화한 상태에서 인쇄하면 하단의 작은 구멍에 잉크가 조금씩 몰렸다. 같은 흔적이 제삼 결제소 신청서에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작업장과 사람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같은 규격의 판을 사용하는 곳이 여럿 있었다.
재현 실험은 공개 입회 아래 진행했다. 나는 수사 대상 원본을 만지지 않았다. 폐기 장치를 세 차례 돌리고 첫 장과 다음 장의 압흔 차이를 기록했다. 첫 번째 장에는 끝 글자가 아주 조금 두꺼웠다. 세 번째 장은 깨끗했다. 하지만 제삼 결제소 서류에 남은 흔적은 세 번째 장과 닮았다. 단순 재현만으로 출력을 맞출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완전히 같지 않네요.” 루카스가 실망했다.
“다행이죠. 같다고 우겼다면 우리가 위험해졌을 겁니다.”
그때 에리카가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에 자국이 있었다. 수동 초기화 장치가 남긴 자국이 아니라, 다른 종이 위에서 쓰인 숫자의 압흔이었다. ‘30’ 옆에 조그만 표시가 더 있었다. 화살표처럼 보였다.
“이 표식은 무슨 의미죠?” 내가 물었다.
네일은 한참 보고 나서 말했다. “날짜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아닙니다. 계수판을 초기화한 뒤 다시 올바른 위치로 돌리라는 작업 지시표예요.”
“그럼 사본에 찍힌 서른은 기한이 아니라…”
“원위치 눈금일 수 있습니다.”
사벨의 진술 뒤 우리는 그의 고용 계약을 다시 검토했다. 해고 통지에는 ‘창고 계수판 임의 초기화’라고 적혀 있었다. 징계위원회 출석란에는 그가 불출석한 것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같은 날 사벨은 보호기관에 출석해 있었다. 누군가 출석 기록을 바꿨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위원회가 미리 열린 것일 수도 있고 사벨의 통지서를 다른 날짜에 전달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해고처분의 정당성 판단을 노동 담당 기관에 맡기고 원본 통지서와 수령증만 확보했다. 징수관이 모든 사건의 판사가 될 필요는 없었다.
마이렌의 보호 담당자가 법원에 들렀다. 그는 사벨의 이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이렌이 불안해한다고 했다. 사벨은 화재 당일 급식실에 식재료를 옮기던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마이렌에게 그의 증언을 듣고 싶은지 먼저 물었다. 마이렌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대신 그날 창고 문이 안에서 잠겨 있었는지만 확인해 달라고 했다. 그 질문은 소중했다. 피해자는 내 수사를 돕기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무서웠던 물음에 답을 얻고 싶어 할 수 있다.
사벨에게 그 질문을 전달하자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안쪽 자물쇠가 잠긴 문도 있었고 열린 문도 있었다고 했다. 어느 문인지 특정하지 못했다. “거짓말 같습니까?” 그가 물었다. “모른다는 부분을 그대로 말해 주셔서 도움이 됩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는 오래 숨을 참았다가 내쉬었다. 자기가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면 범인 취급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위치를 표시한 빈 도면을 주고, 확실히 기억나는 곳만 표시하게 했다. 한 모서리에만 조그만 동그라미가 생겼다. 그 동그라미는 마이렌이 구조를 기다렸다고 말했던 계단과 가까웠다. 그러나 같은 장소라는 결론은 아직 이르렀다.
오후에는 재무청의 오래된 보관료 청구서를 하나씩 뒤집었다. 이 서류들은 많은 사람에게 같은 숫자를 청구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 삼십 날이라는 말, 보관 권한이 종료되지 않았다는 문구. 내 눈에는 그것이 한꺼번에 보였지만 루카스는 다른 것을 봤다. “징수관님, 어떤 사람에게는 수수료가 은화 반 닢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닢이에요.” 그는 사소한 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차이를 무시하지 않았다. 청구서 발행 시기와 서비스 제공 범위가 다르면 금액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양식과 같은 서비스인데 돈이 달라졌다면 누군가는 차액을 가져갔을 수도 있다.
나디아는 피해자 상담소에서 가져온 신고서들을 보여 주었다. 최근 갱신 창구는 현금만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현금이 오가면 계좌 추적이 어려워진다. 그래도 영수증, 접수 번호, 창구 개설 시각을 맞추면 발행 주체를 좁힐 수 있다. 우리는 신고자가 서로의 금액을 보지 못하도록 접수 자료를 가렸다. 사람들이 상대의 신고를 따라 하게 되는 순간 독립 증언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늦은 밤까지 서류를 나눴지만 아직 환급할 수 있는 돈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나디아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적어도 다음에 낼 돈은 줄일 수 있겠네요” 하고 웃었다.
테오른에게서는 의외로 차분한 답변이 왔다. 그는 날짜 산출 장치의 설치 계약을 자신은 검토하지 않았고, 결제소의 내부 관리인이 발주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나는 그 진술을 기록했지만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법률대리인이면서 내부 계약과 거리를 두려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반대로 실제로 분쟁의 한 조각만 맡았을 수도 있었다. 나를 찾아왔던 동판 문서와 지금 진술의 날짜를 비교하니 모순은 없었다. 모순이 없다고 진실이라는 뜻도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확인해야 할 상대는 더 늘어난 셈이었다.
퇴근할 무렵 루카스가 내 책상 앞에 앉았다. “한국에도 이런 일이 많았습니까?” 그는 가끔 내가 떠나온 나라 이야기를 묻곤 했다. 나는 잠시 커피 향을 떠올리려고 했다. 혀끝에서 그 맛이 선명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 정밀 열람 때문에 흐려졌던 기억인지,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옅어진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나는 새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수첩에 오늘의 기억을 썼다. ‘한국에는 숫자를 찍는 기계가 많았다. 기계가 많다고 사람들이 거짓말을 안 하진 않았다.’ 루카스가 웃었다. “이건 저도 이해할 수 있겠군요.” 내 기억을 위해 쓰기 시작한 수첩이 이 세계의 아이에게도 작은 교과서가 된 듯했다.
작업표를 들여다보던 네일은 우리에게 아직 확인하지 않은 작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계수판의 수리 장부에는 장치 번호와 판 번호가 따로 기록돼 있는데, 제삼 결제소가 제출한 사본에는 둘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그는 실무상 요약본에서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법원에 원본처럼 제출하려면 어떤 항목이 합쳐졌는지 밝혀야 한다. 나는 요약 사본의 제작 경위를 묻는 질의서를 작성했다. 원본을 고의로 숨긴 것인지 그저 담당자가 서둘러 정리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사벨이 보낸 다음 답신에는 자신이 매일 적던 식사 시간이 들어 있었다. 그가 정말 해고된 날 출근했는지를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가족에게 하루의 일을 보고한 기록이었다. 노동기관이 그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우리는 자료를 보전했다. 누군가를 쫓는 데 열중하다 가족의 평범한 메모를 모두 범죄의 증거로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루카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발견하는 모든 종이는 사건에 속하지 않아. 어떤 종이는 그냥 그 사람의 삶에 속해.” 그는 그 말을 수첩 한쪽에 적었다.
그는 기록을 접수한 사람과 읽는 사람도 구분하라고 덧붙였다. 기록을 읽은 공무원이 그 문장의 내용까지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사본의 작성 권한과 실제 사용 권한을 별도 칸에 적었다. 간단한 대조라고 생각했던 작업에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없다면 우린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잘못된 칸에 적을 것이다.
저녁에 로웬은 오늘의 보고서를 받아 들고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왕국의 조세권을 지킬 결정적인 증거를 기대했을 것이다. 나는 서른이라는 숫자를 둘러싼 오해를 적었다. 우리가 확보한 건 조작의 단서가 아니라, 조작을 입증하기 전에 버려야 할 성급한 설명 하나였다.
로웬이 말했다. “국민에게는 실패처럼 보이겠군.”
“그렇다면 실패라고 말해야죠. 단서를 찾았다고 모든 수치가 맞아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는 보고서를 덮었다. “그래도 내일은 뭔가 찾아오게.”
왕궁을 나오자 어둠 속에서 시계탑 종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저녁 시각을 알리는 평범한 종소리였다. 나는 삼 년 전 화재 때 들렸다는 두 번째 구조종과 다른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가 돌아갔다.
그때 오렐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제삼 결제소의 날짜 사본보다 오래된 서류 한 장에서 같은 원위치 표식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서류의 제목은 ‘화재 조사 중단 명령’이 아니라 ‘화재 조사 재개 명령’이었다. 도착하지 않은 명령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
제12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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