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에게 세금 고지서를 보내는 데 필요한 것은 검이 아니었다.
국왕의 허가서 두 장, 열람 신청서 여섯 장, 그리고 왕실 보존고 문지기의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었다.
“저 문은 삼백 년 동안 열리지 않았습니다.”
문지기 오렐이 말했다. 그는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굳어 있어 봉인 목록을 왼손으로 넘겼다. 문 옆에는 작은 모래시계가 있었다. 그가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는 누구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열지 않으신 건지, 열린 기록이 없는 건지 구별해 주시겠습니까?”
오렐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다릅니까?”
“누가 들어갔는지 기록하지 않았다면 닫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까요.”
그는 말없이 장부를 내밀었다. 마지막 열람 기록은 3년 전이었다. 신청자는 오스윈 전임 재무대신. 증빙 인장은 재무청 것이 아니라 군무청 것이었다. 내 질문에 오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들어온 건 아닙니다. 봉인을 확인하고 문턱에서 돌아갔어요. 본문을 꺼낼 수 없다고 화를 냈지요.”
“그래서 그 뒤 출입 기록이 없군요.”
“아니요.” 그가 말했다. “그 뒤에도 열람 요청은 많았습니다. 허가된 사람이 없었을 뿐이지요.”
나는 방문자 명부를 복사했다. 출입 허가가 나지 않은 신청서도 중요한 기록이었다. 오스윈 이름 옆에는 검은 깃털 세 개가 찍힌 봉랍 자국이 있었다. 페릭을 고용한 사람의 문양과 닮아 있었다. 같은 조직의 표식인지, 단순한 문양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에게는 국왕의 열람 재가와 재개한 감사원의 임시 감사관 임명서가 있었다. 그러나 법전에는 ‘감사원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임시 감사관이 그 직무를 대신할 수 있다는 해석이 필요했다. 나는 억지로 문을 열지 않았다. 왕실 서기관에게 유권 해석을 요청했고, 법정 서기가 참관하는 조건으로 임시 직무대행이 봉인을 확인할 수 있다는 답을 받았다.
오렐은 그 답을 두 번 읽었다. “무리한 왕명을 들고 오는 분들은 많은데 법적 근거를 갖춰 오는 분은 드뭅니다.”
“저도 귀찮습니다.”
“귀찮은 분이 더 오래 삽니다.”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제팔 봉인실 문은 녹슨 자물쇠가 아니라 오래된 계약 주문으로 닫혀 있었다. 에리카가 허가 문구를 읽자 금속의 틈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문이 열리는 동안 바닥에 작은 문장들이 나타났다. ‘계약서를 보는 사람은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다. 서명하지 않은 자에게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안에는 쇠사슬로 묶인 두꺼운 서류철이 있었다. 겉표지에 ‘제일차 밤의 공급 협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삼백 년 전 왕의 서명과 검은 태양 모양의 인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마왕 아자르켄의 인장입니다.” 에리카가 낮게 말했다.
서류철 첫 장은 뜻밖에도 무역 계약이었다. 흑철, 마력석, 밤꽃 약재를 마계가 공급하고 아델리온 왕국의 전신인 옛 연합 왕조는 밀가루, 소금, 도로 이용권을 제공한다는 내용. 전쟁과 학살 이야기는 없었다. 통상 절차에 따른 원산지 확인과 통관 신고 조항도 있었다.
“마왕도 장사를 했군요.” 루카스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이네. 그런데 누가 매출을 올렸는지는 아직 몰라.”
계약서를 끝까지 읽자 이상한 점이 드러났다. 왕국이 마계에서 물건을 들여올 때 세금은 왕국 측 수입상이 납부한다고 되어 있었다. 반대로 마계가 왕국에서 산 물건의 수출 신고 책임은 왕국 상단에 있었다. 마왕에게 개인적으로 납부 의무를 부과하는 조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마왕이 탈세했다는 건 틀린 얘기 아닌가요?” 루카스가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다른 세목이나 별도 거래는 확인해야 해.”
나는 계약 원본의 날짜, 서명, 이후 개정 내역을 기록했다. 마지막에 철사로 묶인 부속 문서가 한 장 더 있었다. 종이 색이 유독 희고 잉크도 새것이었다. ‘전시 물자 예외 조항’이라고 적혀 있었다. 삼 년 전부터 마계에서 들여오는 무기를 비과세로 취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에리카가 손을 멈췄다. “이건 삼백 년 전 종이가 아닙니다.”
“그렇죠. 누가 끼워 넣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부속 문서에는 국왕 인장과 군무청 인장이 나란히 있었다. 국왕이 삼 년 전 직접 승인했는지, 어느 범위까지 재가했는지는 아직 몰랐다. 제삼자의 위조 여부를 조사하기 전에 실제 결재 문서를 확보해야 했다.
나는 장부 권능을 쓰고 싶었다. 하루 세 번의 정밀 열람 중 첫 번째였다. 그러나 내 기억에서 무엇이 사라질지 생각하자 망설여졌다. 한국에서 어머니와 통화하던 마지막 저녁의 냄새가 이미 흐릿했다. 힘을 남용하지 않으려면 질문이 명확해야 했다.
'전시 물자 예외 조항의 작성 과정에 관련된 공적 기록이 어디에 있나.'
손목이 따뜻해졌다.
[정밀 열람 1/3]
[첨부문서 생성 흔적: 삼 년 전 왕궁 서고]
[최종 편철 장소: 제팔 봉인실]
[원본 결재 대장: 왕실 인장 보관실]
[직접 작성자: 불명]
누구의 죄도 증명하지 못하는 답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가져올 기록은 알게 됐다. 나는 그 내용 대신 ‘결재 대장을 대조할 것’이라는 조사 계획을 썼다. 장부의 결과를 증거로 제출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지켜야 했다.
그런데 기억의 대가는 이번에도 찾아왔다. 나는 한국의 집 현관문을 열 때 들리던 소리를 떠올릴 수 없었다. 비밀번호였는지 열쇠였는지조차 모호해졌다. 사소한 기억 하나가 떠날 때마다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조금씩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요.” 에리카가 말했다.
“잠을 잘 못 잤어요.”
“그 대답은 몇 번째죠?”
그녀는 나를 의심하면서도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나는 원본 옆에서 발견한 회색 종이를 펼쳤다. 계약 이행을 점검한 옛 조사관의 의견서였다. 잉크는 낡았지만 글씨가 또렷했다.
'새로 오는 왕들은 늘 마계를 적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들이 쓰는 소금과 돌기둥의 재료는 마계에서 산 것이다. 거래를 숨기면 세금도 숨어버린다.'
작성자는 백오십 년 전의 감사원 서기였다. 이름이 낯설었지만 글씨 아래 남은 작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였다. 이 세계에도 커피가 있는지는 몰랐는데, 오렐은 왕궁에서 오래전부터 검은 볶은 콩 차를 마셨다고 말했다.
“그분은 대단한 분이었습니까?” 루카스가 물었다.
“글쎄. 오래전에 일한 서기니까 사람들이 기억하진 않겠지.”
“그런데 글씨는 남았네요.”
나는 문득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작성했던 조사 보고서가 떠올랐다. 그 보고서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팀장이 결재했을까. 내가 사라졌으니 다른 사람이 후속 조사를 했을까. 그 사람들 이름은 기억하는데 마지막 회의에서 누가 무슨 농담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의 윤곽만 남는다는 게 이렇게 지독한 줄 몰랐다.
에리카가 회색 의견서를 받아 들었다. “이 사람, 오래전 왕실 감사원을 열어두자고 청원했군요. 당시에도 군수 거래를 왕실 권한으로 비공개했나 봐요.”
“처음 보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군요.”
“누군가는 전에 막으려고 했고요.”
루카스는 의견서 뒤에 붙은 목록을 보더니 신이 났다. 관문별 세금 수입을 적은 긴 표였다. 숫자를 좋아하는 소년답게 금세 덧셈을 시작했다.
“징수관님, 옛날에도 북문이 제일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운하에서 걷은 돈은 적습니다.”
“운하에 물건이 적어서일까?”
“아니요. 마차는 관문에서 세금을 내고 배로 갈아타니까요. 배에 실린 물건은 다른 숫자로 잡혀요.”
나는 소년을 바라봤다. 앞서 북문에서 옮겨진 96금화와 운하 은괴가 연결된다는 의심을 했지만, 같은 물건이 이동할 때 장부의 이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루카스, 아주 중요한 지적이야.”
소년이 두 귀를 붉혔다. “저는 그냥 표를 더했는데요.”
“그런 덧셈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오래된 표를 복사해 현대 관문 번호와 대조할 수 있도록 별도 목록을 만들었다. 나중에 소금과 광석이 같은 화물인데 여러 번 계산됐는지, 아니면 한 번도 계산되지 않았는지 확인할 때 유용할 것이다.
오렐은 그 일을 보며 툴툴거렸다. “삼백 년 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웃는 사람들은 처음 보겠군.”
“관청에선 오래된 먼지가 가장 값진 자료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 가져가시오. 먼지는 돈 안 받겠소.”
루카스가 또 웃었다. 나는 털어낸 먼지를 영수증 봉투에 넣을 뻔했다. 오렐이 마지막 순간 막았다. 이런 날은 내 직업병이 조금 과했다.
우리는 전시 물자 부속 문서를 별도 봉투에 넣고, 복사본은 서고에 남겼다. 원본이 사라지는 걸 막기 위해 오렐과 법정 서기가 봉인선 위에 각자의 이름을 적었다. 문지기는 나가면서 말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삼백 년 동안 같은 계약으로 왕국이 계속 살아남았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떤 점에서요?”
“왕조가 세 번 바뀌고, 국경이 일곱 번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한 번도 이행 종료 도장이 찍히지 않았어요.”
나는 계약 뒷장을 보았다. 갱신 기간은 백 년. 갱신 조건은 양 당사자가 반대하지 않는 경우 자동 연장. 마왕이 살아 있으니 마계 측 서명자는 바뀌지 않았다. 반대로 인간 쪽은 세 차례 왕조를 거치며 승계 확인서를 붙였다.
“원래 거래가 계속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살아 있는 계약이 어떤 권리를 넘겨줬는지죠.”
문을 나서자 시장 쪽에서 종소리가 났다. 한 무리가 검은 천을 두른 마차 앞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마계산 약재는 저주받았다. 사지 말라.’ 가판대에서 마른 밤꽃을 팔던 노파는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왕과 왕실이 오랫동안 거래했다는 소문을 듣고 화를 낸 모양이었다.
루카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약재도 세금을 안 낸 물건인가요?”
“확인도 안 했는데 죄부터 붙이지 마.”
나는 노파에게 수입 신고표가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낡은 장부를 꺼냈다. 첫 장에는 정상적으로 납부한 관세 내역이 있었다. 왕국 상인이 납부한 세금이었다. 검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종이를 빼앗으려 했지만 브란트 대장이 그를 막았다.
“지금은 위반 여부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폭력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노파는 손등의 핏줄이 드러난 채 장부를 붙잡았다. 그녀가 파는 약재는 폐가 약한 어린아이에게 쓰인다고 했다. 마계산이라는 이유만으로 가게를 부수면 병든 아이가 먼저 피해를 본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현재 이 가게의 수입 신고와 납세 영수증은 확인됐습니다. 마왕이 세금을 안 냈다는 소문은 이 상인을 공격할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투덜거렸고, 누군가는 발길을 돌렸다. 그중 검은 가운의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허리에 세 갈래 깃털 모양의 금속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가 떠난 뒤 에리카가 말했다. “마계와 계약한 사실을 숨기려는 사람도 있고, 그 사실을 퍼뜨려서 장사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군요.”
“서로 다른 이익이 같은 소문을 이용할 수 있어요.”
저녁에 돌아온 우리는 결재 대장 열람을 신청했다. 답변은 빠르게 왔다. 왕실 인장 보관실의 서류 일부가 불에 그을려 판독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손상 시기는 삼 년 전 화재 직후였다.
나는 손상 목록에 붉은 줄을 그었다. 그날은 에리카의 아버지가 죽은 날이기도 했다.
나는 보존고에서 돌아온 뒤 열람 신청서 첫 장에도 오늘의 결론을 적었다. 삼백 년 된 계약의 존재는 확인됐지만, 그것만으로 오늘 살아 있는 누구에게든 죄를 씌울 수는 없었다. 원본에 붙은 새 종이와 옛 조약의 효력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먼지가 묻은 손으로 적은 그 문장이 훗날 얼마나 큰 싸움의 시작이 될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루카스가 제팔 봉인실에서 복사해 온 계약 마지막 장을 내밀었다.
“징수관님. 이거 좀 보세요. 맨 끝에 서명란이 하나 더 있어요.”
거기에는 고대어로 세 번째 당사자가 적혀 있었다.
계약 관리인: 검은 깃털을 지닌 자.
나는 그 문장을 번역해 보았다. 세금 미납 기록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이름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삼백 년 동안 왕과 마왕 사이에서 장부를 관리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제1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