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에게 잔액증명서를 부탁한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린다면 그건 정상이다. 나도 그런 일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세르나는 내 요청서를 읽고 서류 끝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자네는 삼백 년 동안 납세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마왕을 조사하겠다더니, 이제 마왕에게 증빙을 달라고 하는군.”
“납세 기록이 없다고 탈세가 확정되는 건 아닙니다. 그동안 왕국의 세무 체계가 없었던 기간도 있잖습니까.”
“마왕 폐하께선 그 말을 들으면 좋아하시겠어.”
“좋아하시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맞는 말이라 하는 거죠.”
내가 요청한 것은 금화가 아니었다. 영번 협약 아래 왕국과 마계가 공동 보관한 증언 서식의 대조표와, 삼 년 전 화재 이후 누군가 마계에 요청했던 ‘특별 잔액 확인서’의 존재 여부였다. 특히 드래곤에게 갔던 340금화 보전 청구와 비슷한 서식이 다른 곳에서도 쓰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왕국 회계 법원에서 정식 국제 협조 요청을 보냈고, 세르나는 마계의 독립 감사관이 보는 공개 가능한 항목부터 대조했다. 오래된 종이를 펼치는 동안 그는 모서리에서 검은 재를 한 줌 털었다. 마계 종이는 불에 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계 서기관도 서류에 재를 쏟는 실수는 하는 모양이었다.
“폐하의 잔액이 얼마입니까?” 루카스가 속삭였다.
“묻지 마. 왕국 예산보다 크면 너 또 계산하기 시작할 거잖아.”
“왕국을 일곱 번 살릴 수 있나 궁금해서요.”
“남의 돈으로 왕국을 살리는 계획은 일곱 번 다 부도야.”
세르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쪽에서 확인한 것은 잔액이 아니야. 삼 년 전 특별 확인 요청이 두 번 왔다는 것뿐이지. 첫째는 방벽 유지료 수령 사실 확인. 둘째는 공동 증언 보관 상태 확인.”
첫 번째 요청은 이미 알고 있는 돈의 흐름과 연결돼 있었다. 왕국에서 승인한 방벽 유지료 720금화는 마계에서 수령되지 않았다고 했다. 왕실 지급 승인액이 720금화라는 것과 실제 중간 계정에서 480금화의 출금 증빙이 있다는 사실을 구별해야 했다. 그 480 가운데 조폐소 계좌로 보전된 260금화, 추가로 추적 중인 140금화와 80금화 역시 아직 확인된 지급처가 달랐다.
“다른 부분을 섞으면 안 됩니다.” 내가 경고하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나도 표 하나를 추가했다. “우리 마계는 받은 돈이 없다는 걸 확인해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왕국의 누가 훔쳤는지 우리 원장만으로 알 수는 없지.”
두 번째 요청에는 독특한 기호가 있었다. ‘증언 보관 상태: 열하나 확인, 마지막 하나 반환 유보.’ 왕국 보관원장의 ‘열두 단위 중 수령 열하나’와 비슷했지만 같지는 않았다.
“왜 한쪽은 수령이라 쓰고 다른 쪽은 유보라 썼죠?”
“번역이 다를 수도 있고, 기록 시점이 다를 수도 있지. 원본은 보존 중이니 필사 시각부터 확인해야 해.”
나는 마계 장부에 기록된 요청자의 직책을 보았다. ‘공동 보관 관리자, 임시 대행’. 개인 이름은 없었다.
“장갑이군요.”
세르나가 고개를 저었다. “장갑이라는 말은 없어. 직책이 비슷할 뿐이야.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
그때 마계 종이 한쪽이 스스로 붉어졌다. 세르나는 눈썹을 올리고 주문을 읊었다.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종이 위에 새로운 경고가 나타났다.
‘원본 증표가 아닌 사본에 인가 문구를 기입하지 말 것.’
“자동 경고입니까?”
“그렇네. 이건 보관 관청에서 쓰는 평범한 마법이야. 누가 권한을 도용하지 못하게 사본과 원본을 구분해 주지.”
“왜 우리 왕국엔 이런 게 없죠?” 루카스가 물었다.
“있었어.” 에리카가 대답했다. “그런데 검인 장치를 고치는 비용을 아끼느라 일부 기능을 끈 기록이 있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세계에서 마법 장비는 거창한 비밀을 품은 성물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예산 삭감 때문에 작동하지 않는 사무기기였다. 진실의 장부는 하루 세 번 정밀 열람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기억을 깎아 먹고, 법정에서 곧바로 증거도 되지 않았다. 반면 출처가 분명한 평범한 마법 경고는 누구에게나 확인 가능한 단서였다.
“저 장비 수리 견적을 받아 보죠.”
“돈을 걷으러 왔다가 돈을 쓸 생각부터 하는군.” 세르나가 놀렸다.
“아껴야 할 돈과 써야 할 돈을 구분하는 것도 재정입니다.”
마계에서 온 회신에는 작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확인 요청 두 건 중 한 건은 접수만 했고, 한 건은 내용 대조를 마쳤다.’ 나는 루카스에게 두 줄을 따로 칠하게 했다.
“왜 굳이 두 색으로 표시하죠?”
“확인 요청을 보냈다고 상대가 사실로 인정한 게 아니거든. 접수와 확인은 달라.”
세르나가 동의했다. “마계 서기관도 같은 실수를 해. 도장이 하나 더 찍혔다고 진실이 늘어나는 건 아니지.”
“그래도 마법 도장은 거짓말을 못 하지 않습니까?”
“도장은 ‘누가 눌렀는지’ 보여 줄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눌렀는지는 알려 주지 않아.”
그 말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왕국에서 발견된 가짜 손도장과 대리 출석 문제가 결국 같은 자리에서 엮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리카의 이름으로 누군가 장갑 보관자 등록을 했다고 해서, 에리카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왕국 마법국의 예산표를 살펴보기로 했다. 검인 장치 수리 요청은 지난 다섯 해 동안 세 번 거절되어 있었다. 첫 두 번은 금고가 바닥나서, 세 번째는 수리 단가가 과도하다는 이유였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요청에 붙은 견적서였다. 장치 전체를 교체하는 비용은 90금화, 수신부만 고치는 비용은 6금화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최종 보고서에는 두 금액의 차이가 지워진 채 ‘수리비 90금화’만 남았다.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누가 판단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마법국 기술관은 견적서 원본을 보여 줬다. 그는 얼굴을 붉혔다. “저희가 낸 건 소규모 수리안입니다. 바뀐 결재표는 처음 보는데요.”
나는 곧바로 누군가의 위조라고 쓰지 않았다. 서식 이송 과정에서 잘못 옮겨졌을 수도 있었다. 다만 같은 오류가 반복됐는지 보기 위해 다른 장비의 비용표도 요청했다. 장비 하나가 고장 난 탓에 개인의 동의가 없었던 것을 있는 것처럼 기록할 위험이 있었다면, 수리비를 아끼는 것은 절약이 아니라 부채를 미루는 일이었다.
“수리를 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요?” 루카스가 물었다.
“아니. 고쳐진 장치가 예전의 거짓 기록까지 바로잡아 주진 않아. 다만 내일부터는 같은 거짓말을 반복하기 어려워지겠지.”
작은 부품 하나가 왕국 재정에 얼마나 큰 파문을 내는지 새삼 느꼈다. 드래곤의 금고는 누구나 탐냈지만, 인장실의 낡은 수신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사이 누군가는 다섯 해 동안 도장을 마음대로 찍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독립 기술 감정과 예산 재심의를 요청했다. 영수증에는 아직 지급액이 없었다. 수리 결재가 떨어지기 전까지 공금을 쓴 것처럼 적지 말라고 루카스에게 당부했다.
오후 법원에서는 보관원장과 마계 회신의 공통점을 증거 목록에만 올렸다. 수령과 반환 유보의 차이는 다음 감정 대상이었다. 법원은 누군가 그 차이를 이용해 마이렌에게 임의 출석 의무를 만들었다는 의혹에 대해 현행 집행정지 결정을 유지했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은 출석은 증언이 아니다.
세르나는 내게 마계의 영수증 두 장을 보여 주었다. 하나는 물건을 받아 두었다는 표였고, 다른 하나는 계약상 권리가 이전됐다는 표였다. 둘의 인장은 비슷했지만 맨 아래의 작은 점이 달랐다. “우리가 인간을 얕보는 것처럼, 인간도 마계 문자를 한 덩어리로 보지. 바로 그 빈틈에서 돈을 빼돌리는 자들이 생겨.” 나는 직원들에게 작은 점을 크게 확대해 그린 안내문을 만들게 했다. 어려운 말을 줄이는 일과 서로 다른 권리를 같은 말로 바꾸는 일은 달랐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워야 하지만, 쉬워진 만큼 틀려서는 안 됐다.
청사를 나서자 시장 상인들이 나를 붙잡았다. ‘마왕이 빚을 갚는다’는 소문이 하루 만에 ‘마왕이 왕국을 사들인다’로 변해 있었다. 누군가는 마왕 이름으로 발행된 가짜 채권을 들고 와 세금 감면을 요구했다.
“이건 마왕의 인장이에요!”
세르나가 증서를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폐하의 인장은 여섯 뿔인데 여긴 일곱 뿔이군.”
상인은 서류를 뒤집었다. “한 개는 그림자 아닌가요?”
“그림자에 이자를 받는 자는 처음 봐.”
나는 가짜 채권을 무효라고 즉석에서 선고하지 않았다. 거래 상대와 판매 경로를 신고하도록 안내하고, 감정 전에는 자발적인 거래를 멈춰 달라고 공지했다. 증서가 가짜일 수 있어도 이미 돈을 낸 사람은 진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퇴근 직전 급식소에서 보낸 문의서도 도착했다. 마법국의 낡은 검인 장치를 고치면 급식 재고 표에도 사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기술관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신분 확인과 물품 인수를 하나의 기능으로 합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사람이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과 물건을 실제 받았다는 기록은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계를 고쳐도 서류 두 장은 남는군요.” 루카스가 투덜댔다.
“그렇지. 한 장으로 줄일 수 있다고 좋아하다가 누군가 받을 돈까지 사라질 수 있으니까.”
그는 귀를 긁적였다. 나는 재고 담당자의 인수 확인 서명을 별도 보존하는 조건으로 장치 사용 시험을 요청했다. 실제 도입을 결정할 예산은 아직 없었다. 기술관은 작은 시험판을 만든 뒤 바닥에 두 가지 색의 불빛을 켰다. 초록색은 출입, 황금색은 인수였다. 출입만 했는데 황금색 불까지 켜지는 오류가 나는 순간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누군가는 바로 그런 오류를 이용해 사람의 동의를 가짜로 만들었을 수 있었다.
시험 결과를 남긴 종이에 나는 동그라미 대신 물음표를 썼다. 단순 고장인지 의도적인 개조인지 아직 모른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의심이 생겼다고 해서 오랜 의심이 증거로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밤에 마왕 아자르켄의 공식 서한이 도착했다. 봉투에서는 뜨거운 쇳내가 났지만 속지는 온전했다. 그는 세르나를 통해 짧은 말을 남겼다.
‘마계는 증언 하나를 돌려주지 않은 자의 채무를 대신 갚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줄에는 더 뜻밖의 문장이 있었다.
‘마지막 것을 받는 사람은 왕관을 쓴 자가 아니다.’
왕위 담보 계약과 달리, 이번 서한은 왕국의 왕관이 오히려 권한의 바깥에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마왕의 말도 원본 법규를 대체하지는 못한다.
나는 편지를 봉인해 법원에 제출했다. 숫자가 하나 모자라는 사건에서 마왕의 권위를 빌려 사람을 지목하는 일만큼 위험한 지름길도 없었다.
“왕관이 아니라면 누구죠?” 루카스가 물었다.
“반환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 나는 대답했다. “그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때까지는 빈칸으로 둬.”
제11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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