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종이의 빈칸은 생각보다 컸다.
인계증 끝에서 누군가 이름 한 줄을 도려냈다. 칼날은 첫 장뿐 아니라 아래에 놓인 두 번째 장까지 가늘게 긁어 놓았다. 오렐은 문서를 투명한 유리판 밑에 넣고 나서야 내게 가까이 오라고 했다.
“손대시면 안 됩니다.”
“이제 저도 압니다. 지난 열흘 동안 제 수첩을 만질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손을 뻗으십니까?”
“세무조사관의 직업병이죠.”
오렐은 웃지 않았다. 보존고 문지기가 웃음을 아끼는 건 어쩌면 국가 예산을 아끼는 일만큼 중요한 직무일지 모른다.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초 인계 책임자: 공동 관리단 장갑.’
그 아래 잘린 칸은 ‘개인 성명’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장갑 낀 남자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삼 년 전 셀딘 모로에게 사라진 제12장을 금화 백 닢에 사겠다고 제안했다는 인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하지만 문서는 그런 결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갑은 개인의 별명일 수도 있었고, 보관 책임자가 착용해야 하는 공용 장갑을 뜻할 수도 있었다.
“이 원본은 언제 들어왔죠?” 에리카가 물었다.
“어젯밤 세 번째 종이 울린 뒤입니다. 밀봉 봉투가 보존고 반환구에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 두었습니까?”
“당직 기록에는 배달원 이름이 없습니다. 대신 반송함 개폐 장치가 움직인 시각만 있습니다.”
“그 시각의 장부를 보존해주세요.”
오렐이 곧장 펜을 들었다. 나는 그에게 또 하나를 요청했다. 종이가 잘린 시점과 반환구를 거친 시점은 달라야 한다. 도려낸 사람과 보낸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증거도 없다.
티르센 감정관은 한참 뒤 실험용 등불을 들고 왔다. 그는 유리판 밑에 보관한 종이의 그림자부터 확인했다.
“이 칼자국만으로 이름을 읽어낼 수는 없습니다. 아래 장에 남은 압흔을 비교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원래 글씨의 필압인지, 보관 중 눌린 자국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어제의 저라면 그냥 이름을 추측했을 겁니다.”
“지금의 징수관님은요?”
“추측을 적는 칸을 따로 만듭니다.”
나는 새 수첩에 두 줄을 적었다. 확인: 개인 성명란이 잘렸다. 미확인: 잘린 이름과 장갑 낀 남자가 동일한지.
오전 심의에서는 예상치 못한 반대가 나왔다. 왕실 보존고 담당 부서가 인계증의 열람 자체를 제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삼백 년 전 공동 보관 규칙을 건드리면 현재 왕실의 국경 물자 운송 권한이 흔들린다는 이유였다.
로웬이 입을 열었다. “국경 방벽 수리 물자도 공동 보관 절차를 따릅니다. 보관권한이 무효라는 소문이 돌면 상인들이 화물을 내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럴듯했다. 나는 왕실의 재산권과 민간의 보관증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부터 설명했다. 영번 기록봉의 보관권한이 유효한지 살피는 것과 식량 수레가 오늘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조사를 멈추자는 뜻은 아닙니다.” 로웬이 말했다. “오늘 먹을 빵도 같이 챙기자는 뜻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모든 보관증을 무효라고 발표하지 않겠습니다. 법원에는 분쟁 대상 문서만 집행 정지하도록 요청하죠.”
에리카가 내가 만든 표를 왕에게 올렸다. 첫째, 공동 관리단 장갑의 직책 개념. 둘째, 인계증 개인 성명란의 훼손. 셋째, 아직 돌아오지 않은 물건. 셋은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어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국왕은 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왕관은 어디에 들어가나?”
“현재로선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다행이군.”
“왕관을 넣으려면 먼저 소유권부터 증명해야 하니까요.”
“조금도 다행이 아니군.”
인계증을 감정하는 동안 나는 왕실 문서의 복사 관행을 확인했다. 보존고에서는 이름이 적힌 원본을 꺼낼 때마다 복사한 날짜와 목적을 기록했는데, 삼 년 전 화재 조사가 중단된 뒤에도 ‘장갑’ 관련 문서의 복사가 여러 번 이뤄졌다. 대부분은 적법한 소송 대응이었지만, 한 번은 신청 부서가 빈칸이었다.
“신청 부서가 없으면 무단 복사인가요?” 루카스가 물었다.
“그럴 수 있지만 기록 누락일 수도 있지. 그때 누구 근무였는지부터 확인하자.”
오렐이 근무표를 확인해 줬다. 해당 날의 담당자는 병으로 쉬었다. 대신 대리 근무자가 있었다. 그 대리 근무자는 이미 은퇴해서 왕도 밖에서 살고 있었다.
“저분을 증인으로 부르면 되겠군요.”
“우선 복사기 사용대장과 실제 종이 수량이 맞는지 확인하자. 사람을 불러놓고 ‘당신이 범인이냐’고 묻는 건 수사라고 보기 어려워.”
인쇄된 종이는 세 장이었는데 장부에는 두 장으로 적혀 있었다. 인쇄기 옆에 사용한 잉크를 닦는 헝겊이 없어진 사실도 확인됐다. 빠진 한 장이 위조문서의 재료였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보존고의 폐지 수거 기록에는 같은 날 문서 한 장을 잘못 찍어 버렸다는 표시도 있었다. 나는 두 가능성을 모두 적었다.
“징수관님, 가능성만 잔뜩 적으면 보고서가 끝나지 않아요.” 루카스가 투덜댔다.
“끝내려고 사건을 바꾸면 더 큰 일이 생겨. 대신 다음에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을 같이 쓰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락된 문서의 폐기 확인 서명을 요청하는 공문을 만들었다. 한 해 전의 나라면 수첩에 '일치'라고 크게 써놓고 누군가의 이름 옆에 동그라미를 쳤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동그라미보다 빈칸이 많았다. 그게 정확하다는 게 조금 속상했다.
그날 또 다른 사람이 재무청에 찾아왔다. 삼 년 전 화재 현장의 청소를 맡았던 노인이었다. 그는 신문에 나온 제12석 이름 때문에 자기가 의심받을까 걱정했다고 했다. 오래전 현장에서 장갑을 끼고 일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장갑 관리자로 몰릴 수 있었다.
“당신이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말만으로 법적 관리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내가 설명했다.
“그럼 무슨 증거가 있어야 하죠?”
“지명 기록, 실제 인계 기록, 당시 해당 업무를 할 권한. 가능한 한 서로 독립된 자료가 필요합니다.”
노인은 안도하며 앉았다. 잠시 후 가방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더니 말했다. “이건 그냥 닦는 걸레요. 하지만 그때 사람들이 장갑을 바꿔 끼고 일한 건 기억합니다. 장갑이 모자라서.”
그 말을 기록하자 ‘한 장갑의 착용자’와 ‘한 장갑 번호의 권한자’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커졌다. 정확한 표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노인의 증언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그가 기억하는 당시 작업 순서를 따로 받아 적었다.
나디아는 북쪽 교역소에서 보내온 식량 가격표를 보여 줬다. 오래된 공동보관 분쟁이 다시 화제가 되면서 상인들이 운송 위험료를 올리고 있었다. 실제 화물 지연은 일부에 불과한데 소문이 가격을 밀어 올린 것이다. 재무청이 바꿀 수 없는 시장 가격을 명령으로 낮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상 인수증의 효력이 유지된다는 공식 설명과 검문소의 실제 처리량을 공개하면 불필요한 공포는 줄일 수 있었다.
“판결 하나가 빵값을 올리기도 하는군요.” 루카스가 말했다.
“그래서 법정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하면 안 돼. 법정 밖에서 누가 밥을 못 먹는지도 봐야지.”
에리카는 내 말에 조용히 수긍했다. 그녀가 부친 일기를 제출할지 고민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는 일은 그 진실 때문에 다칠 사람까지 살펴야 하는 일이었다.
오렐은 잘린 종이 옆에 오래된 왁스 봉인도 가져왔다. 왁스에는 공동 관리단 문장이 있었지만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같은 도장이 연달아 찍혀서 생긴 흔적일 수도 있고, 후대에 본뜬 도장일 수도 있었다. 나는 문장만 보고 진본이라고 적지 않았다.
“보존고에서는 원본이 가장 높이 평가받나요?” 루카스가 물었다.
“원본이라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가 중요하지. 가짜 계약의 원본도 결국 가짜 계약이니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웃었다. “그런데 왜 원본을 찾는 겁니까?”
“복사본보다 확인할 흔적이 많이 남아서. 종이 재질, 잉크, 잘린 단면, 보관 이력까지.”
나는 수첩에 기록했다. '원본'이라는 단어는 진실이라는 뜻이 아니라 확인해야 할 물건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내가 한국에서 믿었던 원칙은 여기서도 쓸모가 있었다.
마침 루카스의 어머니가 약을 받으러 왔다. 그는 보존고의 차가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약값 영수증을 보여 줬다. 밀린 월급 때문에 어머니의 약을 살 수 없었던 시절이 끝났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가 다시 앉을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가의 기록은 숫자지만 숫자 뒤에는 늘 그렇게 작은 생활이 있었다.
그날 점심에는 구호소에서 가져온 보리 수프가 나왔다. 루카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었다. “징수관님. 보관권한은 왜 그렇게 오래 남을 수 있죠? 물건을 안 돌려주면 권한을 빼앗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누구의 권한인지, 언제까지 맡겼는지, 반환 기한이 실제로 있었는지부터 알아야 해.”
“그럼 세금처럼 납부 고지서를 보내면 안 됩니까?”
“물건 반환은 세금이 아니지. 국가가 마음대로 거두면 오히려 도둑이 될 수도 있어.”
그때 루카스가 오래된 인수증의 뒷면을 가리켰다. 작은 칸이 세 개였다. 보관 시작, 점검, 반환. 시작과 점검에는 획이 있는데 반환칸에는 잉크가 말라붙은 흔적만 있었다.
“여기 도장 하나가 없는 게 문제 아닐까요?”
“문제는 도장이 없다는 사실보다, 도장이 찍혀야 할 날이 지났는지겠지.”
우리는 왕실의 공식 기록부터 뒤졌다. 삼 년 전 군무청 곡물창고 화재 이후, 공동 관리단은 ‘보관물 두 상자’를 북쪽 초소로 옮겼다. 하나는 보세창고에 입고됐다. 다른 하나에는 ‘증인 출석 확인 후 반환’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증인에게 출석을 요구한 서류에는 서명자가 없었다.
나는 숫자 두 개를 나란히 썼다.
반출: 두 상자.
확인된 입고: 한 상자.
“빠진 하나가 반드시 영번 기록봉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에리카가 말했다.
“그렇죠. 그 물건은 이미 다른 봉인 아래 보관됐을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물품일 수도 있어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 부친의 이름을 꺼냈다. “아버지는 화재 조사 당시 ‘장갑을 끼고 종이를 만지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그게 사람의 이름인 줄은 몰랐어요.”
“그 지시가 적힌 원본이 남아 있습니까?”
“일기에는 있습니다. 법원에 제출할지 고민 중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부친이 남긴 사적인 글을 공무 기록인 양 가져올 수는 없었다. 제출 범위도 에리카가 결정해야 했다.
저녁 무렵, 세르나가 보낸 짧은 답신이 도착했다. 마계의 옛 협약에는 ‘장갑’이 개인 이름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보관물을 만지는 손을 가리키는 직무 표식이라는 주석이 있었다. 그러나 마계 사본만으로 왕국 문서의 진정성을 보증할 수 없다는 단서도 붙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고 웃었다. “마왕 측 감사관도 결국 같은 말을 하는군요. 증명하지 못하면 장부에 확정으로 적지 말라고.”
루카스가 말했다. “그럼 지금은 무엇을 회수할 수 있습니까?”
“일단 오늘의 답답함?”
“그건 어디에 보관합니까?”
“우리 부서엔 자리가 없네.”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렐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인계증 아래 두었던 받침 종이를 정리하던 티르센이 예상하지 못한 두 번째 칼자국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잘린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반환 기한을 적는 칸의 마지막 숫자도 같은 폭으로 도려내져 있었다.
나는 훼손된 두 자리를 보았다. 누군가가 보관자를 숨기려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보관이 끝났어야 하는지도 지우려 한 셈이었다. 날짜를 찾는 순간 권한의 주인이 바뀔지도 몰랐다.
나는 등불 아래에서 종이를 덮었다.
“이제부터는 사람 이름보다 먼저 기한부터 찾죠.”
제10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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