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의 첫 번째 날짜는 끝내 '이세계 입국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인했을 때 나는 허탈한 웃음부터 나왔다. 지난 열흘 동안 왕궁에서부터 북문 제방까지 뛰어다니며 찾은 답은 놀랍도록 평범했다. 날짜로 보였던 압흔은 왕궁 인쇄실의 보관 지점 번호와 첫 사용 확인란이 겹친 흔적이었다. 사람들이 신비한 소환 기록이라고 불렀던 문서는 적어도 그 부분에 관해서는 최근 만들어진 업무용 전사본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이 모든 비밀을 풀어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왜 이 세계에서 눈을 떴는지, 진실의 장부가 왜 내 기억을 요구하는지, 삼 년 전 화재와 누가 만든 영번 장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래서 첫 줄에 '확인된 사실'이라고 적고, 다음 줄에는 '아직 모르는 사실'이라고 적었다.
브란트 법관은 최종 감정 결과를 공개하되 내 수첩의 사적 내용은 봉인하도록 했다. 티르센은 원본 수첩 첫 장의 일부 필압이 왕국에서 제조된 종이에 남아 있다는 사실과 최근 제작된 영번 전사본의 활자 압흔을 분리해 설명했다. 수첩이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 존재했는지 여부는 입증되지 않았고, 전사본의 특정 문구가 내 개인 기록에서 직접 복사됐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검증자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까?” 모브가 물었다.
“이 사건에서 그 권한을 입증할 자료가 제출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법관이 답했다. “없는 권한을 있다고 추정해 타인의 출석이나 서명을 강제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조금 가벼워졌다. 왕위 담보라는 허무맹랑한 계약에서 시작된 일이 결국 같은 질문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누가 누구의 권리를 대신 행사할 수 있는가. 조세권도, 장부도, 사람의 기억도, 서명 하나로 마음대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법원은 영번 전사본을 이용한 새 대리 승인 집행을 임시 중단하고, 관련 인쇄판의 보전과 사용 대장 제출을 명령했다. 모브는 불복할 수 있었고, 그의 실제 계약상 권리도 별도 심리 중이었다. 나는 그 결정문을 과장해서 승리 선언으로 만들지 않았다. 왕국의 세입은 그날 갑자기 늘지 않았고 피해자들의 돈도 저절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이렌의 임금에 관한 다툼 없는 부분은 지급 결정 단계로 넘어갔다. 나는 아델에게서 확인서를 받아 그의 보호기관으로 보냈다. 아직 돈이 실제로 지급됐다고 쓰지 않았다. 마이렌이 바라는 것은 숫자가 적힌 결정문뿐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있는 돈이었다. 그 차이를 잊지 않으려고 했다.
오딜은 구호소에 모인 유족들에게 오늘 결정의 의미를 설명했다. “손도장을 찍었다고 누군가 대신 돈을 가져갈 수는 없대요. 사망 보상금 은화 마흔 닢도 아직 실제 지급된 것이 확인되지 않았답니다.”
나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판결문을 생활 속의 문장으로 바꾸는 사람은 늘 오딜이었다. 내가 왕국을 구할 수 있다면 그녀 같은 사람들에게 빚을 질 것이다.
나는 왕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북문 구호소에 잠시 들렀다. 오딜은 아이들이 쓴 작은 글씨들을 벽에 붙여 놓았다. 어떤 아이는 '돈을 내면 영수증을 받는다'고 썼고, 어떤 아이는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쓰려면 물어본다'고 썼다. 글자 크기도 제각각이고 맞춤법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수십 장의 공문에 담으려던 뜻이 그 짧은 문장에 있었다.
“아이들에게 세금을 가르치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세금보다 먼저 자기 이름을 지키는 법을 가르쳐요.” 오딜이 답했다. “나중에 커서 누가 서명하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물어보게요.”
나는 아이들이 쓴 종이를 한참 바라봤다. 한국에서 세무조사관을 할 때는 탈세를 적발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줄 알았다. 이 왕국에서는 누군가의 정당한 소득을 지키는 일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국고에 들어오는 돈이 늘어도 사람들의 손에서 이유 없이 빠져나가는 돈이 더 많다면 왕국이 살아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딜은 마이렌이 보낸 짧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아직 지급금을 받지 못했고 자신의 새 삶을 공개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기록에서 '죽은 자'라는 말이 줄어든 것이 조금 안심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답장을 써 달라고 했다. '당신이 겪은 일을 국가가 제대로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인정된 임금이 실제로 지급되는지 끝까지 확인하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비가 그쳐 있었다. 젖은 돌바닥 위로 저녁 햇빛이 비쳤다. 수첩의 첫 날짜가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처음으로 조금은 생각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적은 날짜들 역시 누군가의 삶에 실제로 남았으니까.
판결문이 나온 날 북문 시장에는 비가 내렸다. 물이 새는 천막 아래서 상인들은 물건을 옮기느라 바빴다. 나는 재무청 직원들과 함께 합법적인 세금 수납 창구가 정상 운영되는지 확인했다.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문서 조작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평범한 시민들의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았다. 잘못된 서식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적인 서류를 제때 처리하는 것도 국가의 의무였다.
곡물 상인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오늘은 검은 깃털 표를 안 보여 줘도 됩니까?”
“그 표는 정식 통관에 필요한 서류가 아닙니다. 영수증과 화물 확인서가 있으면 됩니다.”
“그럼 지난주에 산 표 값은 누가 돌려줍니까?”
“발행자와 실제 수납자를 확인한 뒤 별도 피해 회복 절차를 안내하겠습니다. 세금 환급과 사적 사기 피해금은 같은 계정이 아니거든요.”
상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국이 덜 망할 것 같긴 한데, 제 지갑은 아직 망했소.”
나는 그 말에 웃지 못했다. 그의 지갑에 들어갈 돈을 당장 마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허위로 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은 만들어야 했다.
시장 끝에서는 메라가 따뜻한 죽을 나눠 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국자를 받을 때마다 그녀는 인원을 기록했다. 예전의 급식실에서는 식사 인원과 근무 일수를 같은 칸에 적기도 했지만 이제는 두 장부를 따로 쓰고 있었다. 메라는 이 작은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밥을 먹었다고 일한 건 아니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반대로 밥을 못 먹었다고 안 일한 것도 아니고요.”
“맞습니다. 장부가 그렇게 적혀 있어야죠.”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징수관님이 꼭 밥은 먹고 다니셔야 해요. 식사 기록을 남겨 두고 일 안 한 사람으로 처리해 버릴 테니까.”
나는 그녀가 건넨 죽을 받아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 야근하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먹던 음식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음식의 맛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잠시 불안해졌다. 진실의 장부를 쓰지 않은 날에도 기억은 흐릿할 수 있었다. 그게 자연스럽게 잊는 과정인지, 이전 대가의 여파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두려움을 없애 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잘못된 설명을 붙이지는 않게 해 줬다.
오후에는 에리카와 북문 창구의 새 분류표를 점검했다. 표에는 '국가 세입', '피해자 보관금', '지급 승인', '실제 지급 확인', '소유권 미확정 봉인금'이 따로 나뉘어 있었다. 처음에는 열일곱 금화라는 숫자 하나에 매달렸지만 지금은 숫자를 담는 그릇부터 구분할 줄 알았다.
“방벽 유지료는요?” 에리카가 물었다.
“승인 720금화, 출금 증빙 480금화. 그 가운데 옛 조폐소에 실물 봉인된 건 260금화이고, 나머지 등록비용 140과 운송대기 80의 지급처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죠. 승인 대비 240금화도 별도 조사 중입니다.”
“마계에는?”
“세르나의 대조 사본상 그 기간 입금은 0금화. 마계 원본 감정은 계속 필요하고요.”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판결이 그 돈을 전부 되돌려 주지는 못하겠네요.”
“그렇죠. 그래도 누군가 그 돈을 자기 것이라고 먼저 가져가는 건 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책상에 앉아 새로운 피해 신고서를 검토했다. 어떤 시민은 북문에서 은화 네 닢이 봉인됐다는 소문만 듣고 자기 돈도 그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에리카는 신청인을 탓하지 않고 실제 납부 시점과 영수증 번호를 물었다.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도 자기 돈이 어느 계정에 있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었다.
저녁에는 카르디온의 사절 로흐가 찾아왔다. 드워프 신탁 보관물 반환 절차가 느려져 불만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신탁 재산을 용의 개인 재산으로 잘못 처리하지 않겠다는 기존 결정을 다시 설명했다. 로흐는 국왕에게 직접 불평하러 갈 생각이었다가 내 설명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용이 돈을 내고, 마왕이 영수증을 받고, 인간 징수관은 돌려줄 물건의 주인부터 찾는다니.”
“신기합니까?”
“아주 피곤한 세상이군. 그래도 옛날보다 덜 나쁘오.”
나는 로흐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을 구한다는 말보다 덜 나쁘게 만든다는 말이 지금은 더 정확했다. 완벽한 진실을 찾지 못해도 오늘 누구 하나 억울한 서류에 끌려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내가 이 왕국에 온 의미가 전부 설명되지 않아도 할 일은 남아 있었다.
국왕은 저녁에 나를 불렀다. 긴 식탁에는 금으로 장식한 촛대 대신 낡은 구리 접시가 놓여 있었다. 로웬이 왕실 지출을 아끼겠다고 바꿔 놓은 물건이었다.
“자네는 수첩 때문에 큰일을 겪었구나.” 왕이 말했다.
“제가 국가의 수첩을 훔쳐 온 건 아니니까 다행이죠.”
국왕은 웃었다. “그래도 내 나라의 문서가 자네를 억울하게 만들 뻔했소.”
“문서가 아니라 문서를 이용한 사람이겠죠. 아직 누구인지 모르지만요.”
왕은 접시 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왕관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국민들의 서명까지 지켜야 하는군.”
“왕관보다 어렵습니다. 국민의 서명은 숫자가 훨씬 많으니까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한 번 더 국가의 장부를 정리해 주게. 다만 제발 다음에는 드래곤에게서 세금을 받아 오면 좋겠어.”
“드래곤은 이미 정당한 거래세를 냈습니다. 같은 거래에 또 세금 고지서를 보내시면 왕실 신용이 무너집니다.”
로웬이 뒤에서 헛기침했다. 국왕이 고개를 젓다가 웃었다. “나보다 용을 더 보호하는 징수관이라니.”
나는 말했다. “용이 아니라 영수증을 보호하는 겁니다.”
그날 밤 세르나에게서 편지가 왔다. 마왕 아자르켄은 이번 판결을 보고 흥미로운 질문을 보냈다. '인간의 왕실은 물건을 보관하는 책임과 사람을 대신 승인하는 권한을 구별하기 시작했는가?' 나는 답장에 '아직 배우는 중'이라고 썼다.
편지를 접으려는 순간 또 다른 문서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모브가 보낸 것도 왕실이 만든 것도 아니었다. 공동 보관 당사자의 참관 아래 열었던 영번 기록봉의 금속 받침 안쪽에서 확인한 훼손된 표식에 관한 최종 판독서였다.
로흐와 세르나의 공동 서명이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이 어떤 문구를 번역했는지 읽었다.
'최초 인계 책임자는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다. 증인의 부재는 물건의 반환 조건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미 법정에서 주장했던 내용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아래 작은 문장이 하나 더 있었다.
'원본을 가져간 자가 반환 기한을 넘긴 경우, 물건이 아닌 **보관권한 자체**를 회수한다.'
“이게 무슨 뜻이죠?” 내가 물었다.
로흐는 답장에 주의 문구를 덧붙였다. 그 조항이 지금도 효력이 있는지, 어느 기관에 적용되는지는 별도 검증이 필요했다. 다만 유효하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찾던 미반환 상자는 단순한 장치가 아닐 수도 있었다. 누군가 그 상자를 이유로 사람의 출석을 요구하고, 보관권한을 계속 연장해 온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사건 장부를 다시 열었다. 북문 초소의 미반환 번호, 제12석 임시 관리 표식, 화재 뒤 기증된 빈 표지 열두 장, 최근 중복 주문된 받침. 서로 다른 줄에 있던 사실들이 같은 질문을 향했다. '누가 물건을 돌려주지 않으면서 관리 권한을 놓지 않았는가.'
오렐이 문을 두드렸다. “징수관님, 방금 왕실 보존고에 옛 인계증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표지에 서명자가 없습니다.”
“또 서명 없는 문서입니까?”
“이번에는 다릅니다. 서명란이 원래부터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이름을 적은 종이 조각만 칼로 잘려 나갔습니다.”
그는 봉인을 열지 않은 채 문서를 보여 주었다. 잘린 자국 아래 남은 문장이 있었다.
'최초 인계 책임자: 공동 관리단 장갑.'
나는 오래전에 셀딘 모로에게 금화 백 닢을 제시했다는 장갑 낀 남자를 떠올렸다. 그와 이 직책이 같은 사람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의 장갑이었는지를 묻기 전에, 그 장갑이라는 직책이 언제 끝났어야 했는지를 조사할 수는 있었다.
나는 오늘의 마지막 기록을 적었다.
'첫 번째 날짜는 찾았다. 누군가가 지우려 했던 것은 첫 번째 날짜가 아니라 마지막 반환일일지도 모른다.'
제10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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