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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94화
PAYLUA ORIGINAL · 제94화

94화. 경고는 지워지지 않았다

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3,729자

오프라인 책장
토요일 오전, 오선영이 내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정식 면담이 아니었다. 그녀는 출입 기록을 남기고 앉자마자 커피를 거절했다. 대신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공개 가능한 부분만 남긴 시스템 처리 절차 안내였다. “너 어제 ‘삭제’라는 말을 썼지.” “익명 메일 제목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 제목이 문제야. 경고문은 삭제된 게 아니야.” “참고로 내려갔다면서요.” “그렇지. 경고 텍스트는 남았고, 그걸 적용하는 권한만 바뀌었어.” 나는 종이를 읽었다. ‘미교부 책임 이관 금지’는 원래 시스템이 후속 정산 승인을 멈추게 하는 차단 규칙이었다. ‘참고’는 같은 문장을 화면에 표시하지만 승인 절차는 막지 않는 수준이다. 이 차이는 눈에 보이는 문구보다 컸다. 작업자는 똑같은 경고를 읽고도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된다. “경고가 있었던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도 무시할 수 있게 만든 거군요.” “가능한 구조는 그래. 누가 왜 그 수준을 바꿨는지는 별개야.” “누군가는 경고를 지우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실제로 지운 건 아니니까. 하지만 멈춰야 하는 일을 통과하게 했다면 그 결정에는 설명이 필요하지.” 나는 문서의 아래쪽을 봤다. 2025년 8월 25일 오전 9시 43분. ‘검토 대기’가 ‘참고 표시’로 변한 처리 이력. 우리는 오래전 날짜의 세 글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그 순간 전화가 울렸다. 박혜림이었다. “서 조사관님. 저 면접 본 회사에서 서류를 다시 요청했어요.” “어떤 서류입니까?” “제가 수신한 적 없는 문서의 정정본이요. 이전 회사가 내부적으로는 고쳤는데, 외부로 보내려면 제가 개인정보 제공에 동의해야 한대요.” “동의서가 어떤 목적의 것인지 확인하셨습니까?” “네. 이번에는 잘 읽었어요. 그런데 동의서에 다른 문구가 섞여 있어요. ‘과거 분쟁 종결 확인’이라는 부분이요.” 나는 오선영과 눈을 마주쳤다. “지금 바로 서명하지 마십시오. 동의서의 범위를 분리해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또 시간이 걸리겠죠.” “그럴 겁니다.” 그녀는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제 이름으로 합의를 했다고 또 나올 테니까.” 통화를 마치자 선영이 말했다. “너 이제 사건을 되게 싫어하겠다.” “사람보다 문서가 먼저 믿어지는 게 싫습니다.” “문서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데, 문서만 믿어도 안 돼.” 우리는 그 말을 잠시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오선영은 한유리 기자가 발견한 게시물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김주하의 이름과 9시 41분 화면이 같이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게시물 삭제 요청을 검토하고 있지만 그 요청 자체가 마치 중요한 증거를 숨기는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고 했다. 제대로 반박하려면 화면의 원본성이 먼저 확인돼야 했다. “김주하 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출력실 업체에서 일하는 분이잖아. 거래처 하나가 계약을 보류했대.” 나는 말문을 닫았다. 피해는 빠르고 정정은 느렸다. 선영이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김주하가 2025년 8월 22일 복구 작업을 확인했다는 기록은 있어. 그런데 지금 돌아다니는 글은 그걸 8월 25일 경고 수준 변경으로 옮겨놓았어.” “서로 다른 날인데.” “맞아. 날짜만 제대로 읽어도 분리할 수 있어. 그런데 아무도 자세히 안 봐.” “누군가는 자세히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죠.” 오선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도 아직 가설이야.” 나는 웃었다. 그녀와 있으면 억울한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만으로도 섣불리 사람을 가리킬 수 없게 된다. 오후 두 시, 최명환 측 변호인에게서 내게 정식 문의가 왔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관한 과거 면담 기록 중 최명환을 특정하는 자료가 있다면 존재 여부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수사팀에 연락하고 법률 자문을 구하겠다고 답했다. 당사자 권리 보호를 위한 정상적인 요청일 수도 있고, 어떤 자료가 남아 있는지 미리 파악하려는 시도일 수도 있었다. 추측만으로 답할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흥미로운 건 공문 맨 아래였다. 회사 측은 2025년 당시 ‘경고 수준 변경이 관리자 승인 없이 자동 수행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뜻과 실제로 그랬다는 뜻을 구별해야 했다. 그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죄를 묻는 건 성급했다. 나는 선영에게 공문을 전달하면서 한 줄을 덧붙였다. ‘오류였다면 동일한 오류가 발생한 다른 문서도 있을 것입니다.’ 그녀의 답장은 빨랐다. ‘그걸 확인 중. 다만 동일한 오류가 없다고 곧 고의로 확정되는 것도 아님.’ 정확한 답이었다. 오후 네 시에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회사 직원 하나가 익명 게시물에 달린 김주하의 반박 댓글을 캡처해 내부 공유방에 올렸다. 선의로 오해를 바로잡으려던 행동이었지만, 캡처에는 주하의 개인 전화번호 끝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날부터 낯선 연락이 더 늘었다고 한다. 오선영은 회사에 게시물 삭제와 추가 유포 중단을 요청하도록 안내했다. 나는 주하에게 직접 사과하는 말부터 꺼냈다. 캡처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피해를 줄이려는 선의가 또 다른 노출을 낳은 셈이었다. “이제는 이름을 빼고 알려주세요.” 주하가 말했다. 요구는 너무도 정당했다. 저녁 무렵 임소율은 공문 하나를 받았다. 회사가 그녀의 신고를 ‘철회’로 표시한 것은 부정확하다고 정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난번에 발송한 안내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문서의 원문을 사진으로 보내지 않았다. 대신 정정 담당자의 연락처와 접수번호만 알려줬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진행할게요. 서 조사관님이 모든 걸 대신해주면 또 저를 빼놓고 확인했다는 말이 생기잖아요.” 나는 그 말이 반가웠다. 내가 없더라도 문서를 바로잡는 길이 있어야 한다. 개인 조사관 한 명이 계속 옆에 서 있어야만 작동하는 절차는 제대로 된 절차가 아니다. 밤 여덟 시, 오선영의 전화가 왔다. “배정우 쪽에 새 기록이 확인됐어. 그날 저녁 차량 위치를 더 좁혀볼 수 있을 것 같아.” “11월 3일 말입니까?” “응. 다만 아직 운전자가 누구인지는 몰라.” 내 마음은 문서에서 갑자기 시신이 발견된 집으로 옮겨갔다.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을 지나치게 오래 숫자와 표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살아서 누구를 만나러 갔는지, 죽기 전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했는지는 아직 흐릿했다. “선배. 경고 수준을 누가 낮췄는지와 배정우의 죽음이 반드시 같은 사건일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서 따로 수사해.” 그녀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배정우가 죽기 전날 작성했다는 메모 하나가 나왔어. 원문은 아직 감정 중이고, 내용도 짧아.”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내가 부탁한 건 확인이 아니었다.’” 나는 의자를 세웠다. 그 문장은 변명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를 협박한 사람이 남긴 자기방어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업무에 관한 메모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을 배정우의 목소리로 읽어보았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서명이나 확인을 부탁했다고 한다면, 배정우는 정확히 무엇을 거절한 것일까. 선영은 덧붙였다. “한 가지 더 있어. 메모에 적힌 ‘부탁’이라는 단어가 처음에는 ‘경고’였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다고 해. 진본 감정 끝나기 전까지 의미 붙이지 마.”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메모장에 두 문장을 적었다. ‘경고를 참고로 낮춘 사람.’ ‘확인을 부탁받았다고 주장한 죽은 사람.’ 둘 사이에는 아직 연결선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나는 그 선을 억지로 그리지 않고도 다음 날을 기다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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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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