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누가 버튼을 눌렀는지 알아내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정민규 순경은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버튼이 없었답니다.”
나는 펜을 들었다. “무슨 뜻입니까?”
“문구를 ‘참고’로 내린 기록 있잖습니까. 관리자가 화면에서 경고를 클릭해서 바꾼 것으로 봤는데, 그 화면은 실행 결과를 보여주는 대시보드였습니다. 처리 자체는 별도의 일괄 작업에서 이뤄졌을 수 있대요.”
2027년 1월 22일 금요일. 나는 오후에 원효로 근처에서 오래된 인쇄업체 관계자를 만날 예정이었다. 경찰이 정식으로 확보한 자료를 건드리려는 게 아니라, 2025년 당시 인쇄 견적을 받은 의뢰 기록이 내 사무실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민규의 전화가 내 일정을 멈춰 세웠다.
“그러면 9시 43분의 승인 경로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작업이 지나간 단계군요.”
“네. 최명환 실장님이 직접 눌렀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 실제로 바꿨는지는요?”
“모릅니다. 요청을 올린 사람, 설정을 승인한 사람, 새 값을 적용한 프로그램이 따로입니다.”
민규는 잠깐 말을 멈췄다.
“선배님. 이런 말 하면 웃기겠지만요. 저는 처음에는 이름 하나만 찾으면 될 줄 알았습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는 임소율의 번호를 찾다가 수사 사실을 회사에 알렸고, 확인이 덜 된 화면을 회신에 첨부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그 잘못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그가 말하는 건 자기가 놓친 곳에서 배우고 있다는 뜻이었다.
“여러 사람의 행동이 이어졌을수록, 누구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를 더 정확하게 나눠야 합니다.”
“그게 어렵네요.”
“저도 어렵습니다.”
그는 내게 공식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설명하고 통화를 끊었다.
정오쯤 오선영이 회사가 제출한 업무 흐름도를 보여줬다. 대화 중 화면에 잠깐 표시된 내용만으로도 구조가 보였다. ‘경고 수준’ 필드는 정산관리실에서 검토하고, 온새문서지원의 배치 프로그램이 문구를 최종 반영했다. 검토가 끝나지 않은 항목은 ‘보류’로 남아야 했지만, 예외 처리 대상에는 별도 승인 규칙이 있었다.
“이걸 고쳐서 누가 이익을 얻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바로 그걸 찾고 있어. 비용 귀속 정산이 누구에게 넘어갔는지, 어떤 결재가 이어졌는지부터 봐야지.”
“기술 로그에 작업자 이름이 없습니까?”
“계정 이름은 있어. 하지만 공유한 계정이야.”
그 말은 이미 여러 번 들었다. 윤세한 계정, 관리자 공용 PC, 공용 접수함. 모두 이름은 선명하고 실제 사람은 흐릿했다. 허술한 시스템에서는 범인이 흔적을 지우지 않아도 된다. 원래 흔적이 사람 하나를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후 두 시 나는 인쇄업체에 도착했다. 낡은 복합기가 놓인 사무실에서 직원은 오래된 계약 대장을 펼쳤다. 내 예전 보험사 의뢰와 관련된 인쇄 문의 한 건이 남아 있었다. 해당 날짜에 업체가 실제 출력까지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견적 문의와 실물 출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때 보류 처리표를 한 장만 찍었다고 하셨죠?”
“저는 그렇게 기억하는데, 제가 전부 출력한 건 아니라서요.”
직원은 말했다.
“기계가 한 번 걸려서 두 번째로 보낸 적은 있어요. 그런데 요즘 누가 그 일만 물어보더라고요.”
“누가요?”
“전화로요. 이름은 몰라요. 첫 번째 인쇄물을 누가 가져갔는지 자꾸 묻더라고요.”
나는 질문을 멈췄다. 기억을 유도하면 안 됐다. 그 직원이 실제로 두 장을 기억하는 건지, 최근 질문을 들으면서 기억이 바뀐 건지 구별해야 했다.
“그런 문의가 있었던 날짜를 남겨두셨습니까?”
“휴대전화에 기록은 있겠죠.”
“그 기록은 경찰에게 정식으로 제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첩에 ‘최근 전화로 반복 질문’이라고만 썼다. 누군가 목격자의 기억을 앞질러 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임소율에게 전화가 왔다.
“정산팀 선배가 부탁했다면서 어떤 사람이 제게 연락했어요. 2025년에 신고를 철회한 게 맞으면 다시 확인해 달래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안 했어요. 지난번에 당신이 말했던 대로 공식 서류부터 요청했죠.”
“잘하셨습니다.”
“처음으로 잘했다고 하시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에는 웃음이 없었다.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제가 확인하지 않으면 회사가 제 잘못을 정정할 수 없다고요.”
나는 길가에 멈춰 섰다. 상대는 임소율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자기 이름으로 철회했다고 적힌 기록을 바로잡는 것. 그 소망을 이용해 새 확인을 받아내려는 시도일 수 있었다.
“상대의 소속과 문서 제목을 기억합니까?”
“본인은 외주 정산 담당자라고 했는데, 이름을 두 번 물어봐도 대답을 피했어요.”
“그럼 연락 온 사실만 보존해 주세요. 추가 확인은 공식 담당자를 통해서 하십시오.”
통화를 끝낸 나는 오선영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선영은 임소율에게 독립된 정정 창구를 안내하고 있다고 했다. 상대에게 직접 맞서라고 권하는 것보다, 피해자가 접촉을 거절해도 정정 절차가 중단되지 않도록 만드는 게 먼저였다.
오후 네 시, 나는 인쇄업체 직원에게 받은 방문 확인증을 보며 그날의 내 질문을 다시 검토했다. ‘두 장이었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대신 ‘출력 작업이 어떻게 진행됐습니까’라고 물었다.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두 장이라는 가설을 먼저 제시하면 상대가 자신의 기억을 그 틀에 맞출 수 있다. 노트에는 직원이 스스로 말한 ‘기계가 한 번 걸렸다’는 표현을 그대로 남겼다. 수사팀이 확인할 전화기록의 시각 역시 내가 임의로 추측하지 않았다. 말로는 원칙을 지키기 쉬웠지만, 그 원칙이 실제 기록에 남아야 했다.
저녁 여섯 시, 한유리가 전화를 했다.
“어제 제가 기사에 넣지 않은 이름이 다른 커뮤니티에 올라왔어요.”
“박혜림 씨입니까?”
“아뇨. 김주하 씨요. ‘경고를 삭제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요.”
나는 책상에 놓인 인쇄 작업 표를 바라봤다. 김주하는 출력실 복구 작업에 확인 표시를 한 사람이다. 아직 경고문의 작성자도, 삭제자도 아니었다.
“기사에 그 주장을 인용하지 말아 주세요.”
“그럴 생각 없어요. 대신 제가 발견한 문제는 알려드리려고요. 게시물에 올라온 사진 속 작업 시간이 실제 공개 자료보다 이른 시간이거든요.”
“얼마나요?”
“오전 9시 41분. 경고가 참고로 낮아졌다는 9시 43분보다 두 분 전이에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누군가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요?”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에 표시된 시간이 촬영 시각인지, 파일 생성 시각인지, 화면에 인쇄된 시간인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게시물 링크를 받아 원본 화면을 저장했다. 그리고 갑자기 깨달았다. 누군가 김주하를 범인으로 몰려 한다면, 그가 실제로 작성한 문서인지보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얼마나 빨리 퍼뜨리는지가 중요할 수 있었다.
밤 열 시가 넘자 정민규에게 메시지가 왔다.
‘공유계정 기록 중 9:43 건은 실제 작업 실행 ID와 다릅니다. 팀에서 별도 확보 중입니다. 성급하게 이름 지목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답장을 쓰려다가 지웠다. 수사관에게 박수를 보내는 건 내 역할이 아니었다. 대신 그가 저 말을 지키는지 봐야 했다.
그날 익명 메일은 오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침묵이 안심을 주지 않았다. 상대가 준비한 미끼가 우리에게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잠잠한 것인지, 더 어려운 미끼가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수첩 한 장 전체를 비워두었다. 제목만 적었다.
‘아직 누르지 않은 버튼.’
사람을 죽이는 손은 나중에 찾더라도, 누르지도 않은 버튼을 눌렀다고 만든 기록만큼은 지금부터 막아야 했다.
제9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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