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를 처음 보는 사람은 대개 이름부터 찾는다.
누가 작성했는지, 누가 결재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를 알아야 마음이 놓인다. 나는 그날 오전 반대로 시작했다. 이 종이가 다른 종이와 어떤 점에서 달라지는지부터 확인했다.
2027년 1월 20일 수요일. 오선영은 이경섭이 제출한 종이봉투의 감정 진행 상황을 전해주면서 먼저 선을 그었다.
“진본 판정 난 거 아니야. 원본처럼 생긴 사본이야. 거기에 찍힌 문자와 인쇄 흔적을 비교하고 있어.”
“경섭 씨가 갖고 있었던 이유는요?”
“2025년 인쇄물 보관 업무를 맡았고, 회수 대상에서 빠진 작업 사본을 따로 챙겼다고 해. 본인 설명이지, 검증된 사실은 아니고.”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어젯밤 익명 메일은 ‘미교부 책임 이관 금지’라는 경고가 오전 9시 43분에 ‘참고 문구’로 내려갔다고 주장했다. 보류 처리표의 열한 번째 칸. 8월 22일 열람 예정자 목록의 열한 번째 사람 박혜림과는 전혀 다른 서식이었다. 이 사소한 차이가 지난 두 달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의심하게 했는지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사본에 필기된 경고가 있죠.”
“‘확인되지 않은 보류는 비용 귀속의 근거로 쓰지 말 것.’ 그 문장 말하는 거지?”
“네. 컴퓨터가 인쇄한 글씨입니까?”
“아니. 연필이야. 그런데 누가 언제 적었는지 알아야 해.”
경고의 내용보다 그것이 문서 위에 놓인 시각이 중요했다. 9시 43분 이후에 쓴 메모라면 누군가 뒤늦게 문제를 알아챘을 수 있다. 그 전에 쓰였다면, 누군가는 경고를 본 뒤에도 처리 경로를 낮췄을 가능성이 생긴다. 단 두 경우를 구별하지 못하면 나는 다시 결과에 맞춰 사람의 마음을 지어낼 것이다.
오전 열한 시 이경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찰 조사가 끝난 뒤 그가 내게 연락해도 되는지 확인했다고 했다. 나는 수사 중인 실물 자료에 관해 내가 별도 조사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가 정작 꺼낸 것은 다른 말이었다.
“내가 그걸 들고 있는 동안, 내가 원본을 만든 사람처럼 돼버렸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합니까?”
“어제 익명 게시판에요. 보관자가 왜 이제야 나타나냐고. 돈 받고 숨겼다가 내놨다는 말도 있고.”
그는 한참 말을 멈췄다가 물었다.
“내가 자료를 바로 제출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까요?”
나는 대답을 고르는 데 시간을 썼다.
“그때 제출했더라면 일부 확인은 빨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나온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인이 자료를 가지고 있던 이유와 자료의 진본성은 별개니까요.”
“사람들이 그걸 나눠 생각하지 않아요.”
그의 말이 맞았다. 사람들은 복잡한 사건을 기다리지 않는다. 누구 이름 하나가 뜨는 순간 그 사람에게 이야기의 나머지를 덮어씌운다. 나도 배정우에게 그랬다. 익명 기록의 용의자 이름을 받아 적었고, 그는 나중에 죽은 채 발견됐다. 지금까지 내가 그 죽음을 막을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처음 읽은 종이가 내 질문을 결정한 것은 사실이었다.
점심 무렵, 오선영이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수사상 공개 가능한 범위로 가공된 검토 화면이었다. 같은 문서의 두 장에서 숫자 11의 위치가 조금 달랐다. 원본 후보 사본에는 칸 왼쪽 위에 숫자가 찍혀 있었고, 익명 메일 첨부본에는 칸의 중앙에 숫자가 정렬돼 있었다.
“확인된 차이입니까?”
“두 이미지가 달라. 하지만 같은 파일을 확대하거나 다른 프로그램으로 출력해도 정렬이 바뀔 수 있어. 그 차이만으로 위조라고 못 해.”
“그럼 비교할 원본은 어디 있습니까?”
“회사와 업체에서 확보할 예정이야. 제일 먼저 찾는 건 저장된 파일이 아니라 그날 인쇄 작업 번호야.”
나는 흥미를 느꼈다. 디지털 파일은 누군가 수정해도 파일명만 그대로 두기 쉽다. 인쇄 작업 번호도 절대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장비에 남아 있는 별도 로그와 맞춰보면 시간 순서를 좁힐 수 있다. 같은 글씨를 찍었다는 것과 같은 문서를 같은 시각에 찍었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오후 두 시, 화진모빌리티에서 보낸 공문을 읽었다. 회사는 해당 경고문이 실제로 업무 기준으로 적용됐는지 확인 중이며, 2025년 8월 당시 자료의 일부가 자동 보관 정책에 따라 삭제됐을 수 있다고 했다. ‘일부’, ‘가능성’, ‘확인 중’. 그런 말들은 진실을 신중히 다룰 때도 쓰이고, 책임을 밀어낼 때도 쓰인다. 어느 쪽인지 단어만으로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공문에 첨부된 검토 명단이었다. 박혜림 이름이 또 있었다. 회사는 8월 22일 수신 예정자 명단과 8월 25일 보류 처리표를 나란히 붙여 ‘11번 항목 관련자’라고 적었다. 내부에서 이미 서로 다른 열한 번째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회신 초안을 열었다. ‘서식이 다릅니다. 동일 항목으로 취급할 근거가 없습니다.’ 쓰고 나서 곧 지웠다. 나는 당사자의 대리인이 아니었다. 회신 권한 없이 회사에 직접 보내면 그들이 내 문장을 또 다른 협조 확인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대신 박혜림에게 명단의 문제를 알려주고, 본인이 원하면 법률지원 담당자와 함께 공식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자료의 차이만 정리했다.
“저 이름 때문에 또 떨어지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회사가 어떤 자료를 전달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년부터 전 자꾸 설명만 하고 있어요. 무슨 문서를 받지도 않았다는 설명, 서명하지 않았다는 설명, 그게 내 계정이 아니라는 설명.”
그녀의 목소리는 피곤했다. 잘못된 행 하나가 사람의 시간을 얼마나 오래 잡아먹는지, 그제야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오후 다섯 시 오선영이 다시 전화했다.
“재미있는 게 나왔어. 2025년 8월 25일 출력 작업 대기열에 문서 제목이 두 번 올라와.”
“같은 파일입니까?”
“파일 이름은 같아. 첫 작업은 오전 9시 37분, 두 번째는 9시 49분. 둘 중 하나는 취소 표시가 있어.”
나는 메모했다. 9시 37분. 9시 43분 경고 변경. 9시 49분.
“취소된 건 어느 쪽입니까?”
“아직 확인 중. 작업 번호와 로그를 대조해야지.”
그녀는 전화를 끊기 직전 한마디를 보탰다.
“진혁아.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원본과 수정본이 전후로 인쇄됐다고 생각하지?”
“네.”
“그럴듯하지만 아직 가설이야. 프린터 오류로 같은 파일을 두 번 보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웃었다. 정확히 그 함정에 걸릴 뻔했다.
그날 늦은 오후에는 김주하에게서 짧은 확인 요청이 왔다. 누군가 자기가 8월 25일 오전 9시 49분의 재인쇄를 지시했다고 적힌 게시물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는 8월 22일 출력실 복구 확인은 했지만, 사흘 뒤 재인쇄 건은 담당 업무가 달랐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곧바로 사실로 발표할 수 없었다. 다만 두 날짜를 하나로 뭉친 게시물은 이미 확인된 자료와 맞지 않았다. 주하는 목소리를 낮췄다. “제가 기억 못 한다는 말이 곧 제가 거짓말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나는 그의 기억을 믿는다고 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증 가능한 근무표와 당시 작업 배정표를 공식 절차로 제출해달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결백은 다른 사람의 선의를 믿는 것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밤 여덟 시, 익명 발신자에게서 짧은 문장이 왔다.
‘첫 번째 종이를 찾으셨군요. 누가 두 번째 종이를 찍었는지는 묻지 마세요.’
이전 같았으면 저 문장에 놀랐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게 읽혔다. 발신자는 경찰이 찾고 있는 출력 작업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누구라도 두 번 인쇄했다는 소식을 어딘가에서 듣고 추측할 수도 있었다. ‘묻지 말라’는 말에는 오히려 내가 그 질문을 하길 바라는 의도가 실려 있었다.
나는 메일을 저장하고 발송 시각만 표시했다. 답장은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오늘 발견한 두 작업 번호 아래에 다른 질문을 적었다.
‘첫 번째를 취소할 권한이 있던 사람과, 두 번째를 받은 사람은 같은가?’
누군가 종이 두 장을 만들었다면, 그중 한 장은 결코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은 종이를 누가 읽었는지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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