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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86화
PAYLUA ORIGINAL · 제86화

86화. 버튼 앞에 있던 사람

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3,650자

오프라인 책장
윤세한은 자신이 도망칠 이유가 없다고 했다. 1월 15일 금요일 오전, 오선영이 그와 다시 면담한 뒤 내게 전한 말이었다. 말을 전하기 전에 선영은 먼저 조건을 붙였다.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세부 진술은 외부에 공개할 수 없고,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서진혁과 직접 관련된 기록의 확인 결과뿐이라는 것이다. “2025년 8월 22일 오전 9시 16분. 그날 네가 처음부터 붙잡았던 시간이야.” “윤세한 계정이 완료 처리한 시각이죠.” “그때 윤세한은 업체 사무실에 있었다고 해. 그런데 본인이 정확히 어떤 작업을 했는지는 기억 못 한대.” “기억 못 한다는 말을 믿습니까?” “믿는다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접근 기록이랑 근무 기록을 비교하고 있어.” 세한이 계정을 공용으로 사용하게 한 건 관리자의 잘못이었다. 잠금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일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와 누가 그날 ‘완료’ 버튼을 눌렀는지는 아직 같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보다가 물었다. “연동 장애가 있었다는 보고는 언제 했답니까?” “9시 23분에 최초 접수한 흔적이 있어. 9시 12분부터 19분까지 문제를 겪었다고 썼어.” “그럼 완료를 누른 다음에 신고했겠군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신고하기 전에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야.” 말을 마치고 선영이 웃었다. “너 요즘은 내 말 끝나기도 전에 범인을 만들지 않아서 좋다.” “선배가 두 달 동안 교육했으니까요.” “교육비 청구해야겠다.” 짧은 농담이 지나갔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시간에 실제 서류를 받지 못했는데 받았다고 처리됐다. 그러고는 2025년 8월 25일에야 ‘완료는 전달이 아니다’라는 공지가 올라왔다. 사흘의 공백을 누가 어떻게 이용했는지가 중요했다. 그날 오후, 오선영이 보내준 일정표를 다시 정리했다. 세한의 장애 신고 시각. 김주하가 출력실의 복구 작업에 확인 표시를 한 9시 24분. 임소율의 신고가 접수된 9시 8분. 열한 번째 행이 만들어진 9시 11분. 그 시간들은 모두 2025년 8월 22일이었다. 반면 내게 어제 발생한 인수 확인은 2027년 1월 12일이었다. 두 사건은 서류의 상태를 사람의 행동으로 바꾸는 프로그램의 약점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증거는 아직 없었다. 나는 김주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가 경고문을 썼는지 묻는 대신, 당시 출력실에서 누가 마지막으로 원본을 가져갔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전화기를 집어 들다가 내려놓았다. 이미 이름이 공개돼 불편을 겪은 사람에게 새 질문을 늘리는 게 정당한지 자신이 없었다. 대신 오선영에게 물었다. “김주하 씨의 ‘복구 완료’ 표시가 ‘배포 완료’가 아니었다는 것까지 입증됐습니까?” “원본 업무표에서 그 구분은 확인했어. 다만 당시 누가 배포를 맡았는지는 아직 추가 확인 중이야.” “그렇다면 완료가 한 가지가 아니었다는 게 또 확인된 거네요.” “그래.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문서에서도.” 저녁 무렵 세한이 내 사무실 대표번호로 연락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계속 나오면 회사에서 책임을 모두 떠안을 것 같다고 했다. “서 조사관님, 제가 잘못한 걸 쓰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지 않은 일까지 잘못했다고 쓸까 봐 무서워요.” “두 가지를 나눠 적으세요.” “뭐라고요?” “직접 했다고 기억하는 행동. 기록으로 확인됐지만 누가 했는지는 모르는 행동. 그리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적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써도 아무도 안 믿으면요?” 나는 그의 질문에 쉬운 위로를 줄 수 없었다. “그때는 기록과 진술을 다시 대조해야 합니다. 제 말이 아니라 수사기관과 적절한 법률 조력을 통해서요.” 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는 그날 한 사람이 급하게 프린터 옆 공용 PC를 썼던 걸 기억합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군지 보셨습니까?” “얼굴은 못 봤어요. 등만 봤습니다.” “그때부터 기억하셨습니까?” “아니요. 최근에 그날 얘기가 계속 나와서 떠오른 거예요. 진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는 방금 자신의 기억이 최근 정보 때문에 바뀌었을 가능성까지 말했다. 그 정직함을 곧바로 범인을 찾는 도구로 쓰고 싶지 않았다. “그 기억이 처음 떠오른 시점과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도 함께 적어주세요. 그리고 경찰에 그대로 말씀하세요.” “그게 도움이 될까요?” “지금은 모릅니다.”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적었다. ‘누군가 PC를 썼다는 최근 기억. 독립 검증 필요.’ 그날 세한과의 통화가 끝난 뒤 나는 작은 기록 실험을 했다. 사람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현재의 설명에 영향을 받는지 나 자신을 대상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지난 11월 3일 내가 오선영과 통화하던 시각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나는 10시 38분이라고 쓸 수 있었다. 그 숫자는 실제 기록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 사무실 창문이 열려 있었는지, 창밖에 누가 서 있었는지 묻자 확실하게 답할 수 없었다. 기억은 처음부터 빈칸이 있는 채로 남는다. 그 빈칸을 채우기 위해 나중에 본 문장을 집어넣을 때 우리는 자신이 기억한다고 느낀다. 윤세한이 프린터 옆에서 본 사람의 등은 실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검은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는 남궁태식의 진술과 같은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의 문장이 섞였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내 옛 일지를 펼쳐 당시 현장을 기억하는 대목을 찾았다. 일지에는 ‘우편함 앞에 서 있던 배달 오토바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릿속의 장면에는 오토바이 옆에 검은 외투의 남자가 보였다. 그날 기록 어디에도 외투 색깔은 없었다. 나는 그 단어를 지웠다. 정민규의 사례도 생각났다. 그는 출입 경위서에 잘못된 수신처를 고쳤고, 그 덕분에 새 단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자기 기억이 확실하다고 우겨서 수사에 도움이 된 게 아니었다. 남은 자료와 기억을 구분했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늦은 저녁 오선영에게 전화가 왔다. “윤세한의 지난 접속 기록 중 일부가 아직 보존돼 있대. 당시 휴대전화와 PC의 로그가 서로 달라서 업체가 추가 확인 중이야.” “계정 두 개가 동시에 쓰였다는 겁니까?” “아직 그런 결론은 아니야. 로그인 갱신이나 재접속이 다른 기록으로 찍혔을 수도 있어.” 나는 상대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렇게 완벽하게 흔적을 지울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관리가 느슨한 시스템에서는 악의를 가진 사람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빈틈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빈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곧 범죄는 아니었다. 확정된 사실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해묵은 질문을 바꿨다. ‘누가 그 컴퓨터 앞에 있었는가’에서 ‘그 컴퓨터가 무엇을 실행했고 그 결과는 어디로 전달됐는가’로. 사람의 이름을 몰라도 그 결과가 남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 경로는 추적할 수 있었다. 오후 열한 시, 익명 발신자의 메일함은 조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상대는 내가 새 단서를 확보한 날이면 어김없이 다음 질문을 던졌다. 오늘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나는 익명 메일들의 제목만 모아 날짜순으로 인쇄했다. 메일이 없는 날도 표시해 놓았다. 침묵을 의도라고 단정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침묵 때문에 나는 오히려 불안해졌다. 하지만 발신자가 침묵하는 이유까지 내 멋대로 채울 수는 없었다. 나는 받은 메일이 없는 날에도 수사 기록을 작성했다. 진실은 누군가 질문을 던질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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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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