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일 목요일, 박혜림은 채용 담당자에게서 다시 연락을 받았다. 서류 검토를 재개하겠다는 통보였다. 합격도 불합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면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제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건 아직도 모른대요. 그냥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고만 해요.”
“어떤 자료를 더 요구합니까?”
“제가 받지 않은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래요.”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하지 않은 행동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끝이 없을 수 있다. 서명하지 않았다는 말을 확인하는 것과 서명하지 않았음을 전부 입증하라는 건 다르다. 담당자가 악의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채용 심사에서 분쟁을 피하려는 평범한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는 다시 과거의 문서 앞으로 불려갔다.
“직접 보내신 정정 진술과 회사의 사용 중단 회신을 묶어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 이상은 채용 담당자에게 어떤 확인이 왜 필요한지 서면으로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따지면 저를 뽑을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곧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정답이 없는 질문인 거 알아요.”
문제는 정답이 없는 게 아니었다. 정답을 낼 권한이 내게 없었다. 내가 혜림의 대신 서서 채용 담당자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그녀가 생계를 걸고 한 선택에 내가 당연하다는 듯 조언을 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그날 오전 오선영은 임소율의 2025년 신고 이관 기록에 관한 새 사실을 알려줬다. R-04는 해당 프로그램 버전에서 ‘이관 후 종결’이라는 뜻이었다. 이 점은 이미 확인됐다. 새로 드러난 것은 그 코드가 회사의 월간 보고서로 넘어가면서 ‘철회 포함 종결’이라는 상위 분류로 묶였다는 사실이었다.
“오표기가 생긴 경로를 찾은 겁니까?”
“일부. 프로그램의 연동표에는 그렇게 표시돼 있었어. 그런데 그 연동표를 누가 승인했고, 경고를 받은 뒤 왜 고치지 않았는지는 남았지.”
“그럼 임소율이 직접 철회했다는 뜻은 아니군요.”
“아니. 그리고 그 오표기 자체가 곧 고의 조작이라는 증거도 아니야.”
나는 회사가 피해자에게 내민 공문을 떠올렸다. ‘귀하의 철회 요청에 따라 처리되었습니다.’ 그 문장은 프로그램이 서로 다른 종료 사유를 한 바구니에 넣어놓았을 때도 사람에게는 개인의 의사를 확인한 말로 읽혔다.
오후 한 시, 회사의 정정 담당자가 임소율에게 보낸 새 공문이 확인됐다. ‘기존 보고서의 철회 표기는 부정확하며, 해당 신고는 이관 후 종결 처리된 것으로 확인된다.’
임소율은 내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한 문장이 고쳐졌어요.’
나는 축하한다고 쓰다가 그만뒀다. 한 문장이 고쳐진 걸로 지난해의 소득 손실이나 주변의 의심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신 ‘그 문서의 사본을 보관하고, 이미 전달된 곳에도 정정이 갔는지 확인하세요’라고 답했다.
그날 오후 세 시에는 배정우 사건의 별도 진행 상황을 들었다. 나는 오선영이 직접 언급한 범위만 기록했다. 배정우 명의의 차량이 원효로 근처 주차장에 들어간 기록은 여전히 있었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 배정우가 운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주차 관리인은 차를 보았다는 진술과 운전자의 얼굴을 보았다는 진술을 구분하고 있었다.
“그날 누구에게 차 열쇠가 있었는지 확인했습니까?”
“유족에게 확인 중이고, 별도 수사팀도 움직이고 있어.”
“살인사건과 서류 사건은 계속 분리해서 보고 계신 거죠?”
“그래. 연결되는 증거가 나오면 연결하겠지만, 처음 받은 예고문이 연결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어.”
나는 처음 사건기록에 적혀 있던 배정우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날부터 우리는 그의 과거를 조사했고, 그의 행적을 범죄자의 행적처럼 해석할 뻔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저지른 잘못이 있다 해도 그를 죽인 사람은 따로 있을 수 있다.
늦은 오후 한유리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기사에 임소율 신고의 철회 오표기를 넣었습니다. 사람의 의사를 확인한 기록이 없었다는 점도요.’
기사를 확인하니 그녀는 회사명을 명시했지만 미확정 개인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회사 측 해명과 정정 문구도 함께 실었다. 나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기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 우리가 확인한 사실과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이름을 혼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밤 아홉 시, 박혜림이 다시 연락했다.
“오늘 채용 담당자한테 답했어요. 제 이름으로 작성된 문서 중 제가 받은 건 이거고, 이건 받은 적 없다고요. 추가 확인이 필요하면 어떤 근거인지 적어서 보내달라고 했어요.”
“좋은 판단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번엔 제가 직접 쓴 문장이라서 마음이 좀 낫네요.”
나는 그 말에 오래 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명의를 훔쳐 적는 사람을 쫓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돌려줘야 할 것은 각자가 자신의 말을 자기 이름으로 남길 권리였다.
오후 여섯 시, 나는 임소율의 지난 신고서를 나란히 놓고 한 장의 설명표를 만들었다. 처음 접수된 신고는 2025년 8월 22일 오전 9시 8분이었다. 기록에는 신고자가 철회를 요구했다는 문장이 없었다. ‘이관 후 종결’은 담당 부서가 바뀌면서 첫 접수창구의 처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다음 달 회사 보고서에서 이 상태를 포함한 항목에 ‘철회 포함 종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차이를 표로 설명하니 임소율도 비로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고 했다.
“그럼 그 달 보고서 숫자 중에는 저처럼 철회한 적 없는 사람도 들어가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 건수는 회사가 분리해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같은 일이 생겼다면요?”
“그 점도 공식 문제제기에 포함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숫자만 보고 다른 사람이 모두 피해자라고 단정하지는 마세요.”
임소율은 내 말을 들은 뒤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않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제게 잘못 적힌 건 지워야죠.”
그 한마디에 나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복잡한 회계 차액을 쫓고 있었다. 3억 8천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귀속됐는지, 1억 8천의 미설명 금액은 무엇인지. 그러나 신고자가 원한 첫 번째 답은 자기 의사를 누가 바꿔 적었는지였다.
그날 회사의 회계 담당자가 보낸 추가 답변에는 흥미로운 문장이 있었다. ‘R-04 오류의 수정은 기존 비용 귀속 승인 기록의 정정을 자동으로 수반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표시했다. 신고 상태의 정정과 비용 귀속의 정정은 서로 다른 시스템에 있었다. 회사가 첫 번째를 고쳤다고 두 번째까지 해결한 척할 수 있었다. 그 차이가 악역에게 또 다른 탈출구가 될지 몰랐다. 동시에 선량한 직원이 정말로 첫 번째만 고쳤을 수도 있었다.
나는 오선영에게 그 문장을 전달하고 검토 대상이 분리돼야 한다고 적었다. 선영은 ‘이미 그렇게 보고 있어’라고 답했다. 어쩌면 나보다 앞서 확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겨둔 문장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같은 구분을 찾는 데 시간을 덜 쓸 수 있으니까.
그날 밤 익명 메일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오선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윤세한을 다시 확인할 거야.”
“이유가 있습니까?”
“그 사람이 2025년 8월 22일 시스템 연동 장애를 보고한 시각을 찾았어. 완료 처리보다 늦어.”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아직은 아무 뜻도 아니야. 보고가 늦은 건지, 완료가 누군가 먼저 눌러진 건지, 둘 다일 수 있으니까.”
나는 달력에 1월 15일을 표시했다. 실수의 책임을 묻는 것과 범죄의 손을 찾는 일. 두 질문이 처음으로 같은 사람의 시간표 위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제8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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