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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84화
PAYLUA ORIGINAL · 제84화

84화. 실수를 고치는 사람

내일의 살인사건이 오늘 접수됐다 · 3,669자

오프라인 책장
‘서명 불요’라는 말은 서명이 존재한다는 뜻도, 서명이 필요 없었다는 뜻도 아니었다. 어떤 처리 절차에서 특정 서명 단계를 건너뛰도록 설정됐다는 뜻일 수 있었다. 나는 1월 13일 수요일 아침 그 문장 옆에 가능한 해석을 네 개 적었다. 원래 필요 없는 서명. 다른 서류로 대체된 서명. 담당자 재량으로 생략된 서명. 누군가가 나중에 생략했다고 꾸민 서명. 네 개 중 어느 것도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오선영에게서는 의외의 연락이 왔다. “어제 네 이름으로 완료 알림을 보낸 경로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어. 민규가 그걸 발견했어.” 정민규 순경. 임소율 연락처 확인 과정에서 회사에 경찰의 움직임을 알렸고, 이후에는 사진 공유와 수신처 정정 누락까지 스스로 인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이번에는 무엇을 놓쳤는지부터 생각했다. 그 생각이 내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뭘 찾았습니까?” “업체 발송 알림과 경찰에 제출된 처리 화면의 접수 번호는 같아. 그런데 알림에 쓰인 문구를 고르는 프로그램의 버전이 달랐어. 구형 서식에서는 ‘예약 처리 완료’를 그냥 ‘인수 확인 완료’라고 표시해.” “그게 사실이라면 누군가 문구를 조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동시에 누군가 그 버그를 알고 일부러 네 이름으로 예약을 넣었을 가능성도 있어.” “민규가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지난번 정정 통지를 놓친 수신처들을 다시 점검하다가 발송 테스트 기록을 찾았대. 자기 실수 때문에 시작한 점검이야.” 나는 그 장면을 떠올렸다. 자책하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고 문서 하나를 지우는 대신, 자신이 보지 않았던 문서까지 뒤지는 모습. 그는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한 구멍을 실제로 막아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다른 문제가 드러났다. 정민규가 오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경찰 내부 실무 보고서에 첨부한 화면 하나가 업체의 회신 문서에 그대로 등장한 것이다. 보안상 공개하면 안 될 내용이 있었다고 단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면에는 그날 내가 받지 않은 인수 요청의 접수 번호와 세부 시각이 표시돼 있었다. 수사팀의 외부 회신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만 가리지 않은 채 전달된 정황이었다. “본인이 보냈습니까?” 내가 물었다. 오선영은 고개를 저었다. “민규가 작성했고, 대외 공문은 다른 담당자가 내보냈어. 둘 다 확인하겠어.” “그 화면으로 익명 발신자가 뭘 할 수 있습니까?” “번호를 알고 있는 척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번호가 범행에 이용됐다는 증거는 아직 없어.” 나는 불쑥 화를 내고 싶어졌다. 어렵게 확인한 내용이 또 다른 사람의 무심한 전송으로 넓게 퍼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나 이미 전송된 파일에 화를 낸다고 목적지가 바뀌지는 않는다. “어디까지 나갔습니까?” “업체 지정 담당 부서에만 발송된 것으로 확인됐어. 거기서 더 나갔는지는 조사 중.” “민규는 자신이 다 망쳤다고 생각하겠네요.” “아마도. 그렇다고 그 생각을 이유로 조사에서 빼줄 순 없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대신 그 애가 만든 점검표 덕분에 우리도 다음 경로를 볼 수 있었어. 잘못과 기여를 한 장에 같이 적으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잖아.” 오후 세 시, 임소율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자기 신고 기록의 ‘철회’ 안내문 발송을 중단해 달라는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발송된 안내는 회수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안 오는 거면 된 거 아닌가요?” 내가 물었다. “제가 안 받는 것하고 다른 사람이 안 보는 건 다르죠.” 그녀는 올해 말까지의 경력증명서 발급에 그 잘못된 상태가 남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회사는 정정 처리를 약속했지만 실제 반영 여부를 검증하는 건 그녀 몫이었다. “정정된 문서 원본을 받으셨습니까?” “접수증만요.” “그렇다면 정정 완료라고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을 서 조사관님이 먼저 해주네요.” 나는 말뜻을 알아차렸다. 전에는 내가 사건 해결에 몰두한 나머지 그녀가 실제로 무엇을 받았는지 묻지 않았다. 퇴근 무렵, 오선영이 내 사무실 앞에 잠깐 들렀다. 그녀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출고 요청 처리 흐름 — 확인 서식.’ 대외 공개 가능한 문서였다. 서류는 신청, 접수, 배정, 인수, 보관 종료의 다섯 단계로 되어 있었다. 9시 16분에 완료 알림이 갔던 건 두 번째 단계였다. 실제 인수 단계에는 아무도 서명하지 않았다. “이제 발신자가 뭘 던져도 네가 받았다는 말만으로는 통하지 않아.” “발신자는 다른 서류를 만들겠죠.”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지금까지의 방법 하나가 무너진 건 사실이야.” 그녀가 돌아간 뒤 나는 지난 메일들을 다시 훑었다. 상대는 늘 ‘너는 이런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내가 그 말을 반박할 방법조차 찾지 못했다. 이제는 적어도 한 번, 그가 기대한 행동을 하지 않은 기록이 생겼다. 오후 여섯 시를 넘겨 정민규에게서 짧은 연락이 왔다. 사적인 통화가 아니라 오선영을 통해 전달된 정정 내역이었다. 그는 최초 보고서에서 전송 대상을 정확히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바로잡았다. 자신이 작성한 실무 보고서는 원칙상 대외 회신에 그대로 붙이면 안 되는 것이었고, 검토 담당자가 참고자료와 첨부자료를 혼동했다고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민규가 자기 잘못을 더 키우는 보고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선영은 내 표정을 읽은 듯 말했다. “잘못을 인정했으니 끝이라는 뜻은 아니야. 민규가 작성할 때 경고 표시를 해두지 않은 것도 문제고, 검토 담당자가 확인 없이 첨부한 것도 문제야. 각각 어떻게 책임질지 정리하고 있어.” “둘 중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몰면 편하겠네요.” “그래서 편한 쪽으로 안 하려고.” 수사팀 내부에도 누가 어디까지 잘못했는지 따지는 일이 남았다. 그러나 선영은 외부에 노출된 자료의 실제 범위부터 확인하고, 더 이상 같은 내용이 재전송되지 않도록 회신 양식을 바꾸는 조치를 병행했다고 했다. 변명보다 먼저 피해를 줄이는 일이었다. 그날 저녁 내 사무실 문 앞에서 한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벽에 붙은 ‘서진혁 조사사무소’ 표지를 보고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나는 문을 열지 않았다. 인터폰으로 방문 목적을 물었다. “온새문서지원에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공식 공문을 보내주십시오. 지금 현장에서 확인할 내용은 없습니다.” 남자는 한참 서 있다가 돌아갔다. 나는 오선영에게 해당 상황과 시각만 전달했다. 그 사람이 직원인지, 가짜 방문자인지, 우연히 잘못 찾아온 사람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들고 있던 봉투를 내가 받아버렸다면 ‘직접 인수했다’는 새로운 기록이 생길 수도 있었다. 나는 문을 잠근 뒤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부터 상대가 던지는 모든 말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게 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그 생각 역시 지나치면 위험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방문자의 마음이 아니라 내가 어떤 절차로 자료를 받는지였다. 밤 열한 시 익명 메일이 도착했다. ‘확인을 미루는 방법도 배웠군요. 그러면 다음에는 확인하지 않은 대가를 보게 되겠죠.’ 그 밑에 낯선 문서 제목이 있었다. ‘2025.08.25. 미통지 책임자 목록 — 열한 번째 항목.’ 나는 화면을 한동안 보다가 제목만 따로 적었다. 실제 파일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문서의 내용보다 왜 지금 열한 번째 항목을 꺼내 들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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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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