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림은 자기가 이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1월 5일 화요일 오전, 그녀는 화진모빌리티에서 온 공식 회신을 보여주었다. 회사는 박혜림 명의로 발송된 합의 동의 이메일이 본인 의사를 확인할 자료로 충분하지 않다고 인정했다. 기존 동의 기록은 분쟁 해결 근거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문장도 있었다.
"그럼 이제 끝난 거 아닙니까?" 나는 물었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읽으셨잖아요."
그녀가 화면 아래쪽을 가리켰다. 정정은 회사 내부의 법무 검토용 기록에만 반영된다고 했다. 외부 유통된 자료의 정정, 면접 과정의 불이익, 상담 비용에 대해서는 별도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동의를 보냈던 계정의 책임자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끝난 건 그 회사가 그 가짜 답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부분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 기록의 한 줄은 정정될 수 있어도, 그 기록을 본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판단한 내용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가 면접에서 설명해야 할 공백도 그대로였다.
박혜림은 내 앞에 영수증 세 장을 올려놓았다. 법률 상담, 이동 비용, 서류 발급. 금액을 합치면 대단한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돈만 보여주려는 게 아니었다.
"제가 저를 증명하러 다니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두 번 빠졌어요. 그날의 시간은 어디에 적습니까?"
"별도로 기록하셔야 합니다."
"누가 인정해줍니까?"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분쟁 해결에 들어가는 비용을 실제 손해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입증과 법적 판단에 달려 있었다. 내가 그 결론을 대신 내릴 수는 없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전화에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더니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면접을 봤던 업체였다.
"받으셔도 됩니다. 저는 나가 있겠습니다."
박혜림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전화한 사람에게 누구랑 있는지 설명할 필요 없죠."
그녀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져 통화했다. 십 분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불합격이었다. 업무 역량과 무관하게 이미 다른 지원자를 선택했다는 설명이었다.
"그게 가짜 메일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그녀는 자기 말 끝에 웃음을 붙이지 않았다. 눈물도 참으려 하지 않았다. 실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왜 감정을 증거처럼 설명해야 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오후, 오선영은 회사 측 회신의 전달 경로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최초의 '동의 확인' 화면은 법무·준법지원실에서 검토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그 양식에 박혜림의 이름을 넣은 사람과 실제로 이메일을 보낸 사람이 같다는 증거는 없었다. 백이준은 해당 양식을 내부 검토 자료로 제공했지만 개별 발신을 지시한 적은 없다고 진술했다.
"그럼 백이준이 이 일을 만든 게 아닐 수 있겠네요."
"가능성은 둘 다 열어둬. 내부 양식을 관리했다는 것과 사칭을 했다는 건 다른 이야기니까."
나는 실제 발송 경로를 생각했다. 사칭된 답장을 회사가 먼저 받았다고 주장한 시간과, 박혜림이 회신을 요구받은 시간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12월 29일 확인한 그 시간차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선배, 합의를 요구하기 전에 동의 메일이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은요?"
"시간대를 맞춰서 다시 확인 중이야. 회사 서버는 한국 시간, 협력업체 보고서는 세계협정시를 썼더라고."
나는 서둘러 펜을 놓았다. 몇 시간 차이로 보이는 기록이 실제로 같은 순간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 시간대 하나를 놓치면 인간의 실수를 범죄의 증거로 오해할 수 있었다. 상대는 바로 그런 오해를 기다렸을지 모른다.
퇴근 무렵 백이준의 회사 측 설명 자료를 읽으며 또 하나의 함정을 발견했다. 법무팀은 '당사자의 전자적 회신을 확인했다'고 적어놓았다. 나는 그 문장의 뜻을 세 가지로 나눴다. 해당 주소에서 메일이 도착했다는 것. 그 주소의 소유자가 직접 작성했다는 것. 메일을 보낸 사람이 내용을 이해하고 동의했다는 것.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사실이다.
오선영은 회사 서버 기록에서 가장 앞의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신 주소로 표시된 값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누가 계정에 접속했고 누구의 지시로 회신했는지는 별도 확인이 필요했다. 회사의 회신이 개선됐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분까지 해결됐다고 해서는 안 됐다.
나는 박혜림에게 이 구분을 쉽게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오늘 그녀는 이미 불합격 통화를 받았다. 내가 증거에 관한 새 발견을 했다는 이유로 다시 삶을 수사실로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대신 당사자가 요청한 사실관계 정리표를 완성했다. 날짜와 원문 보존 여부, 그날 확인된 사실, 미확인 항목을 나란히 배치했다.
표를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가 동의 회신을 처음 근거로 언급한 날짜는 박혜림에게 합의안을 공식적으로 전달한 날짜보다 빨랐다. 시간대 차이를 보정해도 날짜 자체는 남았다. 다만 이것이 사칭의 확증은 아니었다. 사전 협의가 있었거나 회사의 발송 기록이 늦게 등록됐을 수도 있었다.
오선영은 나에게 물었다. "넌 왜 이 기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상대가 박혜림 씨가 실제로 답할 기회가 생기기도 전에 답했다고 주장했다면, 그건 누군가 의사를 대신 만들려 했다는 단서니까요."
"그렇다면 답할 기회가 언제였는지부터 명확히 확인해야겠네."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말 한마디의 순서가 한 사람의 자유로운 의사를 가짜로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그 시간을 대충 맞추는 순간, 보호를 명분으로 한 새로운 조작이 시작된다. 그래서 기록에는 불확실한 시각의 원본과 해석 가능한 범위를 따로 표시했다.
박혜림은 나중에 이 표를 보며 말했다. "이렇게 쓰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네요." 나는 그 말에 짧게 답했다. "사실을 확인하는 표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표가 아니니까요."
저녁 여덟 시, 정민규가 오선영을 통해 전달해온 짧은 사과문을 보았다. 그의 관계기관 송신 실수로 특정 정보가 잘못 포함됐고, 정정과 회수 요청을 진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박혜림의 이름은 쓰지 않았다. 정민규가 무죄라는 뜻도, 모든 피해가 그의 실수에서 비롯됐다는 뜻도 아니었다.
나는 오선영에게 말했다. "민규가 이제 자기 실수를 인정한 걸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문서를 받은 기관이 실제로 어떻게 처리했는지 확인하고 있어."
그녀가 덧붙였다. "그런데 이건 꼭 구분해. 민규가 무단 유출을 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어. 수신 대상을 잘못 확인한 행정 실수와 외부 캡처의 제작은 다를 수 있어."
나는 노트에 두 줄을 썼다. 실수의 책임. 그 실수를 이용한 책임. 둘을 혼동하는 순간, 진범은 보이지 않게 된다.
밤 아홉 시가 넘어 박혜림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떨어진 곳에서 내일 다시 연락 준다고 합니다. 불합격 취소가 아니라 참고할 자료를 다시 보겠다고요.'
나는 축하한다고 답하지 않았다. 그 회사가 마음을 바꾼 건지, 새로운 확인을 하려는 건지 몰랐다. 대신 그녀가 원한다면 회사에 제출할 사실관계 표를 불필요한 추정 없이 검토해줄 수 있다고 답했다.
곧이어 익명 메일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사건 발생 예고가 아니었다.
'정정은 이겼군요. 하지만 이력서는 누가 돌려주죠?'
나는 처음으로 발신자가 인간의 약점을 너무 정확히 찌른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그가 박혜림을 돕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고통을 정확히 묘사하는 것은 고통을 만든 사람도 할 수 있으니까.
제7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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