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박혜림 대신 새벽 재고조사에 투입될 사람의 이름이 확인됐다.
이명석. 마흔여덟. 같은 기록보관 회사의 계약직 작업반장으로, 기존 야간업무 담당자는 아니었다.
"이 사람은 왜 갑자기 대체 근무를 맡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오선영이 답했다. "박혜림이 개인 사정으로 빠지니 원래 업무를 잘 아는 사람을 넣은 거래. 회사 설명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
"이명석 씨도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경찰이 접촉했고, 야간 작업에 참여하지 않게 됐어."
"그럼 다른 사람이 또 들어가겠네요."
"그래서 아예 재고조사 일정을 중단시키고 현장 안전을 확인 중이야. 회사가 반발하긴 하지만."
나는 노트를 덮었다. 상대는 박혜림을 특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혜림을 빼면 이명석이 들어오고, 그마저 빼면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피해자 이름이 아니라 어떤 자리 자체를 노리는 작전일 수 있었다.
"재고조사를 중단하면 회사 쪽은 뭐라고 합니까?"
"손해배상을 검토하겠다고 했어. 영업손실을 주장하고 있고."
"법무팀입니까?"
"백이준이라는 사람이 담당하고 있어."
내가 지난해 받아 본 그 이름이었다. 그는 단순히 소송을 들먹이는 직원이 아닐 것이다. 문서보관과 승인 절차를 알고 있고, 회사의 위험을 비용으로 계산할 수 있는 사람. 그렇다고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백이준이 직접 연락했습니까?"
"응. 부드럽고 아주 정확하게 말하더라. 경찰 안전 확인에는 협조하겠지만 수사 범위를 넘는 영업방해에는 공식 이의를 제기하겠대."
"논리적으로는 가능한 주장입니다."
"알아. 그래서 우리도 범위와 근거를 남기고 있어."
나는 박혜림의 안전에만 집중하다 놓쳤던 것을 생각했다. 경찰이 출입을 막으면 그 결정은 기록으로 남는다. 그리고 나중에 누군가 기록의 빈틈을 찾아 법적 압박을 할 수 있다. 상대가 그걸 노린다면, 힘으로 밀어붙이는 건 오히려 수사를 불리하게 만든다.
나는 원효로 창고의 오래된 사업자 등록정보를 찾아보다 이상한 날짜를 발견했다.
백이준의 통화가 오기 전까지 나는 그를 명백한 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문제는 그가 실제로 적법한 권리를 행사하면서도 수사를 늦출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주장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창고를 뒤진다면, 서류가 발견돼도 그 문서의 법적 의미를 놓고 싸우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
나는 지난해 화진모빌리티 관련 소송 자료 중 공개된 판결문을 찾았다. 회사가 거래처와 대금 지급을 두고 다툰 사건이었다. 그 사건에서 회사가 이겼다는 사실 자체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판결문에 인용된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계약서상 명의와 실제 이행 주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백이준은 당시 회사 측 대리인의 사실관계 정리를 지원한 사람으로 이름이 등장했다. 무죄도 유죄도 아니었다. 그가 서류의 명칭보다 실제 책임자가 누구인지 따지는 데 익숙하다는 단서였을 뿐이다. 나는 상대가 유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경계하되 경멸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만일 그가 최명환에게 불리한 서류를 일부러 남기려 한다면? 만일 최명환이 경찰의 주목을 끌도록 도와주는 척하면서 다른 일을 진행한다면? 나는 추측을 몇 개 더 썼다가 모두 '미확인' 표시를 붙였다. 그 표시를 없애는 방법은 상대를 자극하는 전화가 아니라, 확인 가능한 계약서와 승인 이력을 찾는 일이었다. 창고의 소유회사와 화진모빌리티의 임대 계약은 지난해 9월 종료됐다. 그런데 11월 초까지 출입 권한을 가진 직원이 있었다. 계약 종료 이후에도 물품 회수 등 정당한 이유로 출입할 수는 있지만, 권한이 언제 누구에게 남았는지 확인할 가치가 있었다.
그 자료를 오선영에게 전달하자 그녀가 말했다.
"이미 출입 권한 이력을 요청했어. 그런데 네가 찾은 공고 덕분에 계약이 종료된 날짜를 대조할 수 있겠네."
우리가 처음으로 상대의 계획보다 앞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고 지루한 확인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유리에게서는 기사 시안이 도착했다. 그녀는 공개하기 전에 내 답변 부분의 정확성을 다시 확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나에게 유리하게 고치지 않았다. '경찰에 문서를 전달했다'는 사실과 '배정우를 범인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분리해 달라고만 했다.
잠시 뒤 한유리가 전화했다.
"놀랍네요. 보통 이런 상황이면 다 지워달라고 하는데."
"제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쓰시면 문제지만, 한 말은 한 말입니다."
"그게 공격받을 수도 있어요."
"그럼 공격받아야죠. 그 말을 하고 판단한 건 저니까."
한유리는 잠깐 웃었다.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C-12라는 표식 아세요?"
나는 침묵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보를 받았어요. 근데 이건 기사에 안 쓰려고요. 확인이 안 돼서."
"좋은 판단입니다."
"칭찬은 됐고요. 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말을 제보했을까요?"
나는 휴대전화를 세게 쥐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한 사람은 회사 소속이고, 한 사람은 아닌 건 확인했어요."
상대가 신원을 감춘 채 같은 정보를 여러 경로로 흘리고 있다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실제로 같은 사건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기자에게 출처를 캐묻지 않았다.
"같은 문구를 받으셨다면 같은 원본에서 나온 정보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같은 원본이요?"
"그건 기자님이 확인하셔야죠."
그녀는 내 말을 받아 적었다. 이번에는 내가 조금 웃었다.
전화를 끊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또 하나의 메시지가 왔다. 이번에는 한유리의 취재원이 아니라 모르는 휴대전화 번호였다.
'당신이 C-12를 찾는 동안 그들은 장부가 아닌 사람을 지우고 있습니다.'
나는 신고한 뒤에 메시지를 캡처해 보관했다. 발신 번호가 있다고 해서 발신자를 안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 명의일 수도 있고, 원래 번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때 박혜림에게서 공식 연락 경로로 전달된 진술이 하나 추가됐다. 그녀는 지난해 8월 19일 봉인표를 붙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직원은 당일 오후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고, 서류를 인수인계하지 않은 채 나갔다. 이름은 남궁태식.
나는 낯선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남궁태식."
오선영이 말했다.
"그 사람 현재 소재를 찾고 있어. 주소지에는 안 살고, 오래전 번호도 끊겼더라."
"그럼 그가 서류를 갖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 이름을 이용했을 수도 있지."
박혜림은 그날 자신이 담당한 봉인표 열두 개 가운데 열한 개만 인계 확인됐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했다. 마지막 C-12가 빠졌다. 그래서 보관회사 안에서 한동안 책임 논쟁이 있었고, 그 기록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기억을 믿기 전에 서류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오선영이 보낸 간략한 답을 기다렸다.
'사내 이의제기 기록 존재 확인. 관련 원본 확보 절차 중.'
그건 중요했다. 일 년 전의 기억과 현재의 문서가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누군가 꾸민 이야기라 해도 이제는 단순한 주장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 11시 44분, 백이준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사무실 대표번호를 통해 정식으로 연락했다는 것부터 눈에 띄었다.
"서진혁 조사관님. 화진모빌리티 법무·준법지원실 백이준입니다."
"말씀하세요."
"저희 회사와 관련한 자료를 여전히 확인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하는 건 공개된 기록과 제가 보관한 과거 업무자료입니다."
"물론입니다. 저는 조사관님께 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직원들에게 직접 연락하실 경우 법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직원들에게 직접 연락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상대를 흥분시키는 단어가 없었다. 그는 나를 위협하지 않고도 어떤 선택이 불리한지 말해 주고 있었다.
"백 실장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공개된 범위 안이라면요."
"지난해 8월 19일 서류보관 계약에 남은 이의제기 기록을 알고 계십니까?"
약간의 침묵. 길지 않았다.
"그런 절차는 각 담당 부서에서 처리합니다. 제가 모든 서류를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겠죠."
"다만 한 가지 조언은 드리죠. 조사관님은 지금 누군가가 보내온 기록을 기초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나중에 그 기록이 허위로 밝혀지면, 실제로 누군가 피해를 입었는지는 별개로 책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서로 불필요한 오해는 피했으면 합니다."
통화가 끝났다.
나는 녹음 파일을 보존하고 통화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백이준은 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틀렸을 경우의 비용을 먼저 설명했다.
나는 처음으로 확신에 가까운 인상을 얻었다. 이 남자는 나를 화나게 만들기보다, 내가 스스로 움직임을 제한하게 만들려는 사람이었다.
그가 내게 연락한 이유가 정말 법적 안내라면 회사 대표 이메일로 문서를 보내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는 직접 전화를 걸어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어떤 질문에서 멈추는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지, 얼마나 성급하게 반응하는지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통화 중 말한 내용을 다시 적었다. 내가 제시한 건 날짜 하나와 서류 인계 기록이라는 표현뿐이었다. 최명환을 범인으로 의심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C-12의 실제 소재를 안다고 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라면 그가 내 말만으로 얻은 새 정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내 반응을 살폈다면 나도 상대의 반응을 봤다. '8월 19일'이라는 날짜에서 그는 아주 짧게 숨을 멈췄다. 녹음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억한 변화였다.
그 변화에 증거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언젠가 서류가 확보됐을 때 대조할 관찰로 남겼다.
하지만 그것 역시 범인이라는 증거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종이에 굵게 썼다.
'그의 합법적 대응을 범죄로 단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대응으로 누구의 시간이 벌리는지 살핀다.'
다음 사건까지 다섯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상대가 계속 시각을 알려 주는 이유를 생각했다. 경찰에 충분한 시간을 주는 건 분명한 손해다. 그러나 그 정보 때문에 경찰이 어디에 누구를 배치하는지 알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는 시간을 알려 주면서 우리의 선택을 시험할 수 있다.
다만 그 시험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임소율을 보호했고 박혜림도 출근하지 않았다. 이미 실제로 지킨 것이 있었다. 범인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아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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