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5일 수요일, 오선영이 봉투 속 종이의 무게를 조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깐 웃었다.
"그 종이가 무슨 금괴라도 됩니까?"
"농담할 때 아니야. 서로 한 묶음이라는 주장부터 확인하고 있어. 종이의 재질, 제본 흔적, 출력 방식 같은 것 말이야."
종이의 무게만으로 진품을 가릴 수는 없다. 똑같은 용지에 인쇄한 위조본이라면 차이가 없을 수 있고, 같은 사무실에서도 프린터를 바꾸면 토너가 다르다. 하지만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네 장을 원래부터 함께 있던 문서라고 취급할 순 없었다.
나는 배정우의 누나가 말한 '종이 두 장'을 떠올렸다. 앞장을 바꾸면 같은 서명으로 다른 책임을 만들 수 있다는 가설. 반대로 배정우 자신이 서로 다른 두 묶음을 만들어뒀을 가능성도 있었다. 죽었다는 이유로 그의 행동을 전부 선의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오전 열 시, 보험사에서 재검산한 정산표가 도착했다. 3억 8천만 원은 당초 문제 제기한 총차액으로서의 의미가 있었으나, 상쇄 1억 2천만 원과 정산 시점 차이 8천만 원을 제외한 1억 8천만 원도 횡령액으로 확정된 건 아니었다. 그중 일부에는 정당한 회수 절차가 진행됐다는 기록이 붙어 있었다. 나는 가장 최근 금액을 크게 쓰지 않고 계산 근거를 따로 적었다.
이 숫자를 단정해 기사를 썼다면 회사는 물론 실무 담당자들의 삶이 휘청였을 것이다. 반대로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숫자를 숨기는 데만 신경 쓰면, 실제로 돈을 빼돌린 사람이 웃을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으려고 서명을 대신 금액의 경로를 따라갔다.
오전 내내 나는 오래된 복사기를 들여다봤다. 인쇄 업체에서 일하는 지인이 종이의 색이 조금 다르다고 무조건 교체된 원본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고 설명해줬다. 보관 장소의 습도와 빛, 복사한 방식에 따라 색도 변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지인의 말을 그대로 전문가 감정처럼 쓰지 않았다. 대신 확인할 사항으로만 정리했다. 원본의 크기, 종이결, 가장자리 손상, 두 장을 겹쳤을 때 생기는 차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점을 발견하는 일까지였다.
오선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봉투 사본이 두 시기에 인쇄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 보관 중 교체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선배는 몇 분 뒤 '맞아. 그래서 봉투 접착면도 감정 의뢰했어'라고 답했다. 나는 무슨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건드렸다는 결과가 나오면 수사 범위가 넓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가 좋아하던 가설 하나를 버리면 된다.
책상 위에는 지난해 내가 작성한 보험사기 조사 보고서도 있었다. 내 보고서에는 '회계 처리의 적정성 추가 확인 필요'라는 표현이 반복돼 있었다. 그 표현 뒤에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는 몰랐다. 계약이 종료됐기 때문이다. 일이 끝나면 사람이 아니라 서류만 남는다는 사실을 그때는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번 사건에서는 그 서류의 마지막 장이 사람에게 어떤 비용을 남기는지 알아야 했다.
점심 무렵 박혜림이 전화를 걸었다. 계약 갱신 거절 사유 문구는 정정됐지만, 회사가 새로운 현장에 자신을 배치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뭡니까?"
"고객사 신뢰 회복이 필요하대요. 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경찰에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데."
나는 그녀에게 대신 싸워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권한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정정 전후 문서를 보존하고, 부당한 불이익이 있다고 판단하면 노동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지만 기쁘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그 통화를 오선영에게 전하면서 박혜림의 동의를 먼저 받았다. 수사팀이 그녀의 고용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다. 다만 증언을 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다면 관련 경위를 살펴보는 일은 필요했다.
오후 세 시, 한유리가 사무실에 찾아왔다. 손에는 두 개의 인쇄물이 있었다. 둘 다 같은 날짜에 생성됐다는 온새문서지원의 교육용 표였지만, 한쪽에는 서명 칸 위에 '내용 확인'이, 다른 쪽에는 '비용 귀속 승인'이 적혀 있었다.
"이 둘이 같은 문서예요?" 내가 물었다.
"교육 자료니까 실제 사건 원본은 아니에요. 그래도 같은 뒷장을 붙이면 사람들 눈에는 다르게 보이겠죠."
나는 두 장을 책상에 나란히 놓았다. 문서 서식은 숫자보다 잔인할 때가 있다. '내용 확인'에 서명한 사람은 내용을 읽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런데 앞장이 '비용 귀속 승인'으로 바뀌면 남의 돈을 물어내야 한다는 인상을 준다. 같은 필적이어도 법적 의미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제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자꾸 마지막 서명만 찾았을까요."
한유리가 말했다. "범인이 그렇게 보게 만들었을 수도 있죠. 아니면 서 조사관님이 처음부터 그런 서류를 많이 보셨으니까요."
나는 후자가 더 쓰라렸다. 누가 조종한 게 아니라 내 습관이 편견이 됐다는 뜻이었다.
그날 저녁, 오선영은 뜻밖의 자료를 확보했다고 했다. 배정우 유족이 제출한 네 장 중 두 장은 같은 인쇄 작업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나머지 두 장은 인쇄 특성이 달랐다. 감식 중이므로 최종 결론은 아니었다.
"그럼 두 묶음이 섞였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네 장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는 말을 못 하는 정도야."
나는 봉투 밖에 적힌 문장을 생각했다. '처음 받는다면 열지 말 것.' 만약 서로 다른 출처의 종이가 섞여 있다면 이 봉투 자체가 누군가 조립한 정보일 수도 있다. 배정우가 남겼는지, 그가 맡긴 뒤 누가 건드렸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봉투는 유족이 보관했고 개봉하지 않았다는 거죠?"
"유족 진술은 그래. 다만 봉투의 접착 상태를 확인하고 있고 보관 장소에 다른 사람이 접근했는지도 조사 중이야."
그녀의 꼼꼼함이 마음에 들었다. 죽은 사람의 마지막 편지라는 이야기가 강할수록, 그 편지의 출처는 더 엄격하게 확인해야 한다.
한유리는 돌아가는 길에 말했다. "기사에서 문서가 바뀌었다고 쓰고 싶었는데, 오늘은 쓰지 않을게요." 나는 왜인지 물었다. "바뀌었을 수 있다는 것과 바꾼 사람이 범인이라는 건 두 번 건너뛰는 말이잖아요." 나는 그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뛰어넘지 않은 두 단계가 언젠가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무기가 될지 몰랐다.
밤에 나는 지난해 보험사에게서 받은 인쇄물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 스테이플러 자국이 세 군데 있었다. 나는 예전엔 그 자국을 무시했다. 오늘은 뒷장 왼쪽의 작은 종이 가루까지 보였다.
그러나 그 자국만으로 무언가를 증명할 수 없었다. 나는 원본을 직접 만지거나 훼손하지 않고 고해상도 사진을 찍어 선배에게 자료의 보관 상태와 함께 전달했다.
그때 오선영이 전화를 걸었다.
"진혁아, 배정우 유족이 말한 '두 장의 종이'를 기억하지?"
"네."
"그 종이들에 붙은 표시가 달랐다고 했잖아. 하나는 최종, 하나는 초안. 그런데 봉투에서 나온 종이띠에 글자가 있어."
"뭐라고요?"
"'최종을 보지 말고, 최종이라고 불린 것을 보라.'"
나는 그 문장을 메모했다. 겉으로는 수수께끼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 '최종'이라는 단어를 파일 이름으로 붙였다고 해서 그게 실제 최종 승인본은 아니다. 그 이름을 처음 누가 지었는지 찾아야 한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나는 대답했다. "문서 제목의 생성 이력을 확인해야겠네요."
선배가 말했다. "이번에는 제목뿐 아니라 실제 발송 시점까지."
통화가 끝난 뒤 나는 창가에 서 있었다. 봉투가 무겁게 느껴졌던 이유는 종이의 무게가 아니었다. 종이 네 장에 책임을 떠넘길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3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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