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우는 자기 죽음을 예언하지 않았다. 대신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2027년 5월 8일, 오선영은 외부 검수업체 당직 회선의 보존 음성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녹음에는 연결 안내가 먼저 나왔다. 이어 남자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화자는 감정 절차로 배정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됐지만 단일 녹음만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당장 그 서류를 회수하세요. 그 사람한테 넘기면 안 됩니다.”
상대 직원은 주소와 작업번호를 물었다. 남자는 번호를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최 실장이 직접 온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잠시 뒤 무거운 물체가 스치는 소리, “잠깐만요”라는 낮은 말이 들렸다. 연결은 끊겼다.
“통화 시각은요?”
“2026년 11월 3일 오후 7시 6분 무렵. 통신사업자 기록과 회선 서버 기록이 일치해.”
열두 분 뒤 공동현관 신고가 들어왔다. 사건의 시간을 좁힐 수 있는 첫 생생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곧 가해자의 이름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최 실장’이 최명환을 가리킨다고 해도 실제 방문 여부는 별도로 입증해야 했다.
선영은 이미 해당 시간대 이동 경로를 보전하고 있었다. 최명환 명의 차량의 위치 자료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차량을 맡겼을 수도 있었으니까. 수사팀은 인천 자택에서 떨어진 무인주차장 영수증, 인근 상점 결제 기록, 출입문 센서가 찍은 통행 간격을 대조했다.
나는 자료를 전부 볼 수 없었다. 선영은 공개 가능한 부분만 알려줬다. 최명환의 개인 결제 수단이 사건 당일 오후 인천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었고, 그곳 직원은 한 남자가 붉은색 서류가방을 들고 들어온 것을 기억했다. 직원의 기억은 나중에 기록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배정우의 집에 갔다는 증거는 아직 없습니까?”
“지금 조사 중이야. 단서를 결론처럼 말하지 마.”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오후에는 배은정을 만났다. 그녀는 통화 내용을 모두 듣고 싶다고 했다. 담당 수사관은 유족에게 허용된 절차와 감정 중인 내용을 분리해 설명했다. 배은정은 처음으로 동생이 죽기 전에 무언가를 지키려 했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울었다.
“그 사람이 원래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압니다.”
“정우도 회사에서 모르는 척했던 일이 많을 거예요. 그렇다고 그 사람이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않았다. 배은정은 옳은 말을 한 뒤에도 계속 울었다. 수사에서 어느 한 장이 수정됐다고 사람이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네 시, 정민규가 새 증거를 가져왔다. 지난번에는 19시 18분 신고를 놓쳤던 기록 담당자가 이번에는 16시 6분 신고를 먼저 확인하고 있었단다. 두 신고를 시간순으로 엮어보니 공동현관 잠금장치는 그날 오후부터 정상적으로 잠기지 않았다. 외부인이 출입할 기회는 있었으나 그날 출입한 사람을 특정할 수 없었다. 민규는 불완전한 결론을 작성하지 않았다.
“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기록을 덜 중요하다고 넘겼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기록 하나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정할 수는 없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어할 권리가 생기더라고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제대로 작성한 기록은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지만,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잡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오후 다섯 시, 오선영은 배정우가 그날 작성하던 반송 의견서의 마지막 저장 상태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파일은 보내지지 않았다. 마지막 줄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이었다.
‘개인에게 돌린 금액은 원자료가 없으면……’
그 뒤는 비어 있었다. 누군가 문서를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저장 시점 자체가 거기서 끝났다. 문장을 어떻게 마무리하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확정할 수 없다’고 쓰려 했을 수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쓰려 했을 수도 있었다.
“그걸 배정우의 양심선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한유리가 말했다.
“그렇게 쓰지 마세요. 그 문장에는 아직 결론이 없으니까.”
나는 내가 여러 해 보험사기 사건을 조사하면서 쓰다 만 문장을 떠올렸다. ‘보험금 지급에는 추가 확인이 필요……’ 끝까지 작성하지 못했던 그 문서 하나를 누군가 가져가 ‘사기 확정’이라고 제목 붙였다면 어땠을까. 실제 판단은 반대였을 수도 있다.
오후 여섯 시, 배은정은 동생의 노트북을 전달할 때 자신이 붙인 작은 메모를 수사관에게 보여줬다. ‘제가 이 폴더를 한 번 열어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메모가 증거를 망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숨겼다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열람했다는 기록은 남았고, 어떤 파일이 수정됐는지 별도로 분석할 수 있었다.
“제가 괜히 만졌죠?”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알려주셨으니 분석 범위를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는 먼저 물어볼게요.”
나는 고맙다고 했다. 우리가 상대보다 한 가지라도 나은 점이 있다면, 틀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나중에라도 고칠 수 있다는 점이어야 했다. 상대는 사람들의 실수를 예측했다. 그러나 실수를 인정하고 정정하는 일은 계속 예상 밖의 행동으로 남았다.
저녁에는 관리업체의 허위 출동 완료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직원은 자신의 출동 기록을 믿고 처음에는 실제 현관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현장 이동 통신 기록과 작업차량 운행표가 모두 그 진술과 어긋나자 그제야 방문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사망 사실을 알기 전의 태만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이 책임을 면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고의로 살인을 도왔다는 증거도 아직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의 잘못과 범인의 잘못을 분리해 적었다. 그러자 한유리가 물었다.
“그렇게 구분하면 결국 아무도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거 아닙니까?”
“반대입니다. 잘못을 정확히 적어야 책임이 피하지 못합니다. 살인범이라는 말로 모든 사람을 한데 묶으면, 작은 허위 보고 하나는 오히려 사라질 수 있습니다.”
유리는 한참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밤 아홉 시, 오선영이 내게 최명환의 입장을 전했다. 그는 인천에 간 사실을 일부 인정했다. 다만 배정우 자택은 방문하지 않았고, 상가 인근에서 전화로 다퉜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그 진술 역시 증거로 확인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입장문 마지막에는 아직 공개하지 않은 구체적인 시각이 적혀 있었다. 오후 7시 18분. 그 시각은 현관 신고가 접수된 때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가 물었다.
“최명환은 경찰이 보낸 참고자료를 봤다고 해.”
“그 자료에 비고 칸까지 있었습니까?”
“없었어.”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수첩에 밑줄을 그었다. 누군가 진짜로 그 시각의 신고를 미리 읽었을 수도 있고, 이미 알려진 다른 자료에서 추측했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왜 알고 있었는지를 묻는 편이 빨랐다. 그의 입장을 받아 적은 담당자에게도 그 시각이 어디서 나왔는지 확인을 요청했다. 그가 신고 시각을 미리 알았다는 것만으로 범죄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왜 그 시각을 방어 문장에 넣었는지 묻기에 충분했다.
새벽 무렵 나는 처음으로 상대가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살인 예고가 실패한 뒤 배정우가 죽었다면, 그 죽음은 누군가에게 커다란 기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가 생긴 시점에 범인이 이미 계획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보장은 없다.
처음부터 모두가 한패일 거라는 상상은 편리했다. 이제 우리는 그 편리함을 버려야 했다.
제19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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