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이 적힌 대체 계획을 읽고도 나는 곧장 백이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2027년 5월 7일, 오선영은 02-C 원고의 작성 단계와 검수 단계를 분리한 작업표를 보여줬다. 작성자는 외부 문서검수 업체의 공동 계정. 최초 저장 시각은 2026년 11월 2일 오후 8시 31분. 이후 여러 차례 내용이 수정됐다. 백이준의 개인 인증은 최종 검수 단계에 있었고, 파일 발송은 그 뒤의 별도 서비스 계정에서 이뤄졌다.
“그럼 처음 작성자가 백이준인지 모른다는 거군요.”
“맞아. 하지만 검수 때 무엇을 봤는지는 남아 있어.”
나는 작업표에서 ‘예상 반응’이라는 열을 발견했다. ‘즉시 경찰 신고’, ‘피해자 먼저 접촉’, ‘무대응’ 세 가지였다. 익명 발신자는 그중 하나가 일어나면 다음 판본을 내보내도록 여러 문구를 준비했다. 실제 내 행동은 두 번째에 가까웠다. 그래서 02-B의 후속 내용이 그쪽으로 변경됐다.
그런데 최초 PDF의 시간들은 어떻게 맞았을까. 나는 그 질문을 그대로 했다.
선영은 가장 오래된 파일을 열었다. 02-C에는 숫자 대신 시간대를 뜻하는 칸이 있었다. ‘수신 후 11분 내 피해자 접촉’, ‘접촉 후 11분 내 경찰 신고.’ 나중에 02-B로 변환한 문서에는 고정 시각이 들어갔다. 송신 시점을 22시 16분으로 맞춰 계산한 값이었다.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아니. 전부 맞은 게 아니야.”
선영은 실제 통화기록을 보여줬다. 임소율에게 건 첫 전화의 시작은 22시 27분이었다. 경찰에 건 전화는 22시 38분. 그러나 보고서에 적힌 피해자 통화 종료 시각은 실제와 몇 분 어긋나 있었다. 처음부터 완벽히 들어맞지 않았는데 나는 맞는 것만 붙들었다.
“저도 기억합니다. 처음엔 전체 기록이 아니라 중요한 두 시각만 봤어요.”
“상대가 노린 것도 그거겠지. 맞는 것만 보이게 만드는 것.”
문서의 PDF 생성시각은 받은 날 오후 9시 51분으로 남아 있었다. 그 사실도 조작의 증명은 아니지만, 파일이 미래에 생성됐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내가 그 시각을 마술처럼 받아들였던 게 오히려 부끄러웠다.
오후 열두 시, 임소율을 만났다. 그녀는 첫 전화에서 내가 사건 장소를 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설명했다.
“그 장소는 배정우 씨가 소개한 회사 담당자와 만나기로 한 곳이었어요. 안 가면 제가 문제 금액을 전부 인정한 걸로 처리하겠다고 했고요.”
“그 사람 이름은 들었습니까?”
“전화로는 본명을 안 댔어요. 제게는 회사 사람이라고만 했어요. 배정우 씨도 그 약속을 취소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배정우 씨가 직접 협박했습니까?”
“협박 문자에 그의 이름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보냈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제가 겁에 질려서 확인도 못 했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오래된 캡처 한 장이었다. ‘일정 취소 불가’라는 문장 아래 작은 회신 주소가 남아 있었다. 외부 문서검수 서비스에서 사용하던 업무용 주소와 도메인 형식이 유사했다. 나는 그녀의 동의를 얻어 정식 제출 절차를 안내했다. 내 휴대전화로 다시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오선영은 회사와 외주 업체의 자료를 대조해 원효로 장소 지정 자체가 회계 관련 회의의 정상 일정으로 등록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다. 누군가 사설 약속을 회사 명의로 꾸몄다. 그러나 배정우가 그 약속에 관여했다는 사실만으로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세 시, 오선영은 내게 숫자가 맞지 않았던 또 하나의 부분을 보여줬다. 첫 사건기록에는 시계 사진과 노란 플라스틱 조각이 있었지만, 원효로 건물의 실제 현장에서는 그 물건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사진들이 어디에서 촬영됐는지였다. 원본 촬영 장소 일부는 외부 검수업체가 몇 년 전 사용한 교육용 창고와 유사했다. 벽면의 안전 표지 위치가 같았고, 날짜가 잘린 시계는 판매용 이미지에 있던 흠집까지 같았다.
“전부 인터넷에서 가져온 겁니까?”
“전부라는 말은 하지 마. 지금 확인된 건 시계 사진 한 장과 배경의 일부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사람은 확인하지 않은 ‘전부’를 붙이고 싶어진다. 그 말 한 개로 증거 두 개가 흐려질 수도 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내가 쓴 메모에서 ‘미래 사진’이라는 제목을 지웠다. 대신 ‘출처 미확인 사진’이라고 고쳤다. 다른 말처럼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차이가 이 사건에서 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었고, 또 한 사람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임소율이 쓰러진 모습을 상상하게 했던 사진은 실제로 그 순간을 찍은 기록이 아니었다.
오후 다섯 시에는 정민규가 누락된 외부 수신처의 정정 회신을 끝냈다고 연락했다. 일부 자료가 이미 다른 계정으로 전달된 뒤였지만, 정정본이 도착한 사실을 상대 회사 담당자가 확인해줬다. 그는 보내기만 하고 끝났다고 적지 않았다. 전화로 확인한 담당자와 시각, 확인되지 않은 나머지 한 곳을 따로 남겼다. 나는 그 일을 두고 영웅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당연히 해야 했던 일이 마침내 제자리에 놓였을 뿐이니까.
저녁 무렵 고태원이 다시 진술했다. 그는 02-C의 제목을 11월 초부터 알고 있었으나 수신자별 시나리오의 내용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본사 계약 목록에는 접근 가능한 사람을 몇 명 더 올려두었고, 목록은 정기 점검 없이 수개월 방치됐다.
“그중 누군가에게만 권한을 줬습니까?”
“저는 승인 목록을 만든 겁니다. 실제 열람은 업체가 관리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일 수 있다. 동시에 권한을 쉽게 승인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태원은 처음으로 ‘계정 관리에 관한 별도 감사에 협조하겠다’는 확인서에 서명했다. 이전처럼 자기 이름이 나오면 모두 부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밤 여덟 시, 한유리는 나에게 사건기록의 최초 판본을 기사에 공개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사건 관련자의 전화번호와 피해자 주소가 남아 있으니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미 같은 문제를 발견했다며 익명화한 시간표만 쓰겠다고 했다.
나는 혼자 사무실에 남아 두 장의 시간표를 나란히 펼쳤다. 예상은 사람을 네모 칸에 넣는다. 실제는 그 칸을 벗어난다. 나는 경찰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먼저 전화했다. 임소율은 예고만 듣고 움직이지 않았고, 오선영은 서둘러 모든 사람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우리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상대한테 예상하지 못한 것이 더 있었다. 배정우가 죽었다는 사실이다. 02-C의 최초 시나리오에는 그가 ‘관심 용의자’로 남도록 돼 있었다. 그의 죽음은 원고의 어느 조건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럼 배정우의 죽음까지 계획한 사람은 다른 사람일 수 있겠네요.” 내가 말했다.
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02-C 작성자가 그의 죽음을 이용해 두 번째 이메일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어. 죽음을 예상한 것과 이용한 건 다르니까.”
그날 밤 익명 메일은 오지 않았다. 대신 선영에게서 수사 경과가 왔다. 사망 직전 배정우의 통화가 외부 검수업체 당직 회선에 연결됐고, 그 회선의 상담 음성 일부가 법적 절차에 따라 확보됐다는 것이다.
나는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 사건기록이 맞힌 시간보다, 살아 있던 사람이 남긴 마지막 질문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제192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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